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동(碧梧桐)
오동나무를 논하자면 벽오동을 빼놓을 수가 없다. 오동나무에 비하여 내한성이 좀 약하여 중부지방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원산지 중국에서는 이 벽오동을 오동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벽오동은 그 수피가 푸르면서도 아주 매끈하여 오동보다도 더 아름다우며 특히 오동나무를 기피하게 만드는 끈적끈적한 진액이 없기 때문에 관상용 정원수로 인기가 매우 높다. 게다가 동양에서 벽오동은 예로부터 전설상 상상의 동물인 봉황이 깃드는 나무라는 것 때문에 매우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 귀하게 대접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오동인봉황(梧桐引凤凰) 즉 오동이 봉황을 끌어 들인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재동인봉(栽桐引凤) 즉 벽오동을 심고 봉황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벽오동은 중국 원산인데다가 우리 보다는 아무래도 중국 정보에 관심이 많으므로 이 포스팅에서는 한자가 많이 동원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언급되는 오동은 거의 모두 중국 오동 즉 우리나라 벽오동을 말한다.
벽오동이 상서로운 나무로 취급받는 이유는 과거 동양 3국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던 중국의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詩經)의 대아 생민지십 권아(大雅·生民之什·卷阿)에 봉황명의(凤凰鸣矣) 우피고강(于彼高冈) 오동생의(梧桐生矣) 우피조양(于彼朝阳) 해설하자면 '봉황이 저 언덕 높은 곳에서 우는데 거기 양지녘에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 에서 유래가 된다. 그리고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장자가 양나라 재상인 벗 혜자를 만나서 나눈 유명한 대화 내용이 나온다.
南方有鸟,其名为鹓雏,子知之乎? (남방유조, 기명위원추, 자지지호?)
남쪽에 원추라는 새가 있는데 그대 아는가?
夫鹓雏发于南海,而飞于北海 (부원추발우남해, 이비우북해)
원추는 남해를 출발하여 북해까지 날아가는데
非梧桐不止 (비오동부지)
오동이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非练实不食 (비련실불식)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
非醴泉不饮。(비례천불음)
단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즉 자기 또는 군자(君子)를 원추(鹓雏) 즉 봉황에 비유하여 아무리 궁하여도 아무 것이나 함부로 탐하여 취하지 않는다는 지조와 절개를 말하고 있다.
봉황서오(凤凰栖梧)
봉황은 오동에만 깃든다.
친구인 혜자를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는 장자
시경에이어 장자에서까지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오동나무에만 깃든다고 하였으니 누가 이 나무를 함부로 여길 것인가. 게다가 전설상의 황제 복희(伏羲)가 오동나무에 봉황이 머물다 가는 것을 보고 오동나무로 금(琴)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여기서 오동은 벽오동을 말한다. 그 이후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부차가 왕궁에 오동원을 만들고 금천(琴川)이라고도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나라 때에 쓰여진 서경잡기(西京杂记)에 '한나라 황실 정원인 상림원(上林苑)에는 의동(椅桐), 오동(梧桐)과 형동(荆桐) 등 삼동(三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오동 즉 벽오동의 재배 역사는 매우 깊다. 그 이후 위진시대 즉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위나라와 사마씨의 왕조인 진(晉)나라에 와서는 오동이 널피 퍼져나가게 되어 황실 정원이 아닌 곳에서도 심었다는 글들이 보인다. 급기야 16국 시대의 진(秦)나라 왕 부견은 오동나무 수십만 그루를 심고 봉황을 기다렸다는 황당한 기록도 진서 부견재기(晋书·苻坚载记)에 나온다.
복희벌동창요금(伏羲伐桐创瑶琴)
복희가 오동을 베어서 요금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오동은 모두 봉황이 오기만을 기대하고 심었던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마는 않은 것 같다. 서기 500년대 북위시대에 편찬된 제민요술(齐民要术)에 오동을 화정연아(华净妍雅) 극위가애(极为可爱) 즉 '빛나고 맑고 아름답고 우아하여 극히 사랑스럽다.'라고 표현하면서 내년 봄에 심겠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나라 왕상진의 저서 군방보(群芳谱)에도 오동을 표현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람들이 오동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하여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오동은 봉황이 아니오더라도 심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피청여취(皮青如翠) 비취같은 수피에
엽결여화(叶缺如花) 잎의 결각이 꽃과 같고
연아화정(妍雅华净) 아름답고 우아하며
상심열목(赏心悦目)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인가재각다종지(人家斋阁多种之 민가나 재실에 많이 심는다.
