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는 2016년 처음 탐구할 때까지만 하여도 Prunus armeniaca var. ansu Maxim.라고 중국의 행(杏)의 변종인 야행(野杏)의 학명으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Prunus armeniaca L.라고 1753년 스웨덴 식물학자인 린네(1707~1778)가 식물분류학을 창설하면서 명명한 원종의 학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 민가 주변에 심어져 있는 살구나무는 삼국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날 정도로 오랜 재배 역사를 가졌지만 국내서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우리 자생식물은 물론 귀화식물도 아니며 외래 재배식물로서 아주 먼 옛날 중국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자생하는 살구나무는 중국에서 행(杏)이라고 부르는 학명 Prunus armeniaca인 원종과는 잎 모양이 약간 다르고 꽃이 주로 하나가 아닌 두 송이씩 모여서 피며 색상도 담홍색으로 원종보다 더 진하며 열매는 근 구형으로 붉은 색이 짙으며 핵에 거친 그물 무늬가 있으며 예리한 능선을 가지는 등의 차이점이 있어 이를 변종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야행(野杏)이라고 부르는 이 변종은 1883년 러시아 식물학자인 Karl Maximovich(1827~1891)가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재배되던 것을 대상으로 Prunus armeniaca var. ansu라는 학명을 부여한 것이다. 변종명 ansu는 일본에서 살구를 이르는 말인 アンズ(안즈)에서 온 것인데 일본명 안즈(アンズ)는 살구나무의 열매 즉 살구를 뜻하는 중국 한자어 행자(杏子)를 중국 발음 그대로 따른 것이라는데 정작 중국 발음은 xìng‧zi(씽즈)에 가깝다. 러시아 학자가 중국에서 채집된 표본을 대상으로 명명한 것인데 엉뚱하게 일본명으로 변종명이 붙은 이유는 이를 중국에서 1879년에 발견하여 표본을 채집한 사람이 일본인 타카가키 요시이(Mrs. Yoshi Takagaki)이었기 때문이다. 상세한 자료가 거의 없지만 그녀는 남편인 타카가키(Mr. T. Takagaki)와 함께 그 당시 중국에서 다수의 식물을 채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의 국제식물분류학계의 통합바람에 의하여 이 var. ansu 변종도 원종에 통합하여 분류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우리나라도 그 추세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통합론에 따르지 않고 아직도 그대로 변종으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많은 것 같다.
유럽에는 살구나무가 알렉산더 대왕(356~323 BC) 시절에 이미 페르시아를 통하여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 후 12세기에 쓰여진 스페인의 농업지침서에 등장하고 영국에서도 치료용으로 살구기름을 사용한 17세기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17세기에 영국 이민자들에 의하여 미국에까지도 보급되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에서는 고대부터 재배하여 왔으며 말린 살구는 과거 페르시아 상인들의 중요 교역 품목이었으며 지금도 이란에서는 살구가 중요한 과일로 취급 받고 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살구는 한때 페르시아제국에 속하였던 아르메니아에서 온 것으로 아르메니아에는 금석병용시대 유적지에서 살구씨인 행핵(杏核)이 발견되었기에 서방에서는 아르메니아가 살구의 원산지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린네가 학명을 아르메니아를 뜻하는 종소명을 붙여서 Prunus armeniaca라고 명명한 것이다. 실제로 아르메니아에는 현재도 무려 50여 개의 다양한 품종의 살구나무를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페르시아정복 전쟁 후 같은 시기에 도입되었다고 추정하는 복숭아는 페르시아가 원산지인 줄로 알고서 린네가 Amygdalus persica라는 학명을 부여한 것과 대비된다. 서양에서는 살구를 영어로 apricot라고 부르는데 이는 praecocia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early ripening(peach) 즉 복숭아에 비하여 ‘일찍 익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살구의 수확기는 복숭아에 비하여 약 2개월 빠른 6~7월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살구나무는 저 멀리 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인 아르메니아 살구나무의 변종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중국에서 도입되었다고 알려진 것은 뭐라는 말인지가 궁금하다.
