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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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懷古迹五首(영회고적오수) 제4수 – 杜甫(두보)

그럼 여기서 당나라 시대 사람들은 유비에 대하여는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어릴 때 삼국지를 처음 읽으면서 도대체 유비의 매력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상당히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누가 뭐라고 좋게 이야기를 해도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당나라 시대에는 촉을 위주로 쓴 소설 삼국지가 없던 시절이라서 과연 그들에게 유비는 어떤 인물로 평가 받는지가 궁금하다. 다른 시에서는 제갈량에 대하여는 엄청 높게 평가하는 두보(杜甫, 712~770)조차도 글쎄 유비에 대하여는 그저 제갈 승상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 부려 동오를 치러 가서 대세를 망쳐버린 답답한 황제로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유비를 주제로 한 詠懷古迹五首(영회고적오수) 제4수에서도 특별히 유비의 장점을 칭송하는..

詠懷古迹五首·其五(영회고적오수∙기오》 - 杜甫(두보)

영회고적오수(咏怀古迹五首)는 당대의 대시인 두보(杜甫, 712~770)가 당대종 대력 원년(766)에 기주(夔州) 즉 오늘날 중경 봉절에서 지은 연작시이다. 이 다섯 편의 칠언율시는 각각 유신(庾信) 송옥(宋玉) 왕소군(王昭君) 유비(劉備) 제갈량(諸葛亮) 등이 장강 삼협 일대에 남긴 유적을 읊으며, 다섯 역사 인물의 문학적 소양, 인품과 품덕, 위대한 업적과 공훈을 찬미한다. 영회고적오수(咏怀古迹五首)는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의 처량한 신세와 뜻을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해 두보가 깊은 동정을 표하는 한편, 자신의 벼슬길에서의 좌절과 방랑하는 신세에 대한 감회를 담아 자신의 이상과 감회, 그리고 비애를 드러낸 작품이다. 시 전체의 언어는 간결하면서도 기세가 풍부하고, 운치와 정취가 깊다. 이 시에서 보면 성..

八陣圖(팔진도) – 杜甫(두보)

八陣圖(팔진도) – 杜甫(두보) 功盖三分国(공개삼분국)名成八阵图(명성팔진도)江流石不转(강류석부전)遗恨失吞吴(유한실탐오)。 공은 삼분국 전체를 뒤덮었으며명성은 팔진도 만큼이나 높았네강물에도 석진 여전히 그대론데여한은 동오를 침공한 것이리라 팔진도(八陣圖)는 당대(唐代)의 대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오언절구(五言絶句)시이다. 이는 작가가 처음 기주(夔州)에 왔을 때 지은, 제갈량(諸葛亮)을 회상하며 시를 읊은 작품으로, 당 태종 대력 원년(766)에 쓰였다. 이 시의 앞 두 구는 제갈량의 큰 공적을 찬양하며, 특히 군사적 재능과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뒤의 두 구는 유비가 오를 치려다 군사를 잃고, 제갈량이 오와 연합해 조조에 맞서 중국을 통일하려던 원대한 계획을 무산시킨 것을 안타까워한다. 마..

蜀相(촉상) – 杜甫(두보)

물론 원말명초에 쓰여진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등장하기 전이라서 그렇다고 이해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송나라 소식(蘇軾, 1036~1101)의 적벽부(赤壁賦)에 촉의 존재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 수긍 안된다. 서진(西晉)의 역사가(233~297) 진수(陳壽, 233~297)가 쓴 정사 삼국지(三國志)에 분명 전출사표(前出師表)가 실려 있었으며 야사의 후출사표(後出師表)도 널리 알려졌을 터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정말 중국 문인들의 촉(蜀)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존재감이 없었나 하고 찾아보니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바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우리나라에서도 최고로 인정하는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성도의 제갈량의 무후사(武候祠)를 방문하고 쓴 蜀相(촉상)이라는 시가 ..