벽오동의 비취같은 수피와 꽃같은 잎의 결각 모습
벽오동
그럼 왜 우리나라에서는 벽오동이라고 하였을까. 우리 독창적인 이름은 아니고 중국의 별명 벽오에서 온 것으로 판단된다. 벽(碧)이 원래 청록색의 옥돌을 의미하므로 오동의 수피가 청록색이므로 중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벽오(碧梧)라고도 불렀을 것 같다. 여기서 오(梧)는 오동나무 오자로 동(桐)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다만 중국 일부에서는 오는 수그루를 동은 암그루를 의미한다고 하여 오동에만 깃든다는 봉황(鳳皇)의 봉이 수컷이고 황이 암컷인 것과 비유되어 흥미롭다. 실제로 벽오동은 암꽃과 수꽃이 엄연히 다르지만 하나의 꽃차례에 달려 대부분 자웅동체이지만 자웅이주인 경우도 있는 잡성주이다.
자화와 웅화가 한 꽃차례에 섞여서 보인다.
붉은색이 암꽃이다.
왼쪽 화서에는 암꽃만 오른쪽 화서에는 수꽃만 보인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이미 중국의 포동(泡桐)을 오동이라고 하고 있었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벽오동을 원산지 이름인 오동으로는 부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택한 이름 청동(靑桐)은 오동의 수피가 푸르므로 중국에서 별명으로 더러 등장하지만 벽오(碧梧)는 고대 문서에서는 흔하게 보이지가 않는데 어디에 근거할까? 물론 그 이전에도 사용되었겠지만 찾아보니 원나라 오흥 사람 담소(郯韶)의 시(詩) 벽오취죽당(碧梧翠竹堂)에 거년종동수(去年种桐树) 녹엽고운량(绿叶高云凉) 즉 '작년에 오동을 심었더니 녹색잎이 구름높이 자라 시원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벽오(碧梧)라는 제목과는 달리 본문에서는 오동을 그냥 동수(桐树)로 표현한다. 중국에서 동(桐)은 오동(우리 벽오동)이나 포동(우리 오동나무) 등 어느 특정 수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동(桐)이 들어간 다양한 동을 두루 지칭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이해하여야 한다.
그 후 명나라 문학가 진계유(陈继儒)가 쓴 소창유기(小窗幽记)에 정원의 나무 배치를 언급한 대목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범정실(凡静室),전재벽오(前栽碧梧),후재취죽(后栽翠竹) 즉 '범정실 앞에는 벽오를 심고 뒤에는 대나무를 심는다.'는 내용이다. 그 뒤 청나라에 와서도 중국인들의 오동 즉 벽오(碧梧) 사랑은 줄지를 않는다. 강희제 시절 절강의 유명 문인 고사들이 가흥 평호 주변에 강촌초당(江村草堂)이라는 은거처를 마련하고 정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정원 일부에 오동을 심고 벽오혜(碧梧蹊)라고 불렀다고 한다. 혜(蹊)는 오솔길을 뜻한다. 결국 중국의 원나라 이후 명나라 청나라시대에는 벽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조선조의 기록에 벽오동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빠르면 고려말 아니면 조선초에 국내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미 그때는 중국 원나라나 명나라에서 벽오라고 흔히 부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벽오동의 녹색 수피
경기도 광주에서 노지월동하는 나무인데 유난히 추운 겨울이 와도 살아남을지는 의문시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문헌에도 벽오동이 도처에 나타난다. 판소리 열녀춘향가에 '봉황이 죽실(竹實)을 물고 오동속을 넘노는 듯'이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오동은 당연히 벽오동을 뜻하여야 하겠지만 워낙 오동과 포동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퇴계의 제자 학봉 김성일이 퇴계 사후 도산서원에 들러 스승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면서(感淚潸然:감루산연) 읊은 시에는 분명하게 벽오라고 명시되어 있다.
천인봉황하처거(千忍鳳皇何處去) 천인봉황은 어디에 가셨나요?
벽오청죽자년년(碧梧靑竹自年年) 벽오와 청죽은 해마다 자라는데.
퇴계를 봉황에 비유한 것인데 천인이라는 표현은 왜 썼을까? 높은 도덕심으로 일생을 참고 또 참으면서 고도의 인내심과 절제심의 모범을 보인 스승의 삶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도산서원 전경
글쎄 지금은 없는지 벽오동이 언듯 보이지는 않는다.
