寺庭看楙花(사정간무화) – 김시습(金時習), 명자꽃
조선 초기의 문인이자 불교 승려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선생의 ‘사찰 뜰에서 무화를 보고’라는 뜻의 사정간무화(寺庭看楙花)라는 시를 소개한다. 여기서 무(楙)는 모과를 말한다고 1527년에 어문학자 최세진(崔世珍)이 펴낸 한자 학습서인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楙(무)는 모괏 무로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모과는 관목에 작은 열매가 열리는 현재의 명자꽃 즉 산당화를 말한다. 그리고 교목에 큰 열매가 달리는 현재의 모과는 명자(榠樝)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둘 다 중국에서 도입된 외래종인데 중국에서 그 당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훈몽자회에 榠(명)은 명쟛 명으로 樝(자)는 명쟛 쟈로 풀이되어 있다. 현재의 명자꽃은 신라시대부터 도입되어 모과(木瓜)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재배되어 왔고 반면에 한참 후인 조선시대 1527년 이전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교목인 모과나무는 명자(榠樝)로 불리어 왔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도 약재로서 그렇게 각각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서양의 식물분류학이 도입되면서 초창기 국내 식물학자들이 이상하게 모과와 명자의 이름을 뒤바꿔 버렸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당시 일본으로부터 식물분류학이 도입되었는데 일본은 아직도 여전히 관목인 명자꽃을 모과라고 부르며 교목인 모과나무를 명자(榠樝)라고 부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다만 그렇게 변경한 단 하나의 단서가 있다면 그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수목학자인 진영(陈嵘, 1888~1971)박사가 1937년 발간한 중국수목분류학(中国树木分类学)에서 그동안 명자(榠樝)라고 불러오던 교목을 모과(木瓜)라고 변경하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쭉 중국의 정명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아래의 시에서 말한 무(楙)는 모과(木瓜)가 분명하지만 그 모과는 현재의 모과가 아닌 명자꽃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시기적으로 그 당시 국내에 모과가 도입되어 재배되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봐도 주렁주렁 달린 열매에 가지가 늘어지거나 단생이므로 꽃이 성글게 보이는 것은 현대의 모과에 대한 표현이랄 수도 있지만 제목이 열매가 아닌 꽃을 감상한 것이므로 이건 꽃이 아름다워 flowering quince로 불리는 명자꽃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귀엽고 아름다운 새소리와 잘 어울리는 꽃은 아무래도 모과꽃보다는 명자꽃이 제격이다. 그래서 매월당 시에서의 무(楙)는 글자 그대로 그 당시 모과인 현재의 명자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寺庭看楙花(사정간무화) – 김시습(金時習)
去歲初看葉落時(거세초간락엽시)
纍纍秋實偃柔枝(누루추실언유지)
今年又見踈花蘂(금년우견소화예)
恰恰鶯聲又一奇(흡흡앵성우일기)
지난해 처음 낙엽질 때 보았지
주렁주렁 열매가 어린 가지에
올해 다시 보니 성글은 꽃망울
꾀꼴꾀꼴 꾀꼬리 소리도 기이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