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장미과 벗나무속/자두아속살구조

1783 매실나무(매화나무)와 관련 시(詩)

낙은재 2022. 8. 6. 11:26

일본에서는 양력 1월 중순에 매화가 핀다. 진다이식물원

 

매실나무인가 매화나무인가?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매화(梅花)가 피고 매실(梅實)이 달리는 나무를 매실나무라고 한다. 그러니까 매화나무가 아닌 매실나무가 학명 Prunus mume (Siebold) Siebold & Zucc.인 장미과 벚나무속 낙엽 소교목인 이 수종의 우리나라 정식 명칭 즉 정명(正名)인 것이다. 식용 가능하고 약으로도 쓰는 매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야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열매인 매실이 달리는 나무이므로 매실나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할지는 몰라도 꽃나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매화 또는 매화나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정말 아쉽다. 매실나무라는 이름에서는 이른 봄 눈과 찬 서리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절개와 지조를 굳건하게 지키는 겸손하고도 고결한 선비의 정신은커녕 그윽하기로 유명한 매화의 암향(暗香)마저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몹쓸 이름이 있나! 장미과 벚나무속 살구나무조에 속하는 우리나라에 등록된 4개의 수종 중 마지막으로 매화를 탐구하려니 처음부터 못마땅하다. 그럼 북한 이름은 무엇이며 매화를 우리나라 못지 않게 사랑하는 이웃 중국이나 일본은 어떻게 부를까? 북한에서는 다행히도(?) 매실나무가 아닌 매화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모두 그냥 매(梅)라고 불러 논란의 여지가 없다. 중일에서는 매(梅)를 세부 품종으로 분류할 때는 중국에서는 과매(果梅)와 화매(花梅)로 일본에서는 실매(実梅)와 화매(花梅)로 구분하여 부른다. 사실 매(梅)라는 한자어에는 이미 나무(木)라는 뜻이 들어가 있어 매(梅)라고만 해도 충분한데도 굳이 xx나무라는 접미사를 붙이려고 하는 식물학계의 관행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옥매(玉梅)와 산옥매(山玉梅) 또는 백도(白桃)나 만첩홍도(萬疊紅桃) 그리고 명자꽃과 같이 그런 접미사가 없는 이름들도 많이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梅)도 원래는 1937년 정태현선생 등이 편찬한 조선식물향명집에 매화나무라고 되어 있었는데 1942년 정태현선생이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 매실나무라고 하였다고 이창복선생이 1980년 대한식물도감에서 매실나무라고 하였기에 이것이 정명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수종의 경우는 꽃과 열매의 중요성이 엇비슷하여 매화와 매실 어느 한쪽으로 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므로 정원수를 이를 때는 당연히 매화 또는 매화나무가 되어야 하지만 유실수를 지칭할 때는 매실나무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글의 조회수를 비교해보니 매실이 667만회이고 매화가 677만회로 조금 앞서기는 하지만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시인인 최두석교수께서 매화와 매실이라는 제목의 시를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 같은 심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매화와 매실 - 최두석

 

선암사 노스님께

꽃이 좋은지 열매가 좋은지 물으니

꽃은 열매를 맺으려 핀다지만

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고 한다

매실을 보며 매화의 향내를 맡고

매화를 보며 매실의 신맛을 느낀다고 한다.

 

꽃구경 온 객도 웃으며 말한다

매실을 어릴 적에는 약으로 알고

자라서는 술로 알았으나

봄을 부르는 매화 향내를 맡고부터는

봄에는 매화나무라고 부르고

여름에는 매실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매(梅)의 용도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식용으로 열매로 매실청(梅實淸)이나 매실주(梅實酒)를 담거나 과육을 소금에 절여 매실장아찌(鹽渍梅)로 만들거나 매실식초(梅酢)를 만든다. 나아가 중국과 일본에서는 매실장(梅醤)도 만들고 그냥 건조시켜서 반찬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일본에서는 매실을 반찬으로 많이 활용한다. 다음은 약용인데 우리나라 동의보감에는 씨를 뺀 과육을 불에 그을린 것을 오매(烏梅)라 하고 소금에 절이거나 그냥 말린 것을 백매(白梅)라 하며 약으로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열매뿐만 아니라 잎과 꽃 줄기 및 뿌리까지도 약으로 쓴다. 마지막은 관상용인데 이는 당연히 꽃인 매화를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관상용으로는 매화(梅花)가 되고 식용은 매실(梅實)이 되며 약용으로는 매실과 매화 둘 다에 해당된다. 따라서 식용 하나만 보고 매(梅)를 매실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유실수로 재배하는 매실농장에서나 적합한 이름이라는 말이다. 이른 봄이면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하고파 저 멀리 남도로 매화여행을 떠나면 분명 축제의 이름은 매화축제이며 마을도 별칭으로 xx매화마을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가장 매화가 많이 피는 장소는 매실농원이라고 하는 이유는 거기는 본래 관상용 매화가 아닌 식용매실을 재배하는 농장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서는 남도 매화축제에서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다소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중국 문인들이 심취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 매력에 푹 빠진 매화는 결코 그런 과수원용 식용 매실나무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제대로된 관상용 꽃매화나무가 심어진 매화원(梅花園)이나 매림(梅林)이 드물어 과수원인 매실농장(梅實農場)에 가서 꽃놀이를 하고 있는 셈인데 이걸 매화의 진면목인 것으로 착각해서 실망하면 안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원예가인 유박(柳璞, 1730~1787)선생은 그의 저서 화암수록(花庵隨錄)에 고표일운(高標逸韻) 즉 고상한 자태와 은일한 운치를 매화의 최고의 품격이라고 하면서 가지가 비스듬히 성기고 야위며 기이하고 예스럽게 뻗은 것이 최고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매화나무는 붉은 겹꽃보다는 흰 외겹 꽃에 녹색 꽃받침이 제격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다지 인기가 높지 않는 백색 홑겹 꽃에다가 흔하지 않은 녹색 꽃받침을 가진 품종이 최고라고 하는 그 높은 수준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꽃을 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꽃이던 진한 색상의 겹꽃이 매우 풍성하게 피는 것을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나중에 연륜이 쌓이면 연한 단색 홑겹 꽃의 진가를 알아보게 된다. 바로 그런 수준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유박선생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법하다. 죽단화보다는 황매화를 겹삼잎국화보다는 삼잎국화를 만첩산철쭉보다는 철쭉을 더 아끼게 되어야 원예가의 경지에 들어선다는 말이다.