중국에는 기원전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장자(莊子)의 어부편(渔父篇)에 공자(孔子, 551~479 BC)가 강학할 때 본인은 행단(杏壇)에 앉아서 거문고를 타고 제자들은 독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때 이 행단(杏壇)을 은행(銀杏)나무 단(壇)으로 해석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우리나라 향교에는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러나 송나라 시절인 1024년 공자의 45대손이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庙)의 대성전 앞에 건물을 세워 행단이라는 간판을 걸고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었기에 이제는 행단(杏壇)의 행(杏)이 은행(銀杏)나무가 아닌 살구나무(杏)라는 주장에 강한 힘이 실려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중국 최초의 과학서로 알려진 전국시대(戰國時代)와 양한(兩漢)시대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한(西漢)의 예학자 대덕(戴德)이 편찬한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사역서인 하소정(夏小正)이라는 문헌에 “四月(4월), 囿有见杏(유유견행)”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즉 “4월에 동산의 살구나무를 둘러본다.”라는 뜻이므로 이를 중국에서는 살구나무의 재배의 근거로 보는 것이다. 그 외에도 선진시대(900 BC~206 BC)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에도 “灵山(영산), 其木多桃, 李, 梅, 杏(기목다 도, 리, 매, 행)” 즉 중국을 동서로 가로질러 남북으로 구분하는 진령(秦嶺)에 있다는 영산(靈山)에 복사나무와 자두나무 매실나무와 더불어 살구나무가 많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춘추시대 제나라 명재상 관중( ~645 BC)과 관련된 서책인 관자(管子)에 “五沃之土(오옥지토) 其木宜杏(기목의행)”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옥토(沃土)에는 마땅히 살구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참고로 우리가 양질 토양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옥토(沃土)는 이미 기원전 중국에서 관자(管子) 지원(地员)편에서 토질을 18등급으로 분류한 것 중에서 토질이 비옥한 상등 토양을 지칭한 말이며 곡식을 경작하는 1등 토양인 속토(粟土) 다음으로 우량한 2등 토양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속토(粟土)라는 말은 쓰지 않고 옥토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 살구를 단지 식용이나 약용을 위한 과일나무로 식재한 것 같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위에서 언급한 하소정(夏小正)의 四月,囿有见杏 이전에 正月,梅、杏、桃则华(정월 매 행 도즉화)라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정월의 내용을 보면 지역에 따른 시차가 있어서 그런지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여하튼 음력 정월에는 살구꽃을 보고 사월에는 열매를 보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확하게 꽃이 피는 순서대로 매화와 살구꽃 그리고 복사꽃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당송시대에 와서 수많은 문인들이 살구꽃을 감상하면서 노래한 시들이 쏟아진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살구의 원산지가 아르메니아라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중국으로서는 무척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그 옛날 아르메니아에서 도입된 살구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중국에 살구나무와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러시아 식물육종학자이자 유전학자인 Nikolai Vavilov(1887~1943)가 아르메니아 외에 중국도 살구나무 재배의 원산지임을 주장하게 되어 중국의 체면을 살리게 된다. 그러다가 1983년에 하남성 주마점(驻马店)시 양장(杨庄) 유적지에서 기원전 2070년에서 기원전 1600년 사이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하(夏)나라 시대의 살구씨인 행핵(杏核)이 발견되어 4천년 이상의 재배역사가 입증되어 러시아 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주장을 뒷받침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살구나무도 저 멀리 유럽과 경계선상에 있는 서아시아의 아르메니아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가까운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확실하게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한때 살구나무를 구라파살구나무라고 한 것은 이제 넌센스가 되고 마는 것인가? 우리 한반도에는 외래종인 살구나무 외에도 우리 자생종인 살구나무가 두 종이나 있다. 하나는 개살구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베리아살구나무인데 식용에는 다소 부적합한 종들이다. 그리고 우리 자생종은 아니지만 매실나무도 그 이름은 달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살구나무의 일종인데 이 또한 오래 전에 중국에서 도입된 외래 재배식물이다.
살구나무는 꽃을 보기 위하여 재배하는 경우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하여 재배하는 경우로 나뉠 수 있는데 중국의 경우 다음과 같이 용도에 따른 다양한 품종이 개발되어 있다.
식용 품종 : 생식이나 가공 식용 목적, 약 200종, 과일 대형 과육은 두텁고 즙이 많으며 단맛과 신맛이 적당하게 나며 열매의 색상이 아름다운 것이 특징.
인용 품종 : 종인(种仁) 약용 목적, 열매 작고 과육 빈약 행인(杏仁) 비대 행인의 맛은 달거나 쓴 품종
가공용 품종 : 과육이 두텁고 당분이 많으며 말리기 쉬운 품종
관상용 품종 : 겹꽃, 처진품종, 무늬종 등이 있으나 다양하지는 않음
위와 같이 살구나무는 현재 식용이나 약용으로 주로 재배하지 관상용으로의 재배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요즘 우리 주변에서 살구나무를 정원에 심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원산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그 옛날에는 봄꽃의 대명사 중 하나로 확고부동하게 자리잡고 있어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아래의 국민 애창 동요가 대변하고 있다.
고향의 봄 – 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경남 양산이 고향인 아동문학가 이원수(1912~1981)선생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쓴 시로서 이듬해 소파 방정환선생이 운영하던 잡지 ‘어린이’의 공모에 당선된 작품으로서 여기에 나중에 홍난파선생이 곡을 붙여서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로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이 시에서는 고향의 봄을 상징하는 꽃은 복숭아꽃과 살구꽃 그리고 진달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살구꽃에서 고향의 정취를 느낀 시인은 이원수선생 혼자만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경북 청도가 고향인 시조시인 이호우(1912~1970)선생의 살구꽃 핀 마을이라는 현대시조이다.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고향의 봄을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는 변함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복숭아와 살구꽃 대신에 십중팔구 벚꽃이나 목련 등을 언급할 것 같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사랑하였던 복사꽃 즉 도화(桃花)는 중간에 엉뚱한 풍수 미신과 관련되어 점차 민가의 정원에서 사라지다가 최근에 열매가 거의 열리지 않는 꽃복사나무로 재등장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라지만 살구나무는 왜 계속 사라지고만 있는지 궁금하다. 여기에는 아무래도 개화시기가 거의 동일한 최근에 확고부동하게 대세로 굳혀진 일본에서 도입되어 급속하게 보급된 벚나무의 위세에 눌린 것이 아닌가 한다. 살구나무는 매화보다는 늦게 복사나무보다는 빨리 그 중간쯤에 꽃이 피어 중국에서도 예로부터 중춘(仲春)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과거 우리나라도 많이 심어 그 옛날 수도였던 경주나 개경에 살구나무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 당연히 행화를 노래한 시가 없을 수가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일연(一然)스님은 삼국유사 신주(神呪) 부제 혜통항룡(惠通降龍)편에서 신라 고승 혜통(惠通)스님 관련된 일대기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찬(讚)한다.