後出師表(후출사표) – 諸葛亮(제갈량)

[해 설] 这篇文章载于三国时期吴人张俨的《默记》,一般认为是诸葛亮的作品,当作于蜀汉建兴六年(228),比《前出师表》晚了一年。此时正值诸葛亮第一次北伐中原未取得预期成果之时。为消除各方阻碍,在第二次北伐临行之际,诸葛亮向后主刘禅献上了这篇《后出师表》。 이 글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엄(張儼, ?~266)의 문집인 묵기(默記)에 수록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제갈량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촉한 건흥 6년(서기 228년)에 작성된 것으로, 전출사표(前出师表)보다 1년 후이다.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첫 번째 북벌이 중원으로 향했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사방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후주 유선에게 두 번째 북벌을 앞두고 이 후출사표를 올렸다. 刘备临终前将刘禅托付给诸葛亮。诸葛亮加紧从政治、外交、经济、军事上全面进行北伐准备。在外..

出師表(출사표) - 諸葛亮(제갈량)

출사표(出師表)는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북상하여 위(魏)를 정벌하고 중원을 회복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후주 유선(劉禪)에게 올린 상서이다. 이 표문(表文)은 간절하면서도 완곡한 말로 후주가 언로(言路)를 넓히고 상벌을 엄정히 하며,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간신을 멀리하여 한실(漢室)을 일으켜 옛 도읍 낙양(洛陽)으로 돌아가게 하자고 권면하며 동시에 자신이 몸을 바쳐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일념의 뜻을 드러낸다. 문장은 논설이 중심이면서도 기록과 서정을 함께 사용하며, 화려한 수사에 의존하지도 않고 고대의 고사를 인용하지도 않으며, 대체로 사자성어로 글을 전개한다. 이 글은 중국 교육부 의무교육 국어 9학년 상권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한 장무 원년(221년)에 ..

念奴嬌·赤壁懷古(염노교·적벽회고) – 蘇軾(소식)

우리 조선조 후기 선비들이 가장 흠모했던 시인은 누가 뭐래도 소동파(蘇東坡)일 것이다. 문장과 글씨, 호방한 기상으로 특히 추사 김정희 등 조선 후기 선비들은 동파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열렬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조선 초·중기는 성리학적 명분론 아래에서 두보(杜甫)가 '공식적인 시의 성인(詩聖)'이었다면, 소식(蘇軾)은 선비들이 사적으로 가장 닮고 싶어 하고 열광했던 '멋과 풍류의 아이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赤壁賦(적벽부) 전후편 그리고 이 念奴嬌·赤壁懷古(염노교·적벽회고)를 처음으로 읽어보고 나서 적잖이 실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문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삼국지의 마니아로서 말이다. 이 세편의 작품 중에 제갈량(諸葛亮)과 유비 관우 장비는 단 한 마디도 없다. 다만 ..

菊花不開悵然有作(국화불개창연유작) - 서거정(徐居正)

조선 전기 대문장가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선생이 남긴 국화가 피지 않아 실망하여 짓는다는 뜻의 제목 菊花不開悵然有作(국화불개창연유작)을 붙인 칠언절구(七言絶句) 시이다. 여기서 東籬(동리)는 도연명의 유명한 시飮酒(음주) 20首 중 제5수의 구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며)에서 따온 것이다. 佳菊今年開較遲(가국금년개교지)一秋淸興謾東籬(일추청흥만동리)西風大是無情思(서풍대시무정사)不入黃花入鬢絲(불입황화입빈사) 예쁜 국화 금년에는 개화가 늦었구나가을 정취 동쪽 울타리에는 더디도다세찬 서쪽 바람은 무정하기도 하구나꽃은 물들이지 않고 살쩍만 물들였네 悵然(창연) 실망한 모양謾(만) 속이다, 느릿하다鬢(빈) 살쩍, 귀밑머리

湖州謝上表(호주사상표) – 蘇軾(소식)

소동파의 적벽부를 감상하자니 그를 적벽에 있는 황주로 가게 만든 사건이 떠오르고 그 사건이 그가 전 부임지 호주에서 부임하자말자 황제에게 올린 감사의 글이 빌미가 되었다고 하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아주 대단한 문학작품은 아니지만 중국 송나라 당시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은 어떤지 그리고 어떤 대목이 문제가 되었는지를 알아본다. 호주사상표(湖州謝上表)는 소식(蘇軾, 1037~1101)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겨우 몇 백 자밖에 되지 않는 사은표(謝恩表)가 북송 시대 조야를 뒤흔든 오대시안(烏臺詩案)을 직접 폭발시키며 그의 후반 인생의 궤적(軌跡)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원풍 2년(1079년) 4월, 소식은 서주에서 호주 지주(知州)로 전임되었는데, 북송 관계의 관행에 따라 그..