 

광양 매화마을은 매실농장이 기본이다.
오사카 도명사 꽃매화
유박선생은 핑크 겹꽃보다는 백색 외겹 꽃에 녹색 꽃받침이 있는 품종을 선호했다.
가지를 비스듬히 뻗어 조선조 선비들이 품격이 있다고 했을 법한 녹악 백매화
삼잎국화인데 왼쪽 겹꽃인 변종보다는 오른쪽 홑꽃인 원종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군자(四君子)로서의 매화

매실농장에 가서 매화축제를 하기 때문인지 요즘에 와서야 개인적인 기호에 의하여 매화꽃이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우리 옛 선조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매화꽃에 대하여 감히 그다지 감흥이 없다고 용감하게 말할 선비들은 드물었다. 매화는 비록 우리 자생종이 아니고 그 옛날 중국에서 도입된 외래 수종이지만 이미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인 서기 24년에 특이하게도 8월에 매화꽃이 피었다고 마치 천재(天災)인 것처럼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八月(팔월) 梅花發(매화발)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의 재배 기간이 매우 길다. 그러나 조선조 선비들이 매화를 애호하는 정도를 지나서 거의 숭상하게 된 이유는 매화 그 자체의 매력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존경하였던 중국의 성인이나 문인들이 무척 사랑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들이 그토록 동경하였던 군자(君子)라고 불리었기 때문인 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매화는 특히 문인들이 즐겨 그렸던 수묵화의 화제(畵題)에서는 대나무(竹)와 난초(蘭) 그리고 국화(菊)와 더불어 4군자(四君子)로 한중일 3국에서 널리 불린다. 여기서 군자(君子)란 원래는 제후국의 통치자인 국군(國君)이나 주군(主君)의 지위를 계승할 적자(嫡子)를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이들 왕가의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이상(理想)과 인격(人格)을 규범적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일반인들의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군자(君子)가 점차 도덕적인 인품을 갖춘 학문 수양이 매우 높은 이상적인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공자가 논어에서 무려 100차례 이상 군자(君子)를 언급하면서 이상적인 인격의 표준으로 비유함으로써 군왕지자(君王之子)라는 원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말로 굳어지게 된다. 참고로 공자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사(士)나 인자(仁者) 현자(賢者) 대인(大人) 또는 성인(成人)이나 성인(聖人) 등 다양하게 지칭하였지만 군자(君子)라는 말을 가장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럼 수묵화의 묘사 대상이나 제목으로 등장하는 식물을 4군자(四君子)라고 부르는 것은 어떻게 생긴 말일까? 이 용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고 중국의 명나라 때 황봉지(黄凤池)라는 사람이 천계(天启)년간 즉 1621~1627에 편집한 집아재화보(集雅斋画谱)에 수록된 매죽란국4보(梅竹兰菊四谱) 즉 매화와 대나무 난초 그리고 국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에다가 동시대 문인이자 화가인 진계유(陈继儒, 1558~1639)가 4군(四君)이라고 제명(題名)을 붙인 것에서 출발한다. 이후 사람들이 이들 매죽란국 4종의 식물을 사군자(四君子)라고 통칭하게 되었고 이 용어가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널리 사용된 것이다. 과거 당송 시대부터 시와 그림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던 이들 4종의 식물을 묶어서 4군자라고 한 것은 이들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을 각각 상징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그 특징과 기품이 군자를 닮았기 때문이다. 매화는 이른 봄 눈 속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강인함이 있고 난초는 은은한 향과 기품을 갖추고 있으며 대나무는 사시사철 그 푸르름을 유지하는 데다가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자라는 올곧은 성질이 있으며 국화는 늦가을 서리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선명하게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게다가 4군자는 현실적으로는 각각 4계절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림의 소재인 데다가 처음 초목 그림을 배울 때 다양한 화법을 연습하기에 매우 적합하여 마치 서예에서 영자팔법(永字八法)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짧은 시기에 중국 각지는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널리 전파되어 한자어를 거의 쓰지 않는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아직까지 많이 불리게 된다. 참고로 문인화(文人畵)에서 사군자(四君子)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송나라 때부터 한의학계에서는 사군자탕(四君子汤)이라고 인삼(人参) 백출(白术) 복령(茯苓) 감초(甘草)를 배합한 처방명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승정원일기 등 고문헌에 등장하는 4군자(四君子)는 거의 대부분 이 탕약(湯藥)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군자라고 불리는 식물은 매란국죽만 있는 것은 아니고 약으로 쓰는 또 다른 4종의 식물이 있다는 것이다.  

 

4군자

 

이와 같이 사군자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명나라 때인 17세기 초부터 쓰이기 시작한 문인들의 그림의 제목 즉 화제(畵題)에 관한 용어이므로 16세기 우리나라 대유학자인 퇴계 선생이 매화와 대나무를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운명할 당시 마지막 유언이 매형(梅兄)에게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고 퇴계선생이 매화가 사군자의 일종이기 때문에 매화를 사랑하고 인격을 부여한 것이라고 풀이한다면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그 당시는 딱히 그런 용어가 없었기에 퇴계선생은 사군자라는 말을 들어 본 바가 없다. 그럼 어떻게 퇴계선생 등 임진왜란 이전 조선전기나 고려시대 우리 문인들이 매화나 대나무 또는 난초 등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비록 이들을 묶어서 사군자라고 부른 것은 명나라 말기부터이지만 이미 그 훨씬 전인 당나라 시절부터 문인(文人)들의 수묵화(水墨畫) 주제로 많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수묵화에 등장한 것은 대나무 즉 묵죽도(墨竹圖)로서 당나라 말기라고 한다. 그 다음 정사초(鄭思肖, 1241~1318)의 묵란도(墨蘭圖) 등에서 난초가 남송시대에 등장하고 원대(元代) 왕면(王冕, 1310~1359)의 묵매도(墨梅圖) 등에서 매화가 남송말기부터 원나라 사이에 등장하였으며 국화 즉 묵국(墨菊)은 가장 늦은 명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그만큼 이들 식물들은 딱히 사군자라고 불리기 전부터 이미 시나 그림의 소재로 선호할 만한 특성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우리 조선조 선비들의 매화 사랑은 단지 수묵화의 소재였기 때문만은 절대 아니다. 매란국죽 중 특히 매란죽은 사군자로 불리기 훨씬 전부터 그리고 수묵화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전부터 이미 중국에서는 군자라는 호칭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군자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난초로서 공자가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芝蘭生於深林(지란생어심림) 不以無人而不芳(불이무인이불방) 君子修道立德(군자수도입덕) 不謂窮困而改節(불위궁곤이개절)이라고 즉 “깊은 숲속 난초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향기를 멈추지 않듯이 군자가 수련함에 있어서 궁곤을 이유로 변절하지 않는다.”라를 뜻으로 난초를 곤궁한 가운데서도 절개를 지키는 군자에 비유하면서부터이다. 다음 대나무는 시경(詩經) 위풍기오(衛風-淇奧)에서 瞻彼淇奧(첨피기오) 綠竹猗猗(녹죽의의) 有匪君子(유비군자)라고 대나무를 군자의 인품에 비유한 것을 근거로 곧 군자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그 이후 매화는 남조 시인인 하손(何遜, ?~518)이 영조매(咏早梅)라는 시에서 兎園標物序(토원표물서) 驚時最是梅(경시최시매) 銜霜當路發(함상당로발) 映雪擬寒開(영설의한개)라고 이른 봄에 서리와 눈 속에서 핀 매화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 이후 군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국화는 일찍이 육조시대 위대한 전원시인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너무나 사랑하여 음주(飮酒)라는 시에서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 즉 “동쪽 울타리 국화를 따서”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즉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 등의 많은 국화 관련 시를 남겼는데 후세 사람들이 자연에 은거한 도연명의 군자적 인품을 흠모하면서 국화가 은일군자(隱逸君子)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군자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는 않았더라도 이들은 이미 나름대로 각각 군자로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들을 중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퇴계 이황선생도 도산서원에 화단을 조성하여 매화, 소나무 그리고 대나무와 국화를 심고서 절개와 의리가 있는 벗이라는 뜻으로 절우사(節友社)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여기서 소나무는 매화와 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퇴계가 단양군수시절 만난 관기 두향(杜香)때문에 평생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작은 계기는 되었을지언정 근본적인 원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도산서원 정원인 절우사의 매화