山桃溪杏映籬斜(산도계행영리사)
一徑春深两岸花(일경춘심양안화)
頼淂郎君閑捕獺(뇌득랑군한포달)
盡教魔外逺亰華(진교마외원경화)
산의 복숭아와 계곡의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한 줄기 길에 봄 깊어 양 언덕에 꽃이 피었네
다행히도 혜통이 한가로이 수달을 잡은 덕분에
마귀와 외도(外道)를 교화해 경성에서 멀리보냈다.
고려시대에도 중기의 문신인 최유청(崔惟淸, 1093~1174)의 한시 행화(杏花)가 남아 있는데 언제 어디서 쓴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최유청이 워낙 고려에서 개경뿐만 아니라 북쪽 동북면과 지금의 서울인 양주 그리고 충청도 충주와 경상도 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관직을 수행한 데다가 중국 송나라와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바도 있어 실제 어디서 이런 살구꽃이 만발한 광경을 보고 흥에 겨워 이 시를 썼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지명의 언급이 없고 장자(莊子)를 거론한 점으로 봐서는 중국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남경유수사나 충주목사로 좌천된 시절 답답한 마음에 행화가 만발한 광경을 접하고서 호접몽(나비꿈)으로 들어가 잠시 위안을 삼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행화(杏花) – 최유청
平生最是戀風光(평생최시연풍광)
今日花前興欲狂(금일화전흥욕광)
願借漆園胡蝶夢(원차칠원호접몽)
繞枝攀蘂恣飛揚(요지반예자비양)
평생 풍광을 가장 그리워했는데
오늘 살구꽃을 대하니 가슴이 벅차구나
원컨대 장자의 꿈속 나비가 되어
가지와 꽃을 넘나들며 마음껏 날아 오르리
이러다가 조선조에 와서는 한양뿐만 아니라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집집마다 살구나무 한 그루 정도 심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수도 한양의 10만 호는 봄이 오면 살구꽃으로 뒤 덮였다고 조선 후기 문신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가 묘사한 아래와 같은 시가 있다.
대저왕성십만호(大抵王城十萬戶)
춘래도시행화촌(春來都是杏花村)
대체로 왕성은 십만 호 가까운데
봄이 오니 온통 살구꽃 천지로다.
한양에서도 특히 서촌(西村)인 인왕산 아래 필운대(弼雲臺)의 살구꽃이 유명하여 행촌(杏村)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여의도 벚꽃놀이와 비슷하게 그 당시로서는 필운대 (살구)꽃놀이를 필운상화(弼雲賞花)라고 하며 즐겼다. 그래서 필운행화(弼雲杏花)가 성북동의 북둔도화(北屯桃花)와 더불어 봄꽃놀이의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그 당시 한양의 풍류객들의 유상(遊賞) 명소로는 동대문 밖의 흥인문양류(興仁門楊柳)와 무악재 천연정(天然亭)의 연꽃(荷花) 그리고 삼청동과 세검정 탕춘대(蕩春臺) 등의 자연 풍광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필운대(弼雲臺)는 현재 종로구 필운동 지역인데 명나라 사신이 중종의 청에 의하여 인왕산에 붙인 이름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온 것으로 인왕산을 필운산이라고도 했다. 인왕산 자락에 살던 권율장군의 집에서 처가살이 하던 사위 이항복이 바위에 필운대(弼雲臺)라고 석각한 것이 지금도 배화여고 뒷쪽에 남아 있다. 북둔(北屯)은 조선시대 어영청의 북쪽 파견부대가 주둔하던 지역이라고 북둔이라고 했던 현재의 성북동을 말한다. 천연정(天然亭)은 돈의문(敦義門) 밖 서지(西池) 가에 세운 정자로서 시인 묵객들이 노닐던 곳으로 현재 서대문구 천연동 지역이다. 흥인문양류는 동대문 밖 청계천변의 수양버들 군락을 말한다.
여하튼 필운대의 살구꽃이 유명하여 여러 문인들이 다녀간 후 남긴 시들이 있는데 그 중에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한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필운대간행화를 소개한다. 연암은 필운대에서 가까운 아현동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살구꽃이 만개한 광경보다는 몰려든 상춘객들이 더 흥미로웠는지 그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필운대간행화(弼雲臺看杏花) - 박지원
斜陽焂斂魂(사양숙렴혼)
上明下幽靜(상명하유정)
花下千萬人(화하천만인)
衣鬚各自境(의수각자경)
지는 해 어슴푸레해지니
위는 밝으나 아래는 그윽하다.