後赤壁賦(후적벽부) - 蘇軾(소식)

[해 설] 《后赤壁赋》是北宋文学家苏轼创作的文赋,收录于《苏东坡全集》,全篇共450字,为《赤壁赋》的姊妹篇,作于宋神宗元丰五年(1082)苏轼贬谪黄州(今湖北黄冈)期间 创作背景:元丰二年(1079)苏轼因“乌台诗案”遭诬贬为黄州团练副使。元丰五年他两次泛游赤壁,第二次携友同游后写下此文。 内容简介:该赋以孟冬登岸游赏为核心:开篇写主客踏月同行,得鱼后取藏酒再游赤壁;中途苏轼独自攀岩登顶,长啸后因环境凄清心生惧意返舟,夜半见孤鹤横江掠舟西去;结尾客散后梦道士,醒后寻觅不见踪迹。现存版本有“梦一道士”“梦二道士”之异,北宋乔仲常《后赤壁赋图卷》绘有二道士形象,南宋以降通行本多作“一道士”。 艺术特色:全篇多用白描手法,语言质朴意境壮阔;采用“藏韵”写法,散文化句式间暗藏押韵,韵字多附于虚字之后,诵读有铿锵节奏感,兼具散文流畅与韵文美感。 《后赤壁赋》与《赤壁赋》珠联璧合,是宋代文赋的..

赤壁賦(적벽부) – 蘇軾(소식)

[해 설] 《赤壁赋》又名《前赤壁赋》,是北宋文学家苏轼创作的文赋作品,收录于《苏东坡全集》. 内容简介:全文以苏轼与客月夜泛舟赤壁的经历为主线,从夜游赏景的闲适落笔,经饮酒作歌、洞箫和鸣引出问答,最终以客转悲为喜、众人尽兴而眠收尾。 创作背景:元丰二年(1079年)苏轼因被诬作诗“谤讪朝廷”引发“乌台诗案”,经多方营救才获释,被贬为黄州团练副使。元丰五年(1082年)他先后两次泛舟游黄州赤壁,写下两篇同题赋作,本篇为第一篇。 艺术特色:全赋实现情、景、理深度融合,以清风、明月、江水为核心意象贯穿始终,写景、抒情、议论自然交织,兼具诗情画意与哲思深度;采用“以文为赋”手法,既保留赋体声韵情致,又融入散文自由笔法,打破传统赋体骈偶、声律束缚,句式错落、用韵灵活,兼具诗歌韵律美与散文畅达感。 赤壁赋 历来受较高评价,被视为宋代文赋的标杆作品,对后世赋、散文创作影响深远,也是研究苏轼贬谪时..

蘭亭集序(난정집서) - 王羲之(왕희지)

[해설]兰亭集序 又名 兰亭序,是东晋书法家王羲之于晋穆帝永和九年(353年)创作的序体散文,是中国文学史上的经典名篇,其书法手稿也被后世推为行书艺术的巅峰代表。 蘭亭集序(난정집서)는 蘭亭序(난정서)라고도 하며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3~361)가 진(晉)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353년)에 창작한 서체(序体) 산문(散文)으로 중국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명작이다. 또한 그의 서법 원고는 후대에 행서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 받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内容简介:该作记叙永和九年兰亭修禊雅集的盛况,描绘山水美景,记述名士饮酒赋诗的游乐之乐;继而由乐生感,围绕生死问题展开议论。 내용 소개: 이 작품은 353년 난정(蘭亭)에서 수계아집(修禊雅集)이 열렸던 성대한 모습을 기록하고, 산수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 내며, 명사들이 술을..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의 실체 파악에 관한 결론(結論)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 – 王維(왕유)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客舍青青柳色新(객사청청유색신)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수인) 위성의 아침비 가볍게 먼지 적시고객사의 푸른 버들은 빛이 새롭구나그대에 권하노라 한잔 더 비우시게양관 서쪽 나가면 옛친구 없을터니 일명 위성곡(渭城曲)이라고도 불리는 위 왕유(王維)의 유명한 시에서 언급된 버들(柳)을 본고장 중국에서는 가볍게 그냥 일반적인 버들이거나 굳이 따지자면 수양버들(垂柳)이라고 인식한다. 그 이유는 버들이 이별의 상징이 된 것은 왕유 개인은 물론 몇몇 당(唐)나라 시인들 때문이 아니고 그 이전 시경(詩經)에서부터 언급되어 한(漢)나라 때 노래로까지 불리면서 형성 발전되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10), 물명고(物名考) - 유희(柳僖)