 

사군자로 불리는 식물 4종 중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이들을 부르는 순서는 나라마다 약간씩 다르다. 우선 우리나라에서는 매란국죽(梅蘭菊竹)으로 순서가 거의 굳어져 있으며 이들이 상징하는 계절의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순서이므로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매화는 봄의 상징이고 여름에는 난초 가을에는 국화 겨울은 대나무라는 것인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해석과는 약간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매화는 늦겨울에 피는 꽃으로 봄에는 난초가 피고 늘 푸른 대나무는 여름의 상징으로 보고 가을 서리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국화를 가을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중부지방에 비하여 훨씬 온난한 중국 남방이나 일본의 관동이서 지방의 기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중국 24번화신풍에는 매화는 소한1후(小寒一候)로 되어 있는데 소한은 양력 1월 5일경을 말하므로 한겨울이 분명하다. 일본 동경만 하여도 양력 1월에 매화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남쪽지방이라고 하여도 2월말에서 3월초에나 매화가 피므로 봄이라고 해야 타당하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에서는 매화를 겨울의 상징으로 보니 난초는 여름이 아닌 봄의 상징으로 되고 마땅한 것이 없는 여름의 상징으로 늘 푸른 대나무를 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사군자를 춘하추동의 순서대로 난죽국매(蘭竹菊梅)로 부르는데 다소 생소하게 들리기는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매화를 맨 앞으로 올려서 매난죽국(梅兰竹菊)으로 주로 부른다. 이렇게 되면 동춘하추(冬春夏秋)의 상징 순서대로 되는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한 뚜렷한 설명은 없지만 매화가 한 때 중국의 국화로 지정된 바도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에 특별히 사군자의 으뜸으로 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 일각에서도 군자라는 호칭을 받은 순서는 난죽매국(兰竹梅菊) 순서이며 수묵화의 소재로 사용된 것은 죽매란국(竹梅兰菊) 순서인데 왜 매란죽국(梅兰竹菊)인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따라서 결국 사군자의 나열 순서는 그 식물의 품격이나 선호도와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으므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매화는 그 꽃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눈과 얼음을 깨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아무리 뜯어봐도 매화(梅花)가 도화(桃花)나 행화(杏花)에 비하여 특별히 뛰어나게 아름다운 점을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사람들의 겨울과 봄의 의미는 난방 덕분에 실내에서는 추운줄도 모르고 사는 현대인들의 느낌과는 천지차이이므로 우리는 그들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절대 헤아릴 수가 없다. 저장시설이 변변하지 못하여 먹거리도 부족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면서 엄동설한의 겨울을 움츠리고 근근히 버티다가 따뜻하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매화가 피는 것을 어느 누가 반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봄꽃나무 중에서 도화나 행화에는 없는 남다른 향기도 있지만 매화가 특별히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하여도 눈서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늦겨울 또는 이른봄에 꽃을 피워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매화는 “강한 추위 속에 백화 중 가장 먼저 꽃을 피워 홀로 봄을 맞이한다.”라고 묘사한다. 그래서 매화를 길경(吉慶)의 상징이라며 특히 5개의 꽃잎이 복(福) 록(禄) 수(寿) 희(禧) 재(财) 또는 쾌락(快乐)과 행복(幸福) 장수(长寿) 및 순리(顺利)와 화평(和平)의 상징이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매화의 싹이 틀 때와 꽃이 필 때 그리고 열매가 맺힐 때와 열매가 성숙할 때를 각각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풀이하여 4덕(四德)을 갖춘 길상지물(吉祥之物)이라고 역술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만물이 소생(蘇生) 즉 죽었다가 되살아난다는 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매화이기에 온갖 미사려구를 동원하여 칭송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매화를 探波傲雪(탐파오설) 剪雪裁冰(전설재빙) 一身傲骨(일신오골) 是为高洁志士(시위고결지사) 즉 오기로 똘똘 뭉쳐 눈과 어름을 뚫고서 피어난다고 성품이 고상하고 순결하며 절개가 굳은 뜻있는 선비에 비유하여 사군자로 칭송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매화가 傲霜斗雪(오상투설) 凌寒独开(능한독개) 清雅俊逸(청아준일) 有百花魁之称(유백화괴지칭) 즉 눈과 서리를 무릅쓰고 추위 속에서 홀로 피어 청아하고 빼어난 자태와 향을 뽐내므로 백화 중 으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세한삼우(歲寒三友)의 일원인 매화

게다가 매화는 소나무 대나무와 더불어 추운 겨울을 함께하는 세 벗이라는 뜻에서 세한삼우(歲寒三友)로도 불린다. 세한삼우라는 용어는 남송말기 애국시인인 임경희(林景熙, 1242~1310)가 왕운매사기(王云梅舍记)에서 即其居累土为山(즉기거루토위산) 种梅百本(종매백본) 与乔松修篁为岁寒友(여교송수황위세한우) 즉 “거처에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매화 백 그루와 큰 소나무 그리고 큰 대나무를 심어 겨울의 친구로 삼았다.”라고 기록한 이후 후세인들이 이들을 세한삼우(歲寒三友)라고 칭한 것이다. 임경희라는 사람은 남송말기 시인으로서 남송이 망한 후 이민족인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들어서자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다가 원나라 승려가 보물을 취하려고 송황제릉을 파헤치자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의 유골을 수습하고 숨어 산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마치 단종의 장사를 치를 조선조 엄흥도(嚴興道)가 연상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한삼우는 단순하게 내한성이 강하여 월동을 잘하는 식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원나라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견정불굴(堅貞不屈)의 애국 선비정신을 뜻한다. 매화는 이렇듯 6~7세기 남조시대부터 군자로 불리다가 14세기 남송말기부터 세한삼우의 하나로 불리게 되었으며 17세기 명대에 와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남송말기 애국시인 임경희와 세한삼우도

 