꽃 아래 수많은 사람들
차림새가 제 각각일세
이렇듯 살구나무는 벚나무가 없던 시절 복사꽃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봄꽃으로 널리 보급되어 우리 조상들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인들의 시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가사(歌辭) 또는 가전체문학(假傳體文學) 심지어는 편수대엽(編數大葉) 등 가곡의 가사(歌詞)에도 빠질 수가 없어 많이 등장한다. 소설로는 조선초 생육신 중 한 명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쓴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芙蓉帳暖香如縷(부용장난향여루)
窓外霏霏紅杏雨(창외비비홍행우)
樓頭殘夢五更鐘(루두잔몽오경종)
百舌啼在辛夷塢(백설제재신이오)
따사한 연화문 휘장 사이로 은은한 향 흐르고
창밖에는 붉은 살구 꽃비가 내리고
새벽 종소리에 다락의 선잠에서 깨어나니
자목련 위에서 때까치 우짖네
조선 전기 문신인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의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라는 상춘곡(賞春曲)에 다음과 같이 행화가 도화와 더불어 봄꽃의 대명사로 나온다.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예 퓌여 잇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중(細雨中)에 프르도다.
그 후 조선 후기에 와서 과거 신라 대학자인 설총(薛聰, 650~740경)의 화왕계(花王戒)를 인용한 많은 화왕전이 등장한다. 설총의 화왕계에는 살구꽃은 등장하지 않으나 숙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16세 때 지었다는 화왕전(花王傳)에서는 살구꽃이 곡강후(曲江侯)로 등장한다. 여기서 곡강이란 살구꽃으로 유명한 중국 장안성 유원지인 곡강(曲江)을 말하므로 결코 나쁜 이미지는 아니다. 그리고 나중에 퇴계의 후손인 이이순(李頤淳, 1754~1832)이 쓴 가전체문학(假傳體文學)인 화왕전에는 살구꽃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1763년에 해동가요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가객(歌客) 김수장(金壽長, 1690~1770경)은 그의 시조 “모란은 화중왕이요.”에서 행화(杏花) 소인(小人)이라고 푸대접하고 있다. 이 시조는 편수대엽(編數大葉)이라는 형식의 음악 가사로 현재도 노래로 불리고 있어 살구꽃 입장에서는 체면을 많이 구기고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필운대 살구꽃놀이도 자주 갔다는 김수장이 정말 살구꽃을 멸시해서 소인이라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살구꽃이라는 배우가 소인이라는 역할에 캐스팅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장미가 설총의 화왕계에서 간신역을 담당하였다고 누구 하나 장미꽃을 무시하지 않듯이 말이다. 여하튼 김수장(金壽長)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모란(牧丹)은 화중왕(化中王)이요
향일화(向日化)는 충신(忠臣)이로다
연화(連花)는 군자(君子)요
행화(杏花) 소인(小人)이라
국화(菊花)는 은일사(隱逸士)요
매화(梅花) 한사(寒士)로다
박꽃은 노인(老人)이요
석죽화(石竹花)는 소년(少年)이라
규화(葵花) 무당(巫堂)이요
해당화(海棠花)는 창녀(倡女)로다
이 중(中)에 이화(梨花) 시객(時客)이요
홍도(紅桃) 벽도(碧桃) 삼색도(三色桃)는 풍류랑(風流郞)인가 하노라
현대에 와서도 살구꽃은 종종 유행가의 가사에 등장하는데 그 중 1983년 대스타 나훈아선생이 작사 작곡하고 직접 불러서 히트한 18세 순이의 가사이다.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 온다던
내 사랑 순이는 돌아올 줄 모르고
서쪽 하늘 문틈새로 새어드는 바람에
떨어지는 꽃냄새가 나를 울리네~~~
이제부터는 원산지 중국의 문인들이 읊은 시에 눈을 돌려보자. 우선 당나라 이전의 시인으로는 남북조시대의 문학을 집대성하였다고 알려진 북주(北周)의 대문호 유신(庾信, 513~581)이라는 시인이 쓴 행화시(杏花诗)를 들 수 있겠다. 유신은 남양 신야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수재라는 소리를 들은 천재로서 남조 양나라에서 북조의 서위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나라가 망하여 서위와 북주에 계속 잡혀서 벼슬하면서 고국이 그리워 사람은 본분을 망각하면 안된다는 뜻으로 그가 징조곡(徵调曲)에서 언급한 落其实者思其树(낙기실자사기수) 饮其流者怀其源(음기류자회기원)에서 그 유명한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행화시(杏花诗) – 유신
春色方盈野(춘색방영야)
枝枝绽翠英(지지탄취영)
依稀映村坞(의희영촌오)
烂熳开山城(난만개산성)
好折待宾客(호절대빈객)
全盘衬红琼(전반친홍경)
봄빛이 바야흐로 들판에 가득하고
가지마다 푸른 봉우리 터지네
어렴풋이 촌락을 비추면서
눈부시게 산성을 휘덮는다
귀한 손님 대접하게 꺾어서
금쟁반에 옥같이 담아 바치리
그 외 수많은 문인들의 행화를 대상으로 한 시가 있지만 그 유명한 행화촌(杏花村)이라는 말이 탄생한 만당(晩唐) 대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비내리는 청명(淸明)절에 살구꽃을 감상한 청명(淸明)이라는 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두목은 성당(盛唐)시대의 대시인이자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에 견주어 소두(小杜)라고 불리었으며 같은 시대의 유명한 시인인 이상은(李商隱, 812~858)과 더불어 소이두(小李杜)라고도 불렸다. 이는 시선(詩仙)으로 불렸던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를 대이두(大李杜)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하여 부르는 세칭(世稱)이다. 참고로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절은 절기 중 유일하게 중국에서 크게 쇠는 명절로서 중추절과 단오절과 마찬가지로 3일간 연휴이다. 그 기간에 소묘(扫墓)라고 조상의 묘소를 찾아 관리하고 교외로 나가 푸른 봄의 기운을 즐기며 산보하는 답청(踏青)도 하며 그네뛰기 등 놀이행사도 한다. 그래서 이 날을 답청절(踏青节)이나 제조절(祭祖节)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清明(청명) –두목
清明时节雨纷纷(청명시절우분분)
路上行人欲断魂(노상행인욕단혼)
借问酒家何处有(차문주가하처유)?