다산 정약용 선생보다 11년 늦은 시기에 태어난 유명한 실학자 유희(柳僖, 1773~1837) 선생이 1824년경에 펴낸 물명고(物名考)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자. 물명고에서는 여러 버들을 종류별로 설명하면서 위성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내용이 중국 본초강목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이름 위성류(渭城柳)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대신에 우리말로 당버들이라고 부른다고 한글로 기록하고 있다. 당버들은 중국에서 온 버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므로 타당한 이름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온 정류(檉柳)를 당버들이라고 한 것은 물명고뿐만은 아니다. 물명고(物名攷)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어휘서인 광재물보(廣才物譜)에서도 당버들이라고 했으며 비슷한 시기..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9),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정약용(丁若鏞)

이번에는 조선 후기의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대표적인 시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8권에 答李判書(時秀)라고 문신인 판서 이시수(李時秀, 1745 ~1821)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檉(정)에 관한 내용이 있다. 역시 다산은 실학자답게 정(檉)을 우리나라에서만 위성류(渭城柳) 또는 능수버들(菱殊柳)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왕유의 위성 버들이 정류(檉柳)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분명 본초강목에서 垂絲柳(수사류)라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다산(茶山)은 수양(垂楊)버들이라고 하지 않고 능수버들이라고 했다. 아마 그 당시로는 처지는 버들을 수양버들보다는 우리말 능수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8), 本草綱目(본초강목) 檉柳(정류)

사실 송시열보다 조금 앞 선 시기인 1552~1578년 중국 명나라에서는 위대한 본초학자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발간한다. 이시진(李時珍)은 여기서 정류(檉柳)를 신성스러운 특이한 나무로 묘사하고 있지만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 그 실체 파악에 큰 도움이 된다. 이후 조선 실학자들은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위성의 버들 즉 위성류가 이 나무라는 데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는지 별 다른 의견을 제지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고 만다. 아마 그 이유는 이시진의 설명 중에 수사류(垂絲柳)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초강목에는 친절하게도 발음이 偵(정)이라고 하며 赤檉(적정) 赤楊(적양) 垂絲柳(수사류) 人柳(인류) 三眠柳(삼면류) 觀音柳(관..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7), 與蘇望如(여소망여) – 송시열(宋時烈)

이번에는 시가 아닌 산문(散文)이다. 조선의 성리학의 신봉자 송시열(宋時烈, 1607~ 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8에 수록된 여소망여(與蘇望如) 즉 소망여라는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인데 노년인 1686년 7월에 쓴 것이라고 한다. 이 글을 살펴 보면 위성류는 그냥 가지가 처지는 버드나무로 인식하는 것 같다. 주자의 성리학은 일자 일획도 고치면 안 된다는 송시열도 그 실체가 모호한 중국에는 없는 실체가 애매한 용어인 위성류(渭城柳)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송시열이 위성류라고 묘사한 그 버들은 결코 진기하지 않은, 중국인들이 왕유의 시에서 등장하는 버들로 인식하는 그저 일반적인 처지는 버들을 말하는 것 같다. 與蘇望如(여소망여) – 송시열(宋時烈)소망여에게 부치다 近方築得小屋。..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6), 別後有懷(별후유회) - 홍성민(洪聖民)