신해혁명과 공산혁명 이념에 부합하는 매화

그래서 그런지 현대에 와서도 중국인들의 매화사랑은 식지 않는다. 아직 정식 국화가 없는 중국의 국화지정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면 화중지괴(花中之魁)로 불리는 매화는 항상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고 불리는 모란과 경쟁이 심하다. 당나라를 비롯하여 청나라시대까지 모란을 최고의 꽃나무라고 인정하여왔던 중국은 사실상 모란을 국화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 말기 실제로 국화로 지정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1929년 모란이 아닌 매화를 국화로 지정하게 된다. 모란과 매화의 국화 지정 논쟁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꽃 그 자체만을 봤을 때는 복사꽃이나 살구꽃 그리고 벚꽃에 비하여 그다지 특출하지도 못한 매화가 어떻게 다양한 색상에 향기까지 갖춘 크고 화려한 꽃인 모란에 비할 것이냐 싶지만 모란에는 그 줄기가 강인하지 못하다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화가 불의에 굽하지 않는 견정불굴(堅貞不屈)의 기개를 표상하고 입지분발(立志奋发)을 격려(激励)하는 의미가 있기에 혁명을 추진하는 입장에서는 더 없이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공산혁명을 추진한 모택동(毛澤東) 역시 공산혁명 취지에 부합하였기 때문인지 매화를 무척 사랑하고 卜算子·咏梅(복산자 영매)라는 시를 쓴 바도 있었지만 공산정권에서도 공식적인 국화로는 지정되지 않고 있다가 모택동의 사후에 매화의 국화 후보 지위는 폐지되고 만다. 아마 이에는 1964년 대만에서 공식적으로 매화를 국화로 지정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 중국은 국화가 없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데다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꽃들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를 지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차례 시도를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1961년 12월 모택동(毛泽东, 1893~1976)이 쓴 복산자 영매(卜算子-咏梅)라는 작품이다. 1949년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던 그가 1960년 6월 루마니아에서 열린 공산당국제회의에서 소련과 논쟁후 갈라서 수많은 협정이 파기된 여파로 경제발전에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어 3년간 고생하게 된다. 그 어려운 시기에 1961년 12월 광주 전국 공산당회의를 앞두고 답답한 마음에 남송 시인 육유(陆游, 1125~1210)가 쓴 복산자 영매라는 동명 시사(詩詞)를 읊다가 매화와 같은 위무불굴(威武不屈)의 정신과 공산혁명 특유의 낙관주의(乐观主义) 정신으로 역경을 타파하고 싶은 심정을 잘 나타낸 노래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듯 매화는 원래 개혁과 저항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복산자 영매(卜算子-咏梅) – 모택동

 

风雨送春归(풍우송춘귀)

飞雪迎春到(비설영춘도)

已是悬崖百丈冰(이시현애백장빙)

犹有花枝俏(유유화지초)

 

俏也不争春(초야부쟁춘)

只把春来报(지파춘래보)

待到山花烂漫时(대도산화란만시)

她在丛中笑(저재총중소)

 

비바람 속에서 떠났던 지난 봄을

휘날리는 눈 속에서 새로 맞이하네

아직 절벽엔 얼음이 길게 달려있지만

가지 끝에 의연하게 아름답게 피었네

 

봄꽃들과 다투려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단지 봄 소식 알려주려는 것뿐이네

온 산에 꽃들이 만발할 때를 기다리며

매화는 꽃무리 속에서 웃고만 있네

 

1990년대 중반 중국화훼협회에서 모란을 단독 국화로 지정하고 봄의 난과 여름의 연꽃 그리고 가을의 국화(菊花)와 겨울의 매화를 사계절 보조 국화(國花)로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무산된 바 있고 2007년에는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원사 공동 발의로 모란과 매화 두 종을 같이 국화로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이 또한 양회(兩會)를 통과하지 못하였다. 매화와 모란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의 크기가 너무 팽팽하기 때문이다. 매화는 1985년 중국 인민들의 투표로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10대 꽃 중에 첫 번째로 뽑혔지만 혁명 세대들이 거의 모두 사망하여서 혁명의 기운이 사라져서 그런지 2019년 7월 중국화훼협회에서 36만여 명이 참가한 투표에서는 모란이 80%를 얻어 겨우 12% 득표한 매화를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란은 줄기가 유약하여 불상정발(不上挺拔) 즉 굳세고도 우뚝서는 힘찬 기운이 없다고 쉽게 국화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모란 하나의 국화지정과 모란과 매화 연꽃 국화 4개의 지정 두 안이 후보로서 고려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참고로 우리나라의 무궁화나 일본의 국화(菊花)와 사쿠라(벚나무)도 공식적으로 지정한 국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국화가 없는 나라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매화와 중국 문화

중국에서는 이미 3천년 전부터 매실을 재배한 기록이 남아 있다며 그 근거로 상(商, 1600 BC~1046 BC)나라 문서인 서경(書經) 열명(说命)편에 나오는 若作和羹(약작화갱) 이유염매(爾惟鹽梅)를 든다. “만약 간을 맞춘 국인 화갱을 만들 때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화갱(和羹)은 대갱(大羹)과 갱(羹)과 더불어 중국 고대 북방의 3종류 국(羹) 중 하나로 조미료로 간을 맞춘 육류나 생선국을 말한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 통일 이전인 중국 선진시대에는 소금(盐)과 신맛을 내는 매실(梅) 및 술(酒) 그리고 단맛을 내는 이당(饴糖)과 매운맛의 화초(花椒) 즉 산초(山椒)가 요리용 5대 조미료이었다고 한다. 문헌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1975년에 하남성 안양시(安阳市)에 있는 상(商)나라 유적지인 은허(殷墟)에서 3200년 전 구리솥에서 매실핵(梅實核)이 발견되어 중국의 오랜 매실 재배 역사를 입증하고 있다. 곧이어 춘추시대(770 BC~403 BC) 문헌인 시경(詩經)에 山有嘉卉(산유가훼) 候栗候梅 (후률후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아름다운 초목이라는 뜻의 嘉卉(가훼)로 표현한 점을 봐서는 매화를 단순히 열매를 수확하기 위한 과일나무로만 보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한(漢, 202 BC~220 AD)나라 때 편찬된 서경잡기(西京杂记)에 기원전 1세기 한무제가 증축한 상림원(上林苑) 여러 지방에서 군신들이 바친 수목 중에 유주매(有朱梅)와 연지매(姻脂梅)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이 시기에 꽃도 좋고 열매도 좋은 품종을 재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386~589) 송나라 무제의 딸 수양공주(寿阳公主)의 전설이 등장한다. 어느날 궁궐 정원에서 놀다가 잠시 누워서 쉬는 중에 매화 꽃잎이 수양공주의 이마에 떨어져 붙었는데 보기가 좋아서 이후 여러 궁녀들이 따라서 이마에 꽃잎 무늬를 붙이는 화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매화장(梅花妆)이라고 하며 현재도 중국 사극에서 여배우들이 가끔 이 화장을 하고 나온다. 그래서 훗날 중국 민간에서는 수양공주를 정월 매화의 화신(花神)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중국에는 100종의 중요 꽃마다 화신(花神)이 정해져 있고 12달 월별 화신이 따로 있는데 백화신(百花神)에서 매화선자(梅花仙子)는 수양공주이며 12월화신(十二月花神)에서 매화는 정월화신 수양공주라고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정월이나 이월화신으로 임포(林逋, 967~1028)를 꼽기도 한다. 임포는 북송의 유명한 은일시인으로서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매화와 학을 사랑하여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녀로 삼았다고 매처학자(梅妻鹤子)라는 별칭을 얻은 자이다.  