牧童遥指杏花村(목동요지행화촌)
청명절에 어지러이 비가 내리니
길을 떠난 나그네 심히 괴롭구나
어디 주막이 있느냐고 물으니
목동은 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중국의 청명절에는 불을 피우지 않아서 찬 음식을 먹게 되는데 이는 원래 한식절(寒食節)의 풍습인데 한식과 청명이 거의 같은 날이거나 하루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둘을 거의 같은 명절로 인식한다. 청명절이나 한식절은 음력에 의하여 날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태양의 황도(黃道)에 따라서 즉 정확하게 말하면 태양의 황경(黃經)이 15도가 되는 날로 정하기 때문에 매년 기후가 거의 비슷하다. 양력으로 대개 4월 5일쯤이 되는데 매년 이맘때쯤 살구꽃이 피며 봄비가 내리게 된다. 그래서 청명시절에 내리는 비를 특히 행화우(杏花雨)라고도 불렀다. 여기서는 바람에 꽃잎이 비처럼 떨어진다는 화우(花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행화가 피는 시절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대개 그쯤에 살구꽃이 만개하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넓어서 지역마다 많이 다르다. 중국에는 남송 학자 주휘(周煇, 1126~1198))라는 사람이 쓴 청파잡지(清波杂志)에서 24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风)이라며 24절기 중에서 소한(小寒)부터 곡우(穀雨)까지 양력으로 따지면 1월 5~6일부터 4월 20~21일까지 120일 동안 매 15일마다 바뀌는 8개 절기마다 꽃이 피는 순서대로 각각 3개의 꽃을 선정하여 모두 24개의 이름을 나열한 것이 있다. 여기에는 행화(杏花)는 우수(雨水)의 제2후로 선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수는 대개 2월 19일경이므로 청명에 비하면 무려 45일이나 빠르다. 주휘(周煇)라는 사람이 기후가 온난한 강남 절강성 출신이며 처음부터 강남(江南)을 기준으로 언급한 것이므로 중국의 24번화신풍은 우리나라 실정과는 다소 부합하지 않으므로 크게 참고할 것이 못 된다.
청명 한식절이 워낙 유명한 명절인데다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서 움츠렸던 겨울을 털고 야외로 봄나들이를 많이 가게 된다. 그래서 그 청명절을 대상으로 한 시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서 남송시절 지남(志南)이라는 승려가 쓴 7언절구가 가장 유명하여 지금도 중국인들은 청명 한식절에 많이 인용하는 것 같다. 여기서 봉(篷)은 돛은 없고 지붕이 있는 배를 말하며 沾衣는 霑衣(점의)의 간체자(简体字)로 가랑비에 옷 젖는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이 沾은 添(첨)의 간체자이기도 하므로 국내서 첨의로 잘못 읽는 경우도 더러 보인다. 양류풍(楊柳風)은 24번화신풍 중에서 청명제3후(淸明第三候)에 해당하는 화신풍(花信風)이다. 그쯤에서 버들의 새잎이 아름답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명절을 노래한 시에 수양버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절구(絶句) – 지남
古木陰中系短篷(고목음중계단봉)
杖藜扶我過橋東(장려부아과교동)
沾衣欲濕杏花雨(점의욕습행화우)
吹面不寒楊柳風(취면불한양류풍)
고목나무 아래 작은 거룻배 매어두고
청려장 짚고 다리 건너 동으로 나가니
살구꽃 봄비가 옷을 적시고 있지만
얼굴을 스치는 버들바람 시원하구나
한식절에 집집마다 불을 끄게 만들고 관아에서 새로운 불씨를 공급하였다는 풍습도 있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주나라 예법에 사계절마다 주기적으로 기존의 불은 끄고 새로운 불씨를 만들어 사용하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는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 태종 6년 즉 1406년 3월 24일에 예조에서 왕에게 아뢰는 상주 중에 다음과 같이 그 이유가 들어 있다. “불씨(火)를 오래 두고 변하게 하지 아니하면, 불꽃이 빛나고 거세게 이글거려 양기(陽氣)가 정도에 지나쳐서 여질(厲疾 : 역병)이 생기는 까닭으로, 때에 따라 바꾸어 변하게 한다. 그 변하게 하는 법은 찬수(鑽燧)하여 바꾸는 것인데, 느릅나무(楡) 버드나무(柳)는 푸르기 때문에 봄에 불을 취하고, 살구나무(杏)와 대추나무(棗)는 붉기 때문에 여름에 취(取)하고, 계하(季夏)에 이르러 토기(土氣)가 왕성하기 때문에 뽕나무(桑)와 산뽕나무(柘)의 황색(黃色) 나무에서 불을 취(取)하고, 작유(柞楢 : 참나무)는 희고 괴단(槐檀 : 회화나무와 박달나무)은 검기 때문에 가을과 겨울에 각각 그 철의 방위 색(方色)에 따라 불을 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왕인 태종이 그러지 않으면 화재가 날까 염려되므로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시행하라고 답하여 결국 개화령(改火令)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불씨를 변경하는 것은 중국에서만 행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시행된 제도였던 것이다.
