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시(詩)/漢詩(한시) 15

살구꽃의 암(暗) - 游园不值(유원불치) - 叶绍翁(엽소옹), 杏花(행화) - 薛能(설능)

그런데 중국에서 살구꽃이 항상 좋은 의미로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살구나무 즉 행(杏)을 풍류수(風流樹)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풍류란 멋스럽고 풍치가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색정적(色情的)이라는 뜻으로 결국 에로틱(erotic) 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20세기 초반에 에로틱하다는 뜻으로도 쓰기 시작하여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도색(桃色)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행색(杏色)을 그런 색정적인 의미로 쓰지는 않고 단지 살구나무 즉 행수(杏樹)를 풍류수(风流树)라고 하며 홍행출장(红杏出墙) 즉 가지가 담장을 넘어가는 붉은 살구꽃을 유부녀가 외도를 하는 것이라는 의미 정도로 쓴다. 이는 하루 아침에 누가 말한 것이 아니고 과거 당송시대부터..

살구꽃의 명(明) – 행단(杏壇) 행림(杏林) 행림춘연(杏林春燕) 급제화(及第花)

왕벚나무가 없던 과거 중국에서 살구나무는 그 개화시기가 매화와 복사꽃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특히 고향의 조상들 묘소를 찾게 되는 명절인 청명절에 피는 꽃이므로 고향의 꽃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게다가 중국에는 살구나무와 얽힌 좋은 의미의 용어들이 많다. 앞에서 본 두목(杜牧)의 청명(淸明)이라는 시 덕분에 중국에서 주막을 뜻하는 행화촌(杏花村)이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공자가 살구나무 단에서 강의를 하고 거문고를 연주하였다고 강단(講壇)을 뜻하는 행단(杏壇)이라는 용어가 있으며 청명절 즈음에 내리는 봄비를 행화우(杏花雨)라고 하며 의술이 고명한 의원을 행림(杏林)이라고 한다. 행림은 한나라 말기 삼국시대 오나라에 살던 동봉(董奉, 220~280)이라는 의원이 평소 진료비를 살구나무로 받아서 주변에 심어..

絶句(절구) – 志南(지남)

청명 한식절이 워낙 유명한 명절인 데다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서 움츠렸던 겨울을 털고 야외로 봄나들이를 많이 가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는 그 청명절을 대상으로 한 시(詩)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서 남송시절 지남(志南)이라는 승려가 쓴 칠언절구가 가장 유명하여 지금도 중국인들은 청명 한식절에 많이 인용하는 것 같다. 여기서 봉(篷)은 돛은 없고 지붕이 있는 배를 말하며 沾衣는 霑衣(점의)의 간체자(简体字)로 가랑비에 옷 젖는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이 沾은 添(첨)의 간체자이기도 하므로 국내서 첨의로 잘못 읽는 경우도 더러 보인다. 양류풍(楊柳風)은 24번 화신풍 중에서 청명 제3후(淸明第三候)에 해당하는 화신풍(花信風)이다. 그쯤에서 버들의 새잎이 아름답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명절을 노래한 ..

清明(청명) –杜牧(두목)

중국에는 수많은 문인들의 살구꽃을 대상으로 노래한 시가 있지만 주막이나 주촌을 뜻하는 그 유명한 행화촌(杏花村)이라는 말이 탄생한 만당(晩唐) 대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비내리는 청명(淸明)절에 살구꽃을 감상한 청명(淸明)이라는 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두목은 성당(盛唐)시대의 대시인이자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에 견주어 소두(小杜)라고 불리었으며 같은 시대의 유명한 시인인 이상은(李商隱, 812~858)과 더불어 소이두(小李杜)라고도 불렸다. 이는 시선(詩仙)으로 불렸던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를 대이두(大李杜)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하여 부르는 세칭(世稱)이다. 참고로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절은 절기 중 유일하게 중국에서 크..

杏花诗(행화시)와 飮水思源(음수사원) – 庾信(유신)

살구나무의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재배 역사가 길고 문자가 발달한 덕분에 살구꽃에 대하여 읊은 시는 수도 없이 많다. 우선 당나라 이전의 시인으로는 남북조시대의 문학을 집대성하였다고 알려진 북주(北周)의 대문호 유신(庾信, 513~581)이 쓴 행화시(杏花诗)를 들 수 있겠다. 유신은 남양 신야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수재라는 소리를 들은 천재로서 남조 양나라에서 북조의 서위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나라가 망하여 돌아갈 곳이 없자 서위와 북주에 계속 머물면서 높은 벼슬을 하고 문단의 종사가 되고 황제의 예우도 받았지만 남쪽 고국을 늘 그리워하면서 사람은 그 본분을 망각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그가 징조곡(徵调曲)에서 언급한 아래 문구는 그 유명한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弼雲臺看杏花(필운대간행화) – 朴趾源(박지원)