 

매화여신인 수양공주와 이마에 매화장을 한 판빙빙
목은 이색과 퇴계 이황이 동경하였던 북송 은일시인인 매처학자 임포

 

당(唐, 618~907)나라에 와서는 두보나 백거이 두목 이상은 등 수많은 유명 시인들이 매화를 대상으로 노래하게 되는데 현군으로 이름난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599~649)의 天太原召侍臣赐宴守岁(천태원소시신사연수세)라는 이름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送寒余雪尽(송한여설진) 迎岁早梅新(영세조매신) 즉 “추위가 물러가니 잔설도 녹아내린다. 새해를 맞이하여 매화가 새롭게 핀다.”라는 뜻이다. 매화가 정초에 눈을 뚫고 피어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송(宋, 960~1279)나라에 와서는 매화가 독보적으로 백화의 으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매화와 관련된 역대 가장 많은 시와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급기야는 일생 매화와 더불어 살면서 매화를 아내라고 부르던 북송의 은일시인(隱逸詩人)인 임포(林逋, 967~1028)같은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 절강성 항주(杭州) 서호부근 고산(孤山)에 은거하던 그는 산원소매(山園小梅) 이수(二首)라는 시 중에 疎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즉 “성긴 그림자 맑고 얕은 물에 비스듬히 드리우고 그윽한 향기 달뜨는 황혼에 퍼지네”라고 써 疎影(소영)과 暗香(암향)이라는 명구를 남긴다. 그리고 暗香浮動(암향부동)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긴다. 훗날 우리나라 퇴계 이황선생은 바로 북송 임포의 풍류적인 은둔생활을 본받고자 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래서 퇴계가 매화를 유난히 사랑하였는지 모른다.

 

다음은 북송(960~1127) 정치가이자 문학가인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매화(梅花)라는 시이다. 단순하게 이른 봄 맨 먼저 피는 매화의 강인함과 그윽한 향기를 노래한 것 같지만 그 배경을 보면 이 시는 왕안석이 부자들의 장롱을 털어서 빈민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개혁적인 부국강병책이 좌절되어 재상에서 두번 째 물러난 후 그 답답한 심정을 매화에 빗대어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매화(梅花) – 왕안석

 

牆角數枝梅(장각수지매)

凌寒獨自開(능한독자개)

遙知不是雪(요지부시설)

爲有暗香來(위유암향래)

담 모퉁이의 매화 몇 송이

추위를 무릅쓰고 홀로 피었네.

멀리서 봐도 눈은 아니구나

은은한 향기가 풍겨오니까.

 

다음은 남송(1127~1279) 저명한 매화 시인인 육유(陆游, 1125~1210)가 쓴 복산자 영매(卜算子·咏梅)라는 작품인데 이런 형식은 시(詩)라 하지 않고 사(詞)라고 한다. 당나라 중엽에 생겨 송대에 번성하였던 문학형식으로 주로 노래로 불리기에 가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육우는 북송시절 태어나 남송에서 자랐는데 진사시험에서 장원을 하였으나 그 당시 간신인 승상 진회(秦桧)의 손자보다 앞섰다고 이듬해 파면되었다. 육유가 여진족에 빼앗긴 북쪽 실지의 수복을 주장하는 파라서 투항파의 수뇌인 진회의 미움을 산 것도 원인이었다. 그 후 진회가 죽은 다음에야 관직에 나갔으나 실지수복을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매번 현실 안주를 원하는 신료들에 의하여 좌절되고 두 번이나 파직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무수한 시를 남겨 중국에서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시인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매화에 관련된 시는 무려 159수나 남겨 중국 최다이며 우리나라에서 매화시를 가장 많이 남긴 퇴계의 107수보다 많다. 아래의 복산자 영매(卜算子·咏梅) 라는 시를 보면 아무도 그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아서 금(金, 1115~1234)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지 못한 안타까움과 외로움을 토로하면서도 그의 실지수복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겠다는 기개가 보인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대표적인 애국시인으로 불린다. 이 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먼 훗날 모택동이 같은 이름으로 재창작하여 더욱 유명해진다.  

 

복산자 영매(卜算子·咏梅) 육유

 

驿外断桥边(역외단교변)

寂寞开无主(적막개무주)

已是黄昏独自愁(이시황혼독자수)

更著风和雨(갱착풍화우)

 

无意苦争春(무의고쟁춘)

一任群芳妒(일임군방투)

零落成泥碾作尘(영락성니연작진)

只有香如故(지유향여고)

 

역참 밖 끊어진 다리 곁에

보는 이 없이 쓸쓸히 피었네

홀로 황혼에 이미 서글픈 데

비바람마저 들이치는구나

 

애써 봄꽃들과 다툴 맘 없고

뭇꽃의 시샘도 내버려두리라

떨어져 짓밟혀 흙먼지가 되더라도

향기만은 그대로 남으리라

 

육유와 동시대 사람인 남송의 정치가이자 문학자인 범성대(范成大, 1126~1193)가 1186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범촌매보(范村梅谱)에는 12종의 매화를 수집하여 번식과 재배하는 법을 기술하고 있어 세계 최초의 매화재배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 중에 외겹인 강매형(江梅型) 겹꽃인 관분형(官粉型、자홍색인 주사형(朱砂型) 외에 백색 겹꽃인 옥접형(玉碟型) 꽃받침이 녹색인 녹악형(绿萼型) 및 살구와 교잡종인 단행형(单杏型)과 황향형(黄香型) 그리고 개화가 빠른 조매형(旱梅型) 등도 수록되어 있어 이미 그 당시에 상당한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조선시대 매화 애호가들도 이 서책을 구하여 필독하고 있었음을 양화소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조선조 매화를 애호한 선비들은 최소한 매화에 관하여는 현대의 지식층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음이 분명해 보인다. 평소 과거의 우리 선비들이 식물에 너무 무관심하여 그저 사서삼경 등에 나오는 식물에만 조금 관심을 보일 뿐 실제 식물 재배에는 아예 문외한(門外漢)인 줄로만 알았는데 매화의 탐구에 와서 보니 전혀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매화를 지극히 사랑한 사람으로서 송나라 시대에 임포가 있었다면 원(元, 1271~1368)나라시대에는 왕면(王冕, 1310~1359)이 있다. 그는 절강성 소흥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독학으로 원말의 저명한 시인이자 화가가 되었다. 그는 권세를 능멸하고 비난하며 공명과 록(祿)을 경시하고 백성들의 고난을 동정하거나 전원에서의 은둔생활을 묘사한 작품이 많다.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집주변에 매화 1천 그루를 심어 매화옥주(梅花屋主)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묵매(墨梅)를 즐겨 그리고 매시(梅詩)를 많이 남긴 사람이다. 그의 백매(白梅)라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그 유명한 청향만리(淸香萬里)라는 명구가 탄생한다.