가스라이터는 20세기 중반에 발명되었고 성냥도 19세기 초에 와서 영국에서 발명되어 우리나라는 1880년에 도입되었다고 하니 중국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부싯돌이나 나무 꼬챙이를 나무판에 비벼서 어렵게 불을 붙이던 시절이라서 집집마다 불씨를 계속 보관하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였다. 인간이 불을 발견하면서부터 그 불씨를 보관하기 위하여 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옛사람들은 같은 불을 계속 쓰면 여러 가지 역병에 걸리거나 화재가 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음양오행을 따져서 계절에 부합하는 각각의 소재로 불을 붙이려고 아래와 같이 계절마다 수종을 달리 정하고 그렇게 붙인 불씨를 황실에서 대신들에게 그리고 서민들에게 점차로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사시변국화(四时变国火)라고 하고 나무를 마찰시켜 발화시킨다고 찬수개화(鑽燧改火)라고도 하며 황실에서 불을 내린다고 사화(赐火)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다른 계절은 모르겠지만 청명절은 한식절과 겹치므로 이때는 불의 사용을 금하므로 개화(改火)의 원칙이 잘 시행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식절에 일제히 소화(消火)한 다음 봄철의 오행에 부합한다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붙인 불씨를 황실 인척과 근신들에게 새로이 공급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청명화(清明火)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음은 사계절별 취화목과 그 색상과 오행의 내역이다. 계하(季夏)는 늦여름인 음력 6월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살구꽃이 피는 청명절에 불을 새로이 바꾸며 다가오는 계절인 입하(立夏)에는 살구나무와 대추나무의 찬수(鑽燧) 즉 마찰로 새로운 불씨를 얻어 황실에서부터 사용하였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래저래 살구나무는 불과 관련이 많다.
春 - 榆柳(느릅 버들) - 青色 - 木德 - 木色青
夏 - 棗杏(대추 살구) - 赤色- 火德 - 火色赤
季夏 - 桑柘(뽕나무) - 黃色 - 土德 - 土色黃
秋 -柞楢(참나무) - 白色 - 金德 - 金色白
冬 - 槐檀(회화 박달) - 黑色 - 水德 - 水色黑
중국에서 주막을 뜻하는 행화촌(杏花村)과 강단(講壇)을 뜻하는 행단(杏壇) 그리고 봄비를 뜻하는 행화우(杏花雨) 등 살구나무와 관련된 용어 외에도 행림(杏林)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의술이 고명한 의원을 말한다. 이는 한나라 말기 삼국시대 오나라에 살던 동봉(董奉, 220~280)이라는 의원이 평소 진료비를 살구나무로 받아서 주변에 심어 급기야 10만 그루 이상의 거대한 살구나무 숲 즉 행림으로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 나무에서 수확한 살구를 곡식과 교환하여 빈민 수만 명을 구제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후 행림(杏林)이 의술이 뛰어난 의원을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행림시조(杏林始祖)로 불리는 그는 의술도 매우 뛰어나 그 당시 관운장을 치료한 것으로 유명한 초군의 화타(华佗)와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저술한 남양의 장중경(张仲景)과 더불어 건안3신의(建安三神医)로 불린다. 건안(建安)은 후한 헌제의 세 번째 연호이다. 그러니까 한나라 말기 삼국시대의 3대 신의 중 한 명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고 행림춘연(杏林春燕)이라는 말도 매우 많이 사용된다. 중국의 고서화나 도자기 등에 살구꽃과 제비가 묘사된 경우가 많은데 그럴 경우 제목을 거의 모두 행림춘연(杏林春燕)이라고 하며 버드나무가 추가되는 경우에는 도류사연(桃柳賜宴)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중국에서 당나라 때 살구꽃이 필 무렵 과거를 시행하였고 진사과 급제자들을 장안성에서 유원지로 유명한 곡강(曲江)에 있는 행원(杏园)에서 주로 황제가 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에 생겨난 용어이다. 그래서 당시(唐詩) 중에 곡강홍행(曲江红杏)이나 등제후한식행원유연(登第后寒食杏园有宴)이라는 제목의 시도 남아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행림(杏林)은 의원이라는 뜻은 아니고 말 그대로 살구나무 숲을 말한다. 연회의 宴(연)이 제비의 燕(연)과 발음이 같으므로 예술품에는 제비를 그리고 연회(宴會)의 의미로 새기며 청명절에 아름답게 나오는 수양버들의 늘어진 가지와 잎을 추가할 경우에는 도류(桃柳)라고 하며 황제가 베푸는 연회라고 사연(賜宴)이라고 하는 것이다. 복사꽃이 살구꽃보다는 약간 늦게 피지만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행화(杏花)를 중국에서는 별명으로 급제화(及第花)라고도 부르게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당나라 정곡(郑谷, 약851~910)이 쓴 시 곡강홍행(曲江红杏)의 女郎折得殷勤看(여랑절득은근간) 道是春风及第花(도시춘풍급제화)라는 구절에서 급제화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소녀가 붉은 살구꽃 가지를 꺾어 들고서 (기쁜 얼굴로) 은근히 바라보는데 이는 (낭군의) 급제 소식(春風)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급제자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관모 장식용으로 종이로 만든 어사화의 모델이 살구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글쎄 살구꽃이 급제화라고도 불리므로 취지는 공감이 가지만 실제 종이꽃의 모양으로만 봤을 때는 살구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여하튼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가객 김수장이 그의 시조에서 행화소인(杏花小人)이라고 한 것이 생뚱맞게만 들린다. 