위성류가 국내에 도입되어 약간씩 보급이 되었을 16세기에도 실제로 실물을 본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지 아니 실물을 봤더라도 위성류(渭城柳)가 곧 정류(檉柳)라는 인식은 변함이 없이 그대로 유지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홍성민(洪聖民, 1536 ~ 1594) 선생이 졸옹집(拙翁集)에 남긴 別後有懷(별후유회)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이 시에서도 渭城柳(위성류)는 딱히 버들과는 다른 특성을 가진 정류(檉柳)이라기보다는 왕유(王維) 시에 나온 이별의 상징인 관념적인 버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러니 이 버들이 수류(垂柳)이든 강희맹 선생이 새로 도입한 정류(檉柳)이든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別後有懷(별후유회) - 홍성민(洪聖民) 江上獨延佇 (강상독연저)柔腸一半銷 (유장일반소)遮來渭城柳 (..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5), 過昌和里(과창화리) - 성현(成俔)

그럼 왜 식물에 대한 지식이 깊었던 강희맹 선생은 정류(檉柳)를 보고서 위성류(渭城柳)라고 오해했을까? 그게 궁금하여 그 이전 국내에 정류(檉柳)라고 기록된 문헌을 찾아보니 신라말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에서부터 나타나 국내에 일찍부터 그 존재가 알려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국내에는 실물이 없으니까 정류(檉柳)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가지가 처진다는 특성 때문에 능수버들의 일종으로 추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사례가 바로 서거정(徐居正) 선생과 더불어 조선 초 양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음악학자이기도 한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 선생이 쓴 과창하리(過昌和里)라는 매우 긴 시의 처음 도입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창..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4), 私淑齋集(사숙재집) - 강희맹(姜希孟)

[위성류는 15세기 강희맹 선생이 최초 도입] 앞 게시글까지는 크게 오류라고 할 만한 내용이 없었는데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농학자인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 ~ 1483) 선생의 문집 사숙재집(私淑齋集) 12권 부록에 다음과 같은 의심스런 내용이 있어 드디어 결정적인 단서를 찾은 것 같다. 내용을 보아하니 양화소록으로 유명한 강희안(姜希顔, 1419~1464)의 동생이자 농학자로 유명한 강희맹(姜希孟) 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위성류라고 새로운 나무를 들여와 여기저기 분양하였다는 것인데 이게 아마 중국에서 정류(檉柳)라고 부르는 학명 Tamarix chinensis인 수종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최초로 위성류를 도입한 사람이 바로 15세기 강희맹 선생..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3), 送潭陽南府使季堂(송담양남부사계당) - 서거정(徐居正)

전 게시글에 이어서, 그러다가 드디어 정작 위성류(渭城柳)라는 말이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그게 바로 조선 전기 대문장가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선생이 남긴 대표적인 시문집 사가집(四佳集)에 수록된 送潭陽南府使季堂(송담양남부사계당)이라는 제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중 제2수이다. 여기서도 그저 왕유(王維)가 송별시에서 언급한 위성류를 끌어 와 인용한 것이므로 위성류의 실체를 특정한 것이 아니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送潭陽南府使季堂(송담양남부사계당) 2首 - 서거정(徐居正) 朱轓皀蓋綰銀章(주번조개관은장)多少親朋祖席張(다소친붕조석장)中酒自慙徐邈聖(중주자참서막성)吟詩聊和次公狂(임시료화차공광)渭城柳色傷心碧(위성류색상심벽)何遜梅花入夢香(하손매화입몽향)擬見湖南治第一(의견호남치제일)..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을 찾아서(2), 天壽寺門前(천수사문전) – 이규보(李奎報)

앞 게시글에 이어서 계속한다. 중국 왕유 시에 나오는 버들을 중국에서는 그냥 흔한 수양버들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엉뚱하게도 버들이 아닌 석죽목 위성류과 위성류속 위성류(渭城柳)라고 인식했는지에 대하여, 도대체 왜 그리고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우리 고문헌을 중심으로 탐구 파악해 본다. 그럼 먼저 우리 고문헌을 찾아보니 조선시대가 아니라 그 이전 고려시대부터 위성(渭城)이란 용어가 나타난다. 그게 바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다. 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후집(後集)에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선생의 天壽寺門前(천수사문전)이라는 시에 처음 나타난다. 당연히 이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이규보 선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문..