 

白梅(백매) - 王冕(왕면)

 

冰雪林中著此身(빙설림중저차신)

不同桃李混芳塵(부동도리혼방진)

忽然一夜淸香發(홀연일야청향발)

散作乾坤萬里春(산작건곤만리춘)  

 

숲 속 눈과 얼음을 뚫고 자태 드러내니

복사꽃 자두꽃 필 때와 향이 다르네

하루밤 사이 홀연 맑은 향기 피어나니

온 세상에 흩어져 만리 안이 봄이로세

 

그림에도 능한 왕면이 그린 묵매도

 

명(明, 1368~1644)나라에 와서도 신품종이 대량으로 출현하여 왕상진(王象晋, 1561~1653)이 1621년 저술한 식물재배서인 군방보(群芳谱)에서는 19종의 매화 품종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청(靑, 1616~1912)나라 시절 진호자(陈昊子, 1612~?)가 1688년 저술한 원예서인 화경(花镜)에는 모두 21개 품종이 수록되어 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조수매(照水梅)도 이때 포함되어 눈길을 끈다.

 

조수매의 일종

 

매화와 우리 고문화

이미 서기 24년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기록에 매화가 등장하고 있으므로 최소한 그 이전에 매화를 도입하여 재배한 것으로 보이는 우리나라는 885년 신라 헌강왕 시절 당(唐)에 파견된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으로 신라 10현 중에 한 명이라는 최광유(崔匡裕)선생이 쓴 정매(庭梅)라는 시가 매화에 관한 최초의 시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故園還有臨溪樹(고원환유임계수) 應待西行萬里人(응대서행만리인)을 봤을 때는 국내가 아닌 중국 유학시절 만리 타국에서 고향의 시냇가 매화를 그리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도연명의 은일생활을 동경한다면서도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에서 입신한 문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쓴 매화라는 시인데 양주동(梁柱東, 1903~1977)선생이 번역한 것을 소개한다. 달나라 선녀인 항아(姮娥)는 그렇다 하더라도 최광유와는 달리 그는 중국 유학한 경험이 없는데도 중국 강서성 유령(庾嶺)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서강(西羌)의 피리소리인 강아적(羌兒笛)이 등장한다. 강서성 유령(庾嶺)은 홍매와 백매가 많기로 유명하여 매령(梅領)으로 불리는 곳이고 강적(羌笛)은 청해성 인근에 살던 티베트계 유목민인 강족들의 피리로 그들이 낙매화(落梅花)라는 곡을 즐겨 부르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중국 서적에 널리 통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며 그는 많은 시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인 동명왕편이라는 중요한 자료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식물을 소재로한 시가 많아 앞 480번 게시글 모란편에서 그의 시 절화행(折花行)을 소개한 바도 있다.

 

매화(梅花) - 이규보(李奎報) 작 양주동(梁柱東) 번역

 

庾嶺侵寒柝凍唇(유령침한탁동순)

不將紅粉損天眞(부장홍분손천진)

莫敎驚落羌兒笛(막고경락강아적)

好待來隨驛使塵(호대래수역사진)

한창 추운 유령에 언 입술을 터지고 

붉은 빛 지니고 참다운 모습 변하지 않네 

강적 소리에 놀라 떨어지지 말고

역 사자의 오는 길을 기다려서 따르소 

 

帶雪更粧千點雪(대설경장천점설)

先春偸作一番春(선춘투작일번춘)

玉肌尙有淸香在(옥기상유청향재)

竊藥姮娥月裏身(절약항아월리신)

눈 맞고도 천 송이 또 단장하고 

봄 앞서 살짝 한 번 봄을 미리 꾸미네 

옥 같은 살결에 맑은 그 향내 

선약을 훔친 항아의 전신인 듯 하네 

 

고려시대는 이규보 외에도 매호(梅湖)라는 호를 가진 진화(陳澕)와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정도전(鄭道傳)같은 여말선초의 문인들도 매화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지만 다음은 고려말 대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그 유명한 “백설이 잦아진 골에”라는 시조를 소개한다. 여기서 매화는 불굴의 절개와 강인한 기개를 가진 고려 충신 즉 우국지사(憂國之士)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여 중국의 매시(梅詩)들과 궤를 같이 한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 이색(李穡)

 

白雪이 ᄌᆞ자진 골에 구룸이 머흐레라
반가온 梅花ᄂᆞᆫ 어ᄂᆡ 곳에 퓌엿ᄂᆞᆫ고
夕陽에 호을노 셔셔 갈 곳 몰라 ᄒᆞ노라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물어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牧隱)은 이 외에도 수많은 매화 관련 시를 남겼는데 그 중에 아래의 매화시를 보면 그가 북송의 은일시인인 매처학자(梅妻鹤子)라는 별호를 가진 임포(林逋, 967~1028)를 무척 동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포의 산원소매(山園小梅) 이수(二首)라는 시 중에 疎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즉 “성긴 그림자 맑고 얕은 물에 비스듬히 드리우고 그윽한 향기 달뜨는 황혼에 퍼지네”라는 구절을 되새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은선생의 임포사랑이 훗날 퇴계 이황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매화(梅花) – 이색

 

小溪淸淺是江南(소계청잔시강남)

月上黃昏欲往參(월상황혼욕왕참)

老牧病餘多伎倆(노목병여다기량)

暗香疎影入淸談(암향소영입청담)

 

맑고 얕은 개울 여기가 강남인데

달 뜨는 황혼 그 자리에 가고파라

늙은 목은 아픈 뒤에 말만 많아져

암향소영 이야기에 푹 빠지네

 

다음은 매화를 무척 사랑하여 아예 매월당(梅月堂)이라는 호를 쓴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매화시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매화시인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는 수많은 매화시를 발표하여 훌륭한 작품도 많지만 그 중에서 탐매 14수 중 2수(首)가 모란과 매화를 비교한 내용이라서 소개한다. 여기서 모란을 불의에 아부하여 권세를 누리는 세조의 계유정난을 주동하거나 협조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비유하고 매화를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 절의파(節義派)에 비유하여 매화의 정백(貞白)에 반하여 훈구파에는 다소 모욕적인 춘정(春情)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다. 아마 모란과 매화의 중국 국화논쟁에도 모란은 지역적으로는 북방원산에 보수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매화는 남방원산에다가 진보 개혁층을 대변하고 있어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탐매(探梅) 2수(二首) - 김시습 

 

魏紫姚黃摠有名(위자요황총유명)

繁華定被得春情(번화정피득춘정)

那如阿堵心貞白(나여아도심정백)

不與世人高下評(불여세인고하평)

 

위자와 요황 모두 이름난 모란이라서

번화하여 반드시 이목을 끌겠지만

어찌 매화의 곧고 깨끗한 마음과 비기랴?