살구꽃은 부귀길상의 상징으로 급제화로도 불리며 어사화의 취지에 가장 어울리는 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살구꽃이 항상 이렇게 좋은 의미로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살구나무 즉 행(杏)을 풍류수(風流樹)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풍류란 멋스럽고 풍치가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색정적(色情的)이라는 뜻으로 결국 에로틱(erotic)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20세기 초반에 에로틱하다는 뜻으로도 쓰기 시작하여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도색(桃色)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행색(杏色)을 그런 색정적인 의미로 쓰지는 않고 단지 살구나무 즉 행수(杏樹)를 풍류수(风流树)라고 하며 홍행출장(红杏出墙) 즉 가지가 담장을 넘어가는 붉은 살구꽃을 유부녀가 외도를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쓴다. 이는 하루 아침에 누가 말한 것이 아니고 과거 당송시대부터 시인들이 노래한 시구를 후세인 명청시대에 와서 다소 부풀려서 해석하고 덧붙여서 그런 의미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만당 시인인 설능(薛能, 817~880)의 아래와 같은 행화(杏花)라는 시를 살구나무의 이미지를 처음 훼손한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活色生香第一流(활색생향제일류) 手中移得近青楼(수중이득근청루) 谁知艳性终相负(수지염성종상부) 乱向春风笑不休(난향춘풍소불휴)라는 시에서 살구꽃을 웃음을 파는 창기(娼妓)에 비유하였다는 것이다. 설능이 꽃놀이 나온 기생들이 살구꽃을 마구 꺾어 청루로 가져가자 금새 시들어 막 버리고서도 끊임없는 웃음으로 접대하는 모습을 보고서 곧 나이 들어 젊음이 사라질 청루녀 자기들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서 동정하여 읊은 시인데 이걸 살구꽃의 격하라고 할 수 있겠나 싶다.
그리고 송나라 시인 엽소옹(叶绍翁, 1194~1269)이 그다지 나쁜 의미로 쓴 것이 아닌 应怜屐齿印苍苔(응령극치인차태) 小扣柴扉久不开(소고시비구불개) 春色满园关不住(춘색만원관부주) 一枝红杏出墙来(일지홍행출장래)라는 유원불치(游园不值)라는 시가 있다. 유원지에 갔다가 봄을 맞아 새로 돋는 이끼나 새싹이 망가질까 봐 함부로 다니지도 못하고 문이 닫긴 정원도 있어 실망스럽다가 담장 넘어 온 가지에서 핀 붉은 살구꽃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읊은 것인데 나중에 여기서 홍행출장(红杏出墙)이라는 용어를 유부녀가 외도를 한다라는 뜻으로 쓴다. 그래서 심지어는 명말청초의 희곡작가 이어(李渔, 1610~1680)는 열매가 잘 열리지 않는 살구나무에 처녀 치마를 걸어두면 열매가 잘 맺힌다는 속설을 실제로 입증했다고 하면서 그의 저서 한정우기(闲情偶记)에서 “수성음자(树性淫者) 막과우행(莫过于杏)”이라고 “나무 중에서 음탕하기로는 살구나무 이상은 없다.”라고 단언하여 살구나무를 부귀길상이나 급제화 등 과거의 좋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나무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국에서는 이미 명나라 말기부터 이런 조짐이 보였는데도 우리 선조들은 여기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안 하다가 나중에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일본 영화평론가가 쓴 도색(桃色)이라는 용어는 쉽게 수용한 셈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살구나무를 당도(唐桃)라고 하므로 혹시 일본의 쓰무라히데오(津村秀夫)가 중국의 이런 살구나무 비하를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의 살구나무 비하는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점잖게 풍류수(風流樹)라고 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일본의 도색(ももいろ)은 보다 노골적으로 포르노에 가깝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이름 살구나무는 1937년 정태현 등의 조선식물향명집에 근거하며 그 외 북한에서 쓴다는 구라파살구나무나 회령백살구나무 외에는 다른 이명은 없다. 구라파살구나무는 아르메니아산 살구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함경북도 회령(會寧)지역에서 많이 재배한다는 백색 꽃이 피는 회령백살구나무는 이제보니 변종이 아니라 중국 원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원종이던 변종이던 중국에서 도입된 것이고 이제는 둘이 통합되었으므로 굳이 따질 이유도 없다. 우리 고문헌에는 모두 행(杏)으로 표기되지만 살고라는 한글 이름이 15세기 문헌에 나오고 19세기에 와서 살고가 살구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살구의 구가 개를 뜻하는 狗(구)와는 무관해 보인다. 그런데 살고가 무슨 의미인지 그 유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백인들이 피부색을 flesh color라고 하다가 인종 차별이라고 skin color 등으로 바꿔서 부르고 있듯이 우리도 살색이라고 하다가 이제는 살구색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살구의 살이 피부을 뜻하는 살과 무관하지 않아 보이기는 한다. 녹색일 때 따 먹으면 신맛이 나고 배탈이 나므로 살색으로 익었을 때 따 먹는 열매라는 뜻으로 불렀을 법하기 때문이다.