요즘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온통 벚나무 천지가 되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일본보다 벚나무가 더 흔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우리가 즐기는 왕벚나무는 국내 도입된 역사가 겨우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1907년 일본인들이 왕벚나무 묘목 1,500주를 들여 와 남산 왜성대공원에 500주를 심고 나머지를 여러 지역에 심은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자라자 1914년 남산에서 개최된 벚꽃놀이에 10만 인파가 모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럼 그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봄 꽃을 전혀 즐기지 않았단 말인가? 풍류를 즐겼던 양반들이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 대상은 삼국시대의 기록에서부터 나오는 살구꽃이었다. 왕벚나무 도래 이전에도 국내에 토종 벚나무들이 더러 있었지만 존재감이 약..

陶山月夜詠梅(도산월야영매) –李滉(이황)

우리나라에서 매화시를 가장 많이 남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선생의 매화시 중 백미라는 도산월야영매라는 시이다. 도산서원에 핀 매화와 하늘에 뜬 달 그리고 퇴계 자신이 하나가 된 모습이다. 중국의 많은 매화시나 고려말 또는 조선초 매화시와는 달리 퇴계의 매화시에는 정치적인 색채는 없다. 퇴계에게 매화는 견정불굴(堅貞不屈)의 의지를 가진 고결지사(高洁志士)라기보다는 세속의 띠끌이 없는 순수함과 아름답고 격조 높은 운치를 가진 사려 깊은 벗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매화시를 남긴 문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매화를 꽃나무 그 자체로 보거나 중국의 도연명이나 임포와 같은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그에게 자연의 일부로서 풍류의 대상이거나 인격을 부여하여 수시로 교감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

梅花(매화) – 李穡(이색)

고려말 대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선생은 수많은 매화 관련 시를 남겼는데 그가 북송의 은일시인인 매처학자(梅妻鹤子)라는 별호를 가진 임포(林逋, 967~1028)를 무척 동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매화(梅花)라는 시를 보면 바로 앞에서 본 임포의 산원소매(山園小梅) 이수(二首)라는 시 중에 疎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즉 “성긴 그림자 맑고 얕은 물에 비스듬히 드리우고 그윽한 향기 달뜨는 황혼에 퍼지네”라는 구절을 되새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은선생의 임포사랑이 훗날 우리나라에서 매화 관련 시를 가장 많이 지은 퇴계 이황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매화(梅花) – 이색(李穡) 小溪淸淺是江南(소계청잔시강남)月上黃昏欲往參(월상황혼..

山园小梅(산원소매) - 林逋(임포)

중국인들의 매화사랑은 지극하여 손문(孫文)의 신해혁명 이후 국화로 지정한 적도 있었으며 공산화 이후에도 모택동이 무척 매화를 사랑하여 그대로 매화를 국화로 지정하려고 하였으나 뜻이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 대만에서 먼저 매화를 국화로 지정한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중국에는 국화가 아직 없으며 현재도 매화와 모란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이전부터 중국 문인들은 매화를 무척 사랑하여 수많은 시를 남겼는데 이번에는 일생을 매화(梅花) 그리고 학(鶴)과 더불어 살면서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아서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별호까지 가진 북송의 은일시인(隱逸詩人) 임포(林逋, 967~1028)의 시를 소개한다.  절강성 항주(杭州) 서호 부근 고산(孤山)에 은거하던 그는 산원..

白梅(백매) - 王冕(왕면)

모란과 함께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이 바로 매화이지만 그 수많은 중국인들 중에서도 매화를 지극히 사랑한 사람으로서 송나라 시대에 임포(林逋, 967~1028)가 있었다면 원(元, 1271~1368)나라 시대에는 왕면(王冕, 1310~1359)이 있다. 그는 절강성 소흥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독학으로 원말의 저명한 시인이자 화가가 되었다. 그는 권세를 능멸하고 비난하며 공명과 록(祿)을 경시하고 백성들의 고난을 동정하거나 전원에서의 은둔생활을 묘사한 작품이 많다.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집 주변에 매화 1천 그루를 심어 매화옥주(梅花屋主)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묵매(墨梅)를 즐겨 그리고 매시(梅詩)를 많이 남긴 사람이다. 그의 백매(白梅)라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그 유명한 청향만리(淸香萬里)라는 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