조선 중기에 벌써 봉황의 전설상에 등장하는 오동이 우리나라의 오동이 아닌 벽오동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보다 더 빠른 중중 때의 인물 황진이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가미상의 시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터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一片明月)만 빈 가지에 걸렸어라.' 그외에도 송강 정철이 귀양지에서 벽오동을 심고 봉황 즉 당시 임금이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면서 읊은 이런 시도 있다.
누외벽오수(樓外碧梧樹) 집 밖에 벽오를 심었으나
봉혜하불래(鳳兮何不來) 봉황은 아직 오지를 않고
무심일편월(無心一片月) 한조각의 달만 무심하게 뜨니
중야독배회(中夜獨徘徊) 한밤중에 혼자 배회하고 있다.
봉황도 19세기 작가미상
호암미술관 소장
벽오동이 항상 아름다운 또는 높은 기상을 가진 고결한 품격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전설상 오동은 암수 다른 나무이지만 동장동로(同长同老) 동생동사(同生同死)하고 줄기가 올곧고 뿌리가 깊으며 잎이 무성하여 충절과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풍취락엽(风吹落叶) 우적오동(雨滴梧桐) 처량경상(凄清景象)을 표현하며 고독과 우수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읊어진다. 천자문의 비파만취(枇杷晚翠) 오동조조(梧桐蚤凋)는 '비파는 늦가을까지 그 푸르름을 유지하며 오동은 일찍 낙엽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오동은 나무 중에서 가장 먼저 낙엽이 되는 수종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오동의 낙엽을 가을이 온다는 신호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동일엽락(梧桐一葉落) 천하진지추(天下尽知秋) '오동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온 천하가 가을이 왔음을 안다.' 이런 비슷한 문구가 한나라 회남자 설산훈(淮南子.说山训)에도 있다. 견일엽낙이 지세지장모(见一叶落而 知岁之将暮) '떨어지는 (오동)잎 하나로 한 해가 저물어감을 안다.' 라는 뜻이다. 오동이 나무 중에서 맨 먼저 입추 전후로 낙엽이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군방보에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당나라 자서어록(子西语录)에는 산승불해수갑자(山僧不解数甲子) 일엽락지천하추(一叶落知天下秋) '산승은 갑자풀이를 못하지만 (오동)잎 하나로 천하의 가을이 왔음은 안다.' 시계는 물론 달력도 흔하지 않던 과거에 특히 산중에서 자연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세월의 흐름을 파악하던 시절 이야기이다.
벽오동의 단풍이 가을이 오는 신호일지는 몰라도 단풍의 색상은 볼품이 없다.
그러다가 드디어 당나라 대표시인 백낙천이 등장한다. 그의 그 유명한 장편 서사시 장한가(长恨歌)에서 안록산의 난으로 양귀비를 잃어버린 당명황(당현종)이 난이 진압된 후에 궁으로 돌아와 허물어진 궁과 무엇보다도 양귀비가 떠난 자리의 허전함과 쓸쓸함을 가을비에 오동잎이 떨어지는 처량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복사꽃과 살구꽃이 화사하게 피는 봄날과 대비시켜 과거를 잊지못하는 당명황의 애절한 심경을 노래한 대목이다.
춘풍도리화개일(春风桃李花开日) 봄바람에 복사와 살구꽃이 피던 날
추우오동엽락시(秋雨梧桐叶落时) 가을비에 오동잎이 떨어지는 시절
낙엽지는 벽오동 아래에서 양귀비를 잃어버리고 처량한 모습이 된 당명황
이 이후로 오동잎은 가을의 쓸쓸함과 이별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다. 그래서 지금은 고인이 된 우리나라 가수 최헌이 1976년 발표하여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 오동잎의 가사도 아래와 같이 오동잎의 떨어짐으로 가을밤을 표상하고 있다. 안치행 작사이다.