왕유 위성곡(渭城曲) 버들의 정체, 春夜洛城聞笛 (춘야락성문적) – 李白(이백)

왕유시 위성곡(渭城曲) 버들의 정체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 701~761)의 칠언절구(七言絶句)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라는 시는 그가 위성(渭城) 즉 함양(咸陽)에서 친구 원이(元二) 즉 원씨 집안(元家)의 둘째를 송별하면서 그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것이다. 그 시는 당나라 대표적인 송별시가 되어 노래로도 편곡되었는데 곡명이 별칭으로 그 장소를 따라서 위성곡(渭城曲) 또는 양관삼첩(陽関三叠)이라고 불렸다. 이 시의 첫 구절이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인데 위성(渭城)이 양관(陽関)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작가 왕유가 둘째 구절에서 客舍青青柳色新(객사청청유색신)이라고 하였는데 객사에서 봤다는 그 버들(柳)을 유독 우리 선조들은 위성곡(渭城曲)과 같은 맥락으로 위성류(渭城柳)..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 – 王維(왕유)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는 성당(盛唐) 시인 왕유(王維 내용 소개: 시 전체는 송별 장면을 주된 줄거리로 삼고 있다. 앞의 두 구절인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과 客舍青青柳色新(객사청청유색신)은 이별의 시간, 장소, 환경을 분명히 밝히며, 아침비와 푸른 버들로 산뜻하고 맑은 풍경을 이룬다. 뒤의 두 구절인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과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수인)는 이별의 술 권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직설적인 말 속에 친구의 먼 길에 대한 그리움과 소중함을 담아내어 말은 담백하지만 정은 깊다. 창작 배경: 이 시는 안사의 난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왕유가 벗인 원이가 안서 도호부로 부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을 배웅하며 지은 작품이다. 두 사람은 장안에서 위성의 객사까지 길을 따라 갔고, 마지막 이..

玫瑰(매괴) – 성현(成俔)

조선 초 대단한 문장가이자 음악학자인 용재(慵齋) 또는 허백당(虛白堂)이란 호를 쓴 성현(成俔, 1439∼1504) 선생이 쓴 매괴(玫瑰)라는 시이다. 이 오언율시(五言律詩)는 허백당집(虛白堂集)의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매괴란 오늘날 해당화(海棠花)를 말하는데 사실 원래 이름은 매괴였으나 고려말부터 해당화라고 잘못 쓰이기 시작하여 점차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선생이 그 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玫瑰(매괴) – 성현(成俔) 一朶玫瑰樹(일타매괴수)人傳是海棠(인전시해당)露華輕洗粉(노화경세분)風骨細通香(풍골세통향)始訝紅羅剪(시아홀라전)終成錦繖張(종성금사장)憐渠矜絶艶(연거긍절염)開近讀書床(개근독서상) 한 송이 피어나는 매괴나무의 꽃사람들이 이 걸 해당화라 말하네반짝 이슬로..

紅樹(홍수) – 성현(成俔)

조선 초 문신으로 문장가이자 음악가인 용재(慵齋) 또는 허백당(虛白堂)이란 호를 쓴 성현(成俔, 1439∼1504) 선생이 허백당집에 남긴 紅樹(홍수)라는 시이다. 그는 허백당집(虛白堂集) 외에도 수필 잡록집인 용재총화(慵齋叢話)도 저술하였고 악학궤범(樂學軌範) 편찬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紅樹(홍수) – 성현(成俔) 西山園裏攢靑楓(서산원리찬청풍)蔥蘢十里靑陰濃(총롱십리청음농)靑女一笑忽揮灑(청녀일소홀휘쇄)鉛華點葉酣秋容(연화점엽감추용)過客停車幾探翫(과객정거기탐완)彷彿火傘張高空(방불화산장고공)人牽官事停歌吹(인견관사정가취)人未得醉楓先醉(인미득취풍선취)安得置酒於其間(안득치주어기간)與楓同醉相傲戲(여풍동취상오희) 서산 정원에 단풍나무 빽빽이 모아 심어 단풍숲 우거진 십리에 푸른 그늘 짙더니 서리여신 한 번 웃으..