세인들아 함부로 고하를 평하지 말거라

 

그 외에도 조선 전기 매화시인으로는 매죽헌(梅竹軒)이란 호를 쓰는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 김종직(金宗直) 이행(李荇) 조위(曺偉)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등이 있으며 후기에는 이인상(李麟祥)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신위(申緯) 및 추사 김정희(金正喜)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매화시를 가장 많이 남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선생의 매화시를 보자. 중국의 많은 매화시나 고려말 또는 조선초 매화시와는 달리 퇴계의 매화시에는 정치적인 색채는 없다. 퇴계에게 매화는 견정불굴(堅貞不屈)의 의지를 가진 고결지사(高洁志士)라기보다는 세속의 띠끌이 없는 순수함과 아름답고 격조 높은 운치를 가진 사려 깊은 벗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매화시를 남긴 문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매화를 꽃나무 그 자체로 보거나 중국의 도연명이나 임포와 같은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그에게 자연의 일부로서 풍류의 대상이거나 인격을 부여하여 수시로 교감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기존의 여타 시인들이 읊은 매화는 한겨울인 음력 정초에 눈과 얼음을 뚫고서 꽃을 피우는 그야말로 설중매(雪中梅)라야 제격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관념적인 매화이었다면 퇴계의 매화는 여느 봄꽃나무와 거의 비슷하지만 약간 이른 빨라야 음력 2월에 피는 현실 속의 매화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퇴계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이지만 매화 재배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원예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중국이나 우리나라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인들의 매화시에 등장하는 전설재빙(剪雪裁冰)의 견인불굴(堅忍不屈) 기개(氣槪)로 피어나지 않고 여느 봄꽃나무보다 조금 빠르거나 심지어는 늦은 봄에 피어나기도 하는 매화를 위로(?)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도 했다.

 

婥約天葩玉雪資(작약천파옥설자)

何妨春晩景遲遲(하방춘만경지지)

細看冷艶彌貞厲(세간랭염미정려)

不必淸霜凍樹枝(불필청상동수지)

아름답고 어여쁜 꽃 옥설 같은 자태인데

늦은 봄에 더디 핀들 무슨 상관있으리오.

자세히 보니 차고 고운데다 더욱 곧고 꿋꿋하니

맑은 서리 내린 언 가지에서만 피어날 필요 없네. 

 

도산서원의 매화 주변에 모란이 심어져 있다. 김시습선생이 봤으면 한탄할 것 같다. 

 

그러면서 매화가 엄동설한에 피지 않고 늦게 피어서 아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퇴계는 그들은 眞知梅者(진지매자) 즉 “진정으로 매화를 아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혹한의 시련을 겪지만 변함없이 본성대로 제 때에 아름답게 꽃핀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 추운 겨울에 꽃핀 설중매(雪中梅)가 더 고운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야말로 매화 마니아가 아닐 수가 없다. 퇴계는 육우원(六友圓)이란 정원을 꾸며 매화(梅)와 소나무(松) 그리고 대나무(竹), 국화(菊) 및 연(蓮)을 심어 그 자신과 더불어 여섯 친구로 삼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시경(詩經)의 摽有梅(표유매) 其实七兮(기실칠혜) 즉 “매실이 떨어져 7개가 남았네”라는 대목의 매(梅)는 단지 열매만을 지칭하여 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다음과 같이 심하게 말하기도 하였다. 아마 퇴계선생은 매화나무라고 하지 않고 매실나무라고 하는 현재 우리나라 표준이름을 보면 크게 실망할 것 같다. 그리고 식물학자들은 퇴계선생 그리고 명륜당과 함께 천원권 지폐에 도안된 꽃나무도 매실나무라고 하려나?

 

周詩詠梅非眞識(주시영매비진식)

不爲梅花分皂白(불위매화분조백)

시경에서 읊은 매는 진면목이 아니다

매화에 대하여 흑백구분도 못하고 있다.

 

설중매란 품종명이 아니고 눈 속에서 피는 매화를 통칭하는 말이다. 
앞면에 매화와 명륜당 그리고 퇴계선생 초상이 도안되어 있고 뒷면은 겸재 정선이 도산의 계상서당을 그린 계상정거도이다.

 

아래는 퇴계선생의 매화시 중 백미라는 도산월야영매라는 시이다. 도산서원에 핀 매화와 하늘에 뜬 달 그리고 퇴계 자신이 하나가 된 모습이다.  

 

陶山月夜詠梅 (도산월야영매) –이황(李滉)

 

步屧中庭月趁人(보섭중정월진인)

梅邊行繞幾回巡(매변행요기회순)

夜深坐久渾忘起(야삼좌구혼망기)

香滿衣布影滿身(향만의포영만신)

뜨락 거니노라니 달이 날 따라와서

매화꽃 언저리 돌고 또 돌았다네.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

옷 가득 향기서리고 그림자 몸에 가득하네

 

일설에는 단양 관기 두향(杜香)이 퇴계에게 매화분을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퇴계가 매화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두향이 때문에 퇴계가 매화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수긍하기 어렵지만 둘 사이에 매화가 존재하였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짧은 만남은 퇴계가 다음 부임지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하게 된다. 퇴계가 곧 풍기군수를 사임하고 안동으로 낙향한 후 두향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퇴계의 11대 손으로 고종 때 홍문관 교리를 지낸 치암 이만현의 안동 고택 기둥에 남아 있다는 시이다. 내용으로 봐서 창가의 매화는 실내 화분에서 길러 꽃 피운 것으로 판단되는데 매화분이 한둘이 아니었겠지만 시기적으로 정말 두향으로부터 선물 받은 매화분일 수도 있겠다 싶다. 

黃卷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빛 바랜 서책으로 성현을 대하며

밝고 텅 빈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창가의 매화 다시 피어 봄소식을 전하니

거문고 줄 끊겼다고 한탄하지 말게나

 

다음은 평양 기생 매화(梅花)가 지었다는 시조이다. 여기서 매화는 기생 자신을 말한다. 나이든 기생 매화가 젊은 기생 춘설의 인기에 밀려 예전만 못함을 한탄하여 읊은 것이다. 하지만 매화는 기본적으로 결코 춘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기개를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다. 

 

매화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이러다 보니 매화시 이야기가 끝이 없다. 다음은 조선 후기 가객인 안민영(安玟英, 1816~1885)의 유명한 매화사 8수 중 두 번째를 끝으로 매화 관련 시사의 탐구는 마친다. 여기서도 매화는 고결한 지사가 아닌 매화꽃 그 자체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고 성긘가지(柯枝) 너를 밋지 아넛더니

눈(雪) 기약(期約) 능(能)히 직혀 두세 송이 퓌엿고나

촉(燭) 잡고 갓가이 사랑헐 졔 암향(暗香)좃차 부동(浮動)터라.

 

