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시(詩)/漢詩(한시) 70

长恨歌(장한가) - 白居易(백거이)

长恨歌(장한가) - 白居易(백거이) 汉皇重色思倾国(한황중색사경국)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부득)。杨家有女初长成(양가유녀초장성)养在深闺人未识(양재심규인미식)。天生丽质难自弃(천생려질난자기)一朝选在君王侧(일조선재군왕측)。回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六宫粉黛无颜色(육궁분대무안색)。春寒赐浴华清池(춘한사용화청지)温泉水滑洗凝脂(온천수활세응지)。侍儿扶起娇无力(시아부기교무력)始是新承恩泽时(시시신승은택시)。云鬓花颜金步摇(운빈화안금보요)芙蓉帐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春宵苦短日高起(춘소고단일고기)从此君王不早朝(종차군왕부조조)。承欢侍宴无闲暇(승환시연무한가)春从春游夜专夜(춘종춘유야전야)。后宫佳丽三千人(후궁가려삼천인)三千宠爱在一身(삼천총애재일신)。金屋妆成娇侍夜(금옥장성교시야)玉楼宴罢醉和春(옥루연파취화춘)。姊妹弟兄皆列土(자매제형개열..

长恨歌(장한가) - 白居易(백거이) 3,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 천장지구(天長地久)

당나라 대시인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806년에 쓴 엄청나게 긴 칠언가행(七言歌行) 형식의 시인 长恨歌(장한가) 중 마지막 제3단을 소개한다. 여기서는 당 현종이 사람을 하늘과 땅으로 보내 양귀비의 혼백을 찾는 과정과 드디어 양귀비가 하늘의 봉래궁에서 당 현종의 사자를 만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백낙천이 35세인 806년 12월 섬서성 주질현위(盩厔县尉)로 재직할 당시 친구 왕질부(王质夫)와 소설가 진홍(陈鸿) 세 사람이 선유사(仙游寺)라는 곳으로 놀러 갔다가 우연히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나와서 누가 글로 쓰지 않으면 곧 잊혀질 것이라며 후세에 자세한 내막을 알리기 위하여 백낙천은 장시(长诗)를 쓰고 진홍은 전기(传记)를 쓰기로 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마지막 ..

长恨歌(장한가) - 白居易(백거이) 第二段(제이단), 오동과 벽오동

당나라 대시인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806년에 쓴 엄청나게 긴 칠언가행(七言歌行) 형식의 시 长恨歌(장한가) 중 제2단을 소개한다. 여기서는 마외역병변(马嵬驿兵变)으로 양귀비가 살해되고 이후 당 현종이 양귀비를 자나깨나 그리워하며 깊은 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마외역병변(马嵬驿兵变)은 안록산의 난 때 당현종이 피난을 가던 중에 현 섬서(陕西)성 흥평(兴平)시인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수행 근위병들이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杨国忠)을 처형하고 양귀비 즉 양옥환(杨玉环)을 자결하게 만든 사건을 말한다. 식물로는 제1단에 이어 여기 제2단에서도 부용(芙蓉)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부용은 현재는 무궁화속 목부용을 지칭하지만 과거 당나라시대까지는 중국에서 연꽃을 의미했다. 백..

长恨歌(장한가) - 白居易(백거이) 中(중) 第一段(제일단)

당나라 대시인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806년에 쓴 엄청나게 긴 칠언가행(七言歌行) 시인 长恨歌(장한가)인데 너무 길어서 편의상 3대단(三大段)으로 구분하여 우선 그 제일단(第一段)을 소개한다. 이 단에서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모습과 효과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황정의 난국과 안사의 난을 다루고 있다. 백낙천의 장한가는 중국에서 다음과 같은 평을 받는다. 장한가의 중심 사상은 당현종이 여색을 밝혀 안사의 난을 초래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의 비극을 동정하고 그들의 생사불변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 전체의 예술성이 비교적 높다. 첫째, 원본 사료의 선택과 활용이다. 당 현종은 비극의 제작자이자 수용자였다. 시인은 그들의 죄악적인 면을 쓸 때 끝까지 주의..

枇杷(비파) – 이직(李稷), 비파

조선초에 재상까지 지낸 이직(李稷, 1362-1431)이란 분이 쓴 비파라는 시가 있다. 하지만 앞의 포은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명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다녀온 사실로 봐서는 중국에서 본 비파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로부터 머지않은 시기에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비파를 재배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이 나온다. 전라도 순천에 가면 오림정(五林亭)이란 정자가 있다. 연산군때 목사를 지낸 신윤보(申潤輔, 1483~1558)란 분이 1545년 을사사화 후 낙향하여 부근에 松梅枇柚竹(송매비유죽) 즉 소나무와 매실나무, 비파나무, 유자나무 그리고 대나무 등 5종류의 나무를 심어 오림정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정조때인 1784년 문신인 조현범(趙顯範, 1716~1790)이 지은 악부인 강남악부(江南樂府)의 오림사(..