오동잎 한잎두잎 떨어지는 가을밤에, 그 어디서 들려오나 귀뚜라미 우는 소리
고요하게 흐르는 밤의 적막을, 어이해서 너만은 싫다고 울어대나
그 마음 서러우면 가을바람 따라서, 너의 마음 멀리멀리 띄워보내 주려므나
등록명 : 벽오동(碧梧桐)
학 명 : Firmiana simplex (L.) W.F.Wight
이 명 : Firmiana platanifolia
분 류 : 아욱목 벽오동과 벽오동속 낙엽 교목
신분류 : 아욱목 아욱과 벽오동속 낙엽 교목(APG)
원산지 : 중국 중남부지역
중국명 : 오동(梧桐), 별명 - 벽오(碧梧)、청동(青桐) 등
일본명 : アオギリ(青桐)
영어명 : Chinese parasol tree, wutong, phoenix tree
수 고 : 16m
수 피 : 청록색, 평활
잎특징 : 심형, 장상3~5렬, 직경 15~30cm, 열편3각형, 정단점첨, 기부심형, 양면무모혹피단유모, 기생맥7조
잎자루 : 엽편과 같은 길이
꽃차례 : 원추화서 정생, 20~50cm, 하부분지12cm
꽃색상 : 단황록색
꽃받침 : 악5심렬기지기부(几至基部), 악편조형(条形), 향외권곡, 7~9mm, 외면피담황색단유모, 내면근재기부피유모
꽃자루 : 화기와 등장
웅 화 : 자웅예병과 악 등장, 하반부교조, 무모, 화약15개가 불규칙하게 자웅예병의 정단에 모임, 최화자방이형심소
자 화 : 자방원구형, 피모
향 기 : 약한 꽃향기
열 매 : 골돌과 막질, 유병, 성숙전 엽상으로 갈라짐, 6~11 x 1.5~2.5cm, 외면피단용모혹기무모
종 자 : 매골돌과 종자 2~4개, 원구형, 표면주름, 직경 7mm
개화기 : 6월
목 재 : 경연, 가구와 악기재로 양호
용 도 : 관상수, 종자 식용, 기름용, 줄기 잎 꽃 열매 약용, 수피 제지용
내한성 : 영하 17도
이 벽오동의 속명 Firmiana는 Padua botanic garden을 후원한 Karl Josef von Firmian (1716-1782)이라는 오스트리아제국의 롬바디 총독의 이름에서 왔으며 종소명 simplex는 잎이 복엽이 아닌 단엽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롬바디는 지금은 이태리에 속한다. 동양에서는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 벽오동은 185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기후조건이 적합한 미국 중, 남부지역에 널리 퍼져나가게 되는데 워낙 종자번식이 왕성하여 일부 주에서는 기존 식물들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에 위해식물로 지정 제거하기도 한다.
벽오동속은 과거 오랫동안 벽오동과로 분류되어 거의 모든 도감에서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에 APG시스템에서는 벽오동과(Sterculiaceae)에서 아욱과(Malvaceae)로 편입되었다. 그 이유는 과거 벽오동과는 4개 아과로 갈라져 아욱과로 편입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벽오동은 그 중 벽오동아과(Sterculioideae)로 분류된다. 즉 아욱목 아욱과 벽오동아과 벽오동속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공교롭게 최근에 오동나무와 벽오동이 모두 분류과가 변동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동과 벽오동의 과명 변경과 동양 3국의 명칭
학 명 | 우리나라명 | 기존 분류 | 신 분 류 | 중국명 | 일본명 |
Paulownia tomentosa | 참오동나무 | 현삼과 오동나무속 | 오동나무과 오동나무속 | 모포동(毛泡桐) | 동(桐) |
Firmiana simplex | 벽오동 | 벽오동과 벽오동속 | 아욱과 벽오동아과 벽오동속 | 오동(梧桐) | 청동(靑桐) |
벽오동
벽오동
벽오동
벽오동
꽃망울
벽오동
벽오동
벽오동
벽오동 수꽃
벽오동 암꽃
벽오동 암꽃
퇴화수술이 보인다.
벽오동
수꽃이나 암꽃 모두 시차를 두고 일시에 떨어져 버린다.
벽오동 열매
벽오동 열매가 벌어지기 전 모습
벽오동
열매가 성숙하기도 전에 잎모양으로 갈라진다.
벽오동
갈라진 열매에는 2~4개의 종자가 붙어있다.
벽오동
벽오동
끝까지 껍질에 종자가 붙어 있어 바람에 이리저리 날아간다.
벽오동
부안 내소사
벽오동 동아
벽오동
김제 금산사
특이하게 수피가 매끈하지 않다.
중국에서는 오동이 낙엽으로 가을이 왔음을 알리지만 신기하게 잎의 개수로 윤년도 안다는 민간 속설이 있다. 그래서 오동능"지윤", "지추"(梧桐能“知闰”, “知秋”) 즉 '오동은 윤년과 가을을 능히 안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즉 평년에는 하나의 가지에 잎이 양쪽으로 6개씩 모두 12개 달리지만 윤달이 있는 윤년에는 13개가 달린다고 한다. 공교롭게 윤년인 올해 8월 김제 금산사에서 촬영한 사진을 찾아보니 잎을 셀 수 있는 가지가 단 하나인데 정말 13개인 것 같아 흥미롭다. 여타 가지를 세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가운데 정면에 보이는 가지의 잎이 모두 13개인 것 같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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