過故人庄(과고인장) – 孟浩然(맹호연)

과고인장(過故人庄)은 성당(盛唐)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이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로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당대(唐代) 전원시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내용 소개: 시의 네 구절이 손님으로 온 전 과정을 완전하게 기록하고 있다. 첫 구절은 친구들이 농가 음식을 준비해 두고 정성껏 손님들을 초대하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둘째 구절은 푸른 나무에 둘러싸인 마을과 성 밖을 가로지르는 푸른 산이 펼쳐진 들판 풍경을 그려내며, 셋째 구절은 창밖의 밭과 채소밭을 마주한 손님과 주인이 잔을 들고 농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담고, 마지막 구절은 이별의 약속으로 중양절에 다시 와 국화를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로 한 뜻을 전한다. 창작 배경: 이 시는 맹호연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던 시기에 지었다. 시..

送别(송별) – 王維(왕유)

송별(送别)은 당대 시인 왕유(王維, 701~761)가 지은 오언고시이다. 이는 벗의 은거를 배웅하는 시로, 문답 형식으로 벗의 입에서 은거의 이유를 듣는 방식을 통해 시인의 복잡한 사상과 감정을 드러낸다. 시인은 벗을 걱정하고 아끼며, 위로하는 동시에 은거 생활에 대한 부러움까지 드러내는데, 이는 시인 자신이 처한 현실에도 만족하지 못함을 보여 준다. 시 전체의 언어는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마지막 두 구절이 갑자기 시적 정취를 더해 주어, 말은 담백해도 정은 깊고 끝없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送别(송별) – 王維(왕유) 下馬飲君酒 (하마음군주)問君何所之 (문군하소지)君言不得意 (군언부득의)歸臥南山陲 (귀와남산수)但去莫復問 (단거막부문)白雲無盡時 (백운무진시) 말에서..

九月九日憶山東兄弟(구월구일억산동형제) - 王維(왕유)

구월구일억산동형제(九月九日憶山東兄弟)는 성당(盛唐) 시인 왕유(王維, 701~761)가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되어 있다. 핵심 주제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친족을 생각하는 것으로, 왕유가 열일곱 살 때 홀로 떠돌던 길에 마침 중양절(重陽節) 즉 음력 9월 9일을 맞아 친족을 그리워하며 지은 향수의 시이다. 내용 소개: 시 전체의 언어는 소박하고 직설적이며, 복잡하고 화려한 수사법을 쓰지 않았다. 중양가절(重陽佳節)을 창작 배경으로 삼아, 고향을 떠나 있는 이들의 향수와 친지들에 대한 진실한 정을 드러낸다. 시의 첫 구절은 타향에서 떠돌며 겪는 외로운 처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며, 명절에 부모를 그리워하는 보편적인 심정을 분명히 한다. 뒤의 두 구절은 서술 시점을 전환해 고향의 친지들..

使至塞上(사지새상) – 王維(왕유)

사지새상(使至塞上)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 701~761)가 지은 오언 변새시(邊塞詩)로,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되어 있다. 왕유가 변방으로 장병들을 위문하러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이다. 참고로 변새시란 중국 성당 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창작되어 하나의 문학적 영역으로 확립된 한시를 말한다. 주로 나라의 경계나 변방의 요새를 배경으로, 전쟁의 참혹함, 병사들의 고생과 외로움, 변방의 황량한 풍경 등을 노래한다. 내용 소개: 시의 여덟 구절로, 수련(首联)은 사신의 행로를 기록하고, 함련(颔联)은 정봉과 돌아오는 기러기를 빌려 자신을 비유하며 방랑하는 심정을 드러내며, 경련(颈联)의 “대막의 외로운 연기는 곧게 피어오르고(大漠孤烟直), 긴 강의 낙일은 둥글다(长河落日圆)”는 구절은 천고에 전해지며, 미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