등록명 : 살구나무
학 명 : Prunus armeniaca L.
이 명 : Prunus armeniaca var. ansu Maxim.
분 류 : 장미과 벚나무속 낙엽 소교목, 교목
원산지 : 중국, 서아시아
중국명 : 행(杏), 야행(野杏)
일본명 : 안즈(杏子)
수 고 : 5~8(12)m
수 피 : 회갈색 종렬
다년지 : 천갈색, 피공 대, 횡생
일년지 : 천홍갈색, 광택, 무모, 다소 소피공
엽 편 : 관란형 원란형, 선단급첨 단점첨, 기부 설형, 관설형, 원형 근심형, 둔거치
잎크기 : 5~9 x 4~8cm
잎면모 : 양면 무모, 하면 맥액간 유모
잎자루 : 2~3.5cm, 무모, 기부 1~6선체
꽃특징 : 두 송이씩 또는 단생, 지름 2~3cm, 선엽개화
꽃자루 : 1~3mm, 단유모
꽃받침 : 자록색, 악통 원통형, 외면기부 단유모백색
악 편 : 난형 난상장원형, 선단급첨 원둔, 화후반절
꽃 잎 : 원형 도란형, 담홍색, 백색 대홍색, 단조(爪)
수 술 : 20~45, 꽃잎보다 약간 짧음
자 방 : 단유모
암술대 : 수술대비 약간 길거나 같음, 하부 유모
열 매 : 근구형, 구형, (희)도란형, 지름 2.5cm 이상, 백, 황, 황홍색 대홍훈, 미단유모
과 육 : 다즙, 성숙시 불개렬, 이핵
행 핵 : 난구형, 난형 타원형 양측편평, 정단원둔, 기부대칭 표면거침 망문, 복릉 예리 교원, 배릉교직, 복면 용골상 릉
종 인 : 쓰고 단 맛
개화기 : 3~4월
결실기 : 6~7월
염색체 : 2n=16
용 도 : 관상용, 약용(행인) 지해거담 정천윤장(定喘润肠) 효능
살구나무와 매실나무는 구분하기 힘든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원래 매실나무가 살구나무의 일종이므로 당연한 것이다. 이들의 구분점에 대하여는 다음에 매실나무를 탐구할 때 파악하기로 하고 우선 앞에서 다룬 자두나무와 복사나무 그리고 살구나무의 차이점을 파악해 보자. 자두나무는 꽃자루가 있고 꽃이 3송이씩 모여서 핀다는 점에서 꽃자루가 없고 꽃이 거의 하나씩 또는 두 송이가 모여서 피는 복사나 살구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므로 열매가 없더라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살구와 복숭아 즉 그 열매는 쉽게 구분이 된다. 그리고 복사나무는 잎이 길쭉하고 살구나무는 잎이 원형에 가까워 쉽게 구분이 된다. 그리고 동아의 모습도 다르다. 살구나무는 잎이 말려있지만 복사나무는 잎이 반으로 접힌 모습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가지의 색상이 살구나무는 연한 홍갈색이지만 복사나무는 녹색이라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살구나무와 복사나무를 그 꽃만으로는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꽃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한다. 저 위 중국에서 만든 우수의 화신풍이라는 행화의 경우 그 사진은 실제로 도화인 것으로 추정된다. 행화는 꽃의 개화가 진행되면서 꽃받침 조각이 뒤로 젖혀지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도화와 구분하여야 한다.
'장미과 벗나무속 > 자두아속살구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84 흰매실나무는 그냥 매실나무이므로 삭제되어야 마땅하다 (4) | 2023.03.08 |
---|---|
1783 매실나무(매화나무)와 관련 시(詩) (1) | 2022.08.06 |
1782 시베리아살구 = 빛 좋은 개살구인 우리 자생종 (0) | 2022.06.29 |
1781 개살구나무 - 나무는 크지만 열매는 작고 맛이 없다 (16) | 2022.06.26 |
1780 만첩살구 (0) | 2022.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