매화와 살구의 차이점

현대 식물분류학에서는 매화를 살구나무의 일종으로 분류하여 벚나무속 살구나무조로 분류하며 중국에서는 불과 얼마전까지도 아예 살구나무속으로 학명 Armeniaca mume로 표기하고 있었을 정도로 매화는 여러모로 살구나무와 많이 닮았다. 꽃이나 잎 그리고 수피와 그 열매의 모양이 살구나무를 많이 닮았으므로 이들만으로는 매화와 살구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아무리 같은 속(genus) 같은 조(Section)라고 하더라도 같은 종(Species)은 아니므로 당연히 다른 점이 있다. 매화가 살구보다 꽃이 작고 꽃자루가 거의 없으며 열매가 작으며 잎모양도 좁게 길쭉하며 끝이 길게 뾰족하며 잎자루도 짧다. 하지만 매화도 품종이 다양하고 살구도 개살구와 시베리아살구가 약간씩 달라서 실제로 꽃이나 잎으로 살구와 매화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살구는 노란색 매실은 녹색이므로 열매로는 구분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식용하기 위하여 아직 단단하고 녹색일 때 수확하기 때문에 청매실이라고 불리는 녹색 열매만 주로 봐서 그렇지 매실도 오래 두었다가 수확하는 황매실은 노란색이며 심지어는 일부에 홍색을 띠기도 한다. 반면 살구도 성숙하기 전에는 녹색이므로 겉모습으로 매실과 살구를 구분하기도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맛에서는 차이를 보여 살구는 신맛이 없지는 않지만 주로 단맛이 나고 청매실은 단맛이 없는 신맛이라서 쉽게 구분된다. 다만 황매실의 경우는 달콤한 향기가 나기도 하며 살구도 덜 익은 열매에서는 신맛이 난다. 그래서 매실의 흉년에는 국내 일부 악덕 업자들이 덜 익은 살구를 청매실로 속여서 판매하여 소비자와 분쟁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살구와 매실은 비슷하므로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매실을 일본 살구라는 뜻으로 Japanese apricot라고 주로 부른다. 왜냐하면 이미 알렉산더대왕 시절에 페르시아를 통하여 서양에 전파되었던 살구와는 달리 매실은 동인도회사 일원으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몇 년간 체류하면서 식물을 탐사한 독일 의사겸 식물학자인 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1796~1866)에 의하여 처음 서양에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학자답게 단번에 살구나무의 근연종으로 판단하여 1830년에 살구나무속으로 분류하여 학명 Armeniaca mume Siebold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종소명 mume는 매(梅)의 일본 발음 ウメ(ume)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 우메(ウメ)나 우리 매(梅) 모두 결국은 중국의 매(梅)의 발음 메이(méi)에서 유래된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나 싶다. 곧이어 살구나무속이 벚나무속으로 통합되자 지볼트 자신과 그의 동료 주카리니(Zucc.)가 벚나무속으로 편입하여 1836년 Prunus mume (Siebold) Siebold & Zucc.라고 명명한 것이 현재 우리가 쓰는 학명이 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일본에서 발견된 살구의 일종이라고 일본살구 즉 Japanese apricot라고 영어로 부르지만 실제로는 매화는 중국 남방이 원산지인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원산지 중국 입장에서는 속이 상할 일이다. 이와 같이 매화는 살구의 일종이며 꽃이나 열매가 살구와 닮은 점이 많은데도 중국이나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 등 오랫동안 매실나무를 재배하고 있는 동양에서는 매화와 살구를 크게 헷갈려 하지 않고 처음부터 구분해 인식하여 왔다. 그래서 청매(靑梅) 황매(黃梅)는 물론 백매(白梅)나 오매(烏梅) 춘매(春梅) 간지매(干枝梅) 산매(酸梅) 등 동양 3국에서 매를 부르는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살구와 관련된 것은 살구나무와 교잡종인 행매류(杏梅類) 외에는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살구와 매화는 겉보기에는 비슷하여도 실질적으로는 다른 점이 많은 것이다. 우선 화매(花梅)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는 그 빠른 개화시기를 들 수 있고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봄꽃나무 중에서 바로 매화에만 있는 그 강한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과매(果梅)로서는 단맛이 거의 없고 신맛이 강한 그 열매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살구는 꽃이 만개할 때 꽃잎이 뒤로 젖혀지는 독특한 특징이 있어 꽃으로 구분할 때는 매우 유용한 구분포인트가 된다. 그리고 열매의 경우 살구는 핵이 과육과 쉽게 분리되는 이핵(離核)이지만 매실은 점핵(粘核)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매실은 핵의 표면에 벌집 같은 구멍이 무수히 많지만 살구의 원종에는 없다. 그래서 핵의 표면 벌집 구멍의 여부 그리고 과다에 의하여 살구와 매화의 혈통이 섞인 잡종 정도를 파악하기도 한다.  

 

매화와 살구의 차이점

구   분 매   화 살   구
수   고 4~10m 소교목 5~12m 소교목 교목
수   피 녹색을 띤 천회색 매끈 회갈색 종렬
소   지 녹색 천홍갈색
잎모양 4~8 x 2.5~5cm, 선단미첨 5~9 x 4~8cm, 선단급첨
잎거치 소예거치 원둔거치
잎자루 1~2cm 2~3.5cm
꽃지름 2~2.5cm 2~3cm
꽃향기 농후 없음
꽃자루 1~3mm 무모 1~3mm 단유모
꽃받침 홍갈색, 접히지 않음 자록색, 개화 후 뒤로 졋혀짐
열   매 2~3cm 2.5cm 이상
과   육 점핵 신맛 이핵 다즙 단맛
매실핵 표면 벌집구멍 다수 표면 구멍 없음
개화기 2~3월 3~4월
결실기 5~6월 6~7월
염색체 2n=16, 24 2n=16

 

등록명 : 매실나무

북한명 : 매화나무

학  명 : Prunus mume (Siebold) Siebold & Zucc.

분  류 : 장미과 벚나무속 낙엽성 소교목

원산지 : 중국

중국명 : 매(梅)

일본명 : ウメ(梅)

영어명 : Japanese apricot

수   고 : 4~10m

수   피 : 천회색 혹은 대녹색, 평활

소   지 : 녹색, 광활 무모

엽   편 : 난형 타원형, 선단미첨, 기부 관설형 원형, 소예거치, 회록색

잎크기 : 4~8 x 2.5~5cm

엽   모 : 유시 양면 단유모, 후 점탈락, 하면맥액간 단유모

잎자루 : 1~2cm,  유시모 노후탈락, 선체

꽃차례 : 단생 혹 1아내 2송이

꽃특징 : 지름 2~2.5cm, 진한 향기, 선엽 개화

꽃자루 : 1~3mm, 무모

꽃받침 : 통상 홍갈색, 드물게 녹색, 녹자색, 관종형 무모, 단유모 악편란형

꽃부리 : 도란형, 백색 분홍색

수   술 : 꽃잎보다 짧거나 약간 김

자   방 : 유모 밀생

화   주 : 수술보다 짧거나 약간 김

열   매 : 근구형, 지름 2~3cm, 황색 녹백색, 유모, 신맛, 과육 점핵

매실핵 : 타원형, 복면 배릉 종구, 표면 벌집형 구멍

개화기 : 동춘계

결실기 : 5~6월

염색체 : 2n=16, 24

용   도 : 식용, 약용, 관상용

내한성 : 영하 23도

 

매실은 과육과 핵이 잘 분리되지 않는 점핵이다.
매실
살구에 비하여 길쭉하고 꼬리가 길다.
잎과 수피
황매실
매실핵에는 다수의 구멍이 있어 살구와 구분된다.
주로 일본에서 반찬으로 활용하는 우메보시(うめぼし) 즉 매실장아찌와 우리나라서 인기가 높은 매실청
곶감과 비슷한 모습인 건조시킨 매실
양력 1월에 피는 매화 - 일본
매화
일본 진다이식물원 매화원

 

 다음은 매화의 품종에 대하여 탐구하기로 한다.

 

 

 

참고논문 : 퇴계의 매화사랑과 매화시의 교육적 함의 – 계명대학교 김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