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인문학(人文學) 광장/漢詩(한시)

안록산의 난 (安史之亂)과 대 시인의 탄생

낙은재 2026. 9. 26. 09:28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인 서북 출신 이연(李淵)에 의하여 618년 건국된 당나라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정관의 치(貞觀之治, 626~649)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영토 확장 그리고 초기에 선정으로 세계 최대 문화와 경제 제국을 건설한 개원의 치(開元之治, 713~741)를 펼쳤던 당 현종(顯宗, 712~756)에 의하여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현종은 그의 치적에 도취되어 하늘(天)이 내린 신성한 보물(寶)을 얻었다는 도교적 정통성 확립과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자축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연호를 개원(開元)에서 천보(天寶)로 변경하면서 자만과 독선에 빠져 그만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중앙 정부보다 변방 군대가 더 강해진 구조 속에서 황제가 정치를 버리고 양귀비(楊貴妃)에 빠져버린 틈을 타 조정의 권력자인 양귀비의 4촌 양국충(楊國忠)과 변방의 군벌 이민족 출신 안록산(安祿山)이 생존을 걸고 충돌한 것이 바로 이 대규모 반란의 본질이다. 755년 범양(范陽, 현 북경)에서 기병한 안록산이 757년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부하 사사명(史思明)이 759년 안록산의 아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아 스스로 대연(大燕)의 황제라고 칭하였으나 그 또한 761년 아들에게 시해 당하고 만다. 그러나 그 아들 사조의(史朝義)도 763년 위구르 기병의 도움을 받은 당 군에게 패배하여 7년 2개월의 반란은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우리는 안록산의 난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안사의 난 즉 安史之乱(안사지란)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안사의 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중국 역사의 큰 흐름을 놓치게 되는 것은 물론 그 당시 참혹하였던 전란을 몸소 겪었던 대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왕유(王維) 같은 사람들의 심경을 헤아릴 수 없고 그러므로 그 아픔을 노래한 그 시들을 깊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안사의 난은 그냥 단순한 내란이 아니다. 서양의 어느 학자는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피해를 입힌 반란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 당시 통계적으로는 당나라의 인구가 5,300만 명에서 1,700만 명으로 줄어 들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는 전후 어수선한 환경에서 통계의 부정확에 기인한 것으로 실제로는 그보다 적은 숫자일 것이라는 것이 중국의 다수의 설이지만 그래도 최소 1,300만 명 이상은 죽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것은 단순한 정치적인 반란에 의한 전쟁 그 자체만이 아니다. 반란군 수괴들 사이에서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패륜(悖倫)이 연이어 발생하였는 데다가 심지어는 반군의 강남 침공을 막고자 길목인 수양성(睢陽城)에서 식량 없이 버티던 정부군은 지휘관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주도하에 장순의 애첩을 비롯한 많은 민간인들을 잡아 먹었다는 사실이 큰 충격을 주었다. 여하튼 그렇게 하여도 결국은 반군에게 성이 함락되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수양성에서 무려 2년이나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기에 시간을 벌어 결과적으로는 반군과 정부군 간의 전세 역전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서 성이 함락된 다음 반군에게 항복을 끝까지 거부하고 처형된 장순은 당나라를 지켜낸 애국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 반란에 의한 중국 역사의 변화는 매우 크다. 우선 이를 계기로 당나라는 권력의 중심이 지방 절도사들에게 이양되어 중앙 정부는 유명무실하게 이어져 오다가 결국 907년에 절도사 주전충(朱全忠)에 의하여 멸망하고 만다. 당나라가 엉망이 된 이유는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서북지역에 위치하던 그 당시 신성 국가인 위구르칸국이 구원군으로 왔으나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그들이 장안을 유린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구원병들의 일탈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들과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나라만 되찾아 주면 아녀자들은 마음대로 가져가도 된다는 기가 막히는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약속을 당 현종 다음에 황제에 오른 숙종(肅宗)이 장안을 빨리 되찾고 싶어서 감행하였고 그의 아들로서 그 다음 황제가 될 그 당시 광평왕(廣平王)이던 이숙(李俶)은 위구르 엽호(葉護, 관직명)와 의형제까지 맺으면서 매달린 것이다. 그러니 전후에도 이 치욕적인 조항은 문제가 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이 자치통감(資治通鑒) 220권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當時還是廣平王的李俶與葉護結拜為兄弟,肅宗急於收復長安,與回紇約定“克城之日,土地、士庶歸唐,金帛、子女皆歸回紇." 《資治通鑒》卷220.

당시 아직 광평왕이던 이숙은 엽호와 의형제를 맺었고, 숙종은 장안을 급히 수복하려 회흘(回紇, 위구르)과 "성을 함락하는 날에는 토지와 백성은 당으로, 금은보화와 자녀는 모두 회흘로 돌아간다”고 약속했다.

 

이러니 장안 수복 후 위구르 병사들에 의한 재물과 여자를 탈취하는 광란의 파티가 공공연하게 진행되어 장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헐!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못하면 아니 백성들이 정치인들을 감시나 견제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여 어떻게 된 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중국에서 인기 절정인 여배우 디리러바나 구리나자의 미모가 괜히 생긴 것이 아닌 것 같다. 그 당시 예쁜 여인들을 죄다 위구르로 끌고 갔다니 하는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눈치 빠른 재력가들은 일찌감치 상대적으로 안전한 그 당시 거의 불모지였던 강남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강남 인구를 늘린 그들이 농지를 개간하고 농법을 개량하여 그 결과 강남이 중국의 곡창으로 변하여 훗날 중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경제 대국 남송을 탄생시킨 원인이라고 하니 아이러니 하다. “강남 갔던 제비”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등의 강남(江南)은 모두 중국 양자강 이남을 말한다.  

 

잃은 것이 엄청 많지만 얻은 것도 강남 개발 만이 아니다. 바로 이런 가장 참혹한 전란을 몸소 겪었던 문인들 중에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3명이 탄생하게 된다. 위대한 시인들의 출현 그 자체는 전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전쟁의 참혹상을 묘사한 불후의 시들은 분명 안사의 난과 관련이 있다. 그들이 바로 두보와 이백 그리고 왕유이다. 전란 중에 당 현종의 16번째 아들인 영종을 도왔다가 나중에 반역으로 몰려 유배 갔다가 결국 전란 중에 사망한 이백(李白, 701~762)이 있고 전란 중에 반군에게 잡히고 막내 아들은 굶어 죽는 참상을 그야말로 몸으로 겪은 두보(杜甫, 712~770)가 있다. 혼란 중에 피난 가지 않고 장안에서 버티던 왕유(王維, 701~761)도 반군에게 잡혀 강제로 관직까지 맡게 되었으나 장안 수복 후 반군 협조자라는 굴레를 쓰게 된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껴 불교에 심취하고 그의 별장 망천(輞川)에 은거하여 대표적인 전원 자연주의 시인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