楊州食枇杷(양주식비파) – 정몽주(鄭夢周), 비파

우리나라 기록에 비파가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이다. 포은선생 후손이 유생들과 함께 나중에 엮은 중판집에 다음과 같은 양주식비파(楊州食枇杷)라는 시가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배경은 우리나라가 아니고 중국 강소성 남경 인근에 있는 양주이다. 내용으로 봐서는 그 당시 고려에서는 비파가 재배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 사신으로 여러 번 방문한 바 있는 포은선생은 양주와 인연이 깊어 2013년 국내 후손들의 협력으로 중국 양주시에 있는 당나라 유적박물관인 당성유지박물관(唐城遺址博物館)에 선생의 동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 인근에는 최치원(崔致遠, 857~908)선생의 기념관도 있다고 한다. 楊州食枇杷(양주식비..

田舍(전사) - 杜甫(두보), 비파(枇杷) 굴피나무(榉柳)

장미과 비파나무는 이름이 정감이 가고 잎모양이 좋아 주로 관상용으로만 재배되는 줄로 생각하기 쉬우나 알고보면 뛰어난 약효로 중국과 일본에서 오래 전부터 거의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면서 다양한 치료제로 사용되어 왔으며 그 열매까지 먹는 유실수이다. 중국이 원산지인데 일본과 우리나라 그리고 인도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는 키가 10m까지도 자라는 상록 소교목 또는 교목이다. 비파나무라는 그 이름은 서역에서 들어온 악기 비파(琵琶)를 닮았다고 붙여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악기는 비파(批把)이고 나무는 비파(枇杷)라서 글자가 매우 비슷하였으나 둘의 혼동을 방지하고자 위진(魏晋, 220~420)시대에 악기 비파의 한자표기를 비파(琵琶)로 변경하였다는 설이 있다. 중국 기록에서 비파나..

惠州一绝 食荔枝(혜주일절 식여지) - 蘇軾(소식), 리치 = 여지(荔枝)

송나라 대시인 동파거사(東坡居士) 소식(蘇軾, 1037~1101)이 1095년 저 멀리 영남 광동성 혜주(惠州)로 귀양가서 여러가지 지역 특산 과일을 맛보고서 읊은 시이다. 열대 과일들의 맛이 너무 좋아서 귀양지에서 계속 머물고 싶을 정도라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진문혜공(陈文惠公)은 북송 재상이자 시인인 진요좌(陈尧佐, 963~1044)를 말하고 나부산(罗浮山)은 광동성 혜주시에 있는 영남제일산(岭南第一山)으로 불리는 해발 1,296m인 산 이름이고 노귤(芦橘)은 비파 열매를 양매(杨梅)는 소귀나무 열매를 말한다. 惠州一绝 食荔枝(혜주일절 식여지) - 蘇軾(소식)혜주 제일은 여지를 먹는 것이다. 惠州太守东堂,祠故相陈文惠公,堂下有公手植荔枝一株,郡人谓将军数。今岁大熟,赏啖之馀,下逮吏卒。其高不可致者,纵猿取..

过华清宫 绝句 三首(과화청궁 절구 3수) - 杜牧(두목), 리치 = 여지(荔枝)

무환자나무과에는 리치(荔枝)와 람부탄(紅毛丹) 그리고 용안(龙眼)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열대 과일나무들이 속한다. 그 중 하나인 리치는 동남아시아, 인도 및 아프리카와 하와이, 미국 남부, 중남미까지 전세계 열대 및 아열대지방에 널리 퍼져 재배되고 있지만 원 고향은 2천 년 전인 한나라 시대부터 재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중국이다. 중국 이름은 여지(荔枝)인데 원래 이름은 이지(离支 =离枝)였다고 한다. 이 과일은 달린 가지와 함께 잘라서 보관하여야만 신선도를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대 이시진이 본초강목에 당나라 유명 시인 백거이의 말을 빌려 만약 열매를 가지에서 분리하면 하루면 색이 변하고 3일이면 맛이 변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지(离支)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동한시대에 와서 지금의 ..

梁园吟(양원음) - 李白(이백), 양매(楊梅) = 소귀나무

이번에는 당나라 시선 이백(李白, 701~762)의 대표작 중 하나인 梁园吟(양원음)이라는 긴 칠언고시(七言古诗)를 소개한다. 이 시는 당현종의 조정에 불려 가서 근무하다가 환관의 모함 또는 부적응 등으로 744년 퇴임하고서 현재 하남성 개봉시와 상구시에 걸쳐 있는 과거 송나라와 양나라의 유적지가 있는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서 쓴 시라고 한다. 이 시는 대략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전반부는 서사에 중점을 두고 후반부는 서정에 중점을 둔다. 전반부는 시인이 수도 장안을 떠나 동쪽으로 송주(宋州) 양원(梁园)에 와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감회를 토로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주로 황량하고 퇴락한 춘추전국시대의 송(宋)나라 또는 한나라의 양국(梁國) 양원(梁园)을 마주하며 현재와 과거의 변화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