携中童與隣長朴英起(휴중동여린장박영기) 看躑躅長湍石壁(간척촉장단석벽) - 이색(李穡), 철쭉
우리나라 역사상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만큼 그를 수식하는 단어가 긴 사람도 드물다. 이색(李穡)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대학자이고 사상가이며 교육자이고 또한 철학가이자 시인이라고 소개된다. 그리고 익제(益齋) 이제현의 제자로서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이숭인, 권근, 하륜 같은 제자를 길러 대단한 스승에 대단한 제자를 둔 사람으로 기억된다. 여기에 포은(圃隱) 정몽주와 야은(冶隱) 길재 또는 도은(陶隱) 이숭인을 포함하여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에게는 그저 덤에 불과하다. 어떻게 일생 접하는 사람마다 당대도 아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일까 정말 제왕도 명군이 아니라면 이런 사례는 없을 듯하다.
그랬던 그도 공양왕 때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가 된 이후 1389년 62세에 개혁파 오사충(吳思忠)의 참소로 지금은 이북 땅인 경기도 장단(長湍)에 귀양간 적이 있는데 그 귀양지 장단에서 선왕 공민왕에 대한 그리움과 많은 문인들중 애제자(愛弟子) 유창에게 느낀 심정을 읊은 시가 목은시고권지35에 전한다. 오늘 소개할 시는 목은시고권지35(牧隱詩藁卷之三十五) 장단음(長湍吟) 중 携中童與隣長朴英起(휴중동여린장박영기) 看躑躅長湍石壁(간척촉장단석벽)이라는 긴 제목의 시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중동(中童)을 데리고 인장(隣長) 박영기(朴英起)와 함께 장단(長湍) 석벽(石壁)의 철쭉꽃을 구경하다.’가 된다.
대부분 석벽을 이성계 일파가 둘러 친 감금의 장벽으로 이해하고 본인을 석벽에서 꿋꿋하게 자라서 꽃을 피운 철쭉에 비유하여 지조와 절개를 표상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글쎄 반드시 정치적인 상황을 비평하고 풍자하여야 훌륭한 시라고 평가하는 일률적인 사고가 항상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냥 기이한 풍광과 아름다운 꽃을 보고서 느낀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본인에게 무슨 큰 흠이라도 되는 것인가? 최근에 워낙 정치적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미사여구를 많이 봐 와서 그런지 과거의 선조들의 작품도 너무 노골적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쓴 시는 오히려 거부감이 생긴다. 그렇다고 목은 이색이나 이 시가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는 끝까지 이성계의 조선에는 출사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서 못난 제자 정도전과 조준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분이다.
携中童與隣長朴英起(휴중동여린장박영기) 看躑躅長湍石壁(간척촉장단석벽) - 이색(李穡)
長湍石壁翠屛橫(장단석벽취병횡)。
躑躅花開錦綉明(척촉화개금수명)。
暫借商船順流下(잠차상선순류하)。
一時情景儘難名(일시정경진난명)。
장단 석벽에 가로로 쳐진 비취색 병풍
철쭉꽃이 만개하여 비단처럼 눈부시다
장삿배 잠시 빌려 물길 따라 내려가니
일시에 모든 정경 이름 붙이기도 어렵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