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벚나무를 본 적도 없는 과거 우리 조상들은 물론 아니겠지만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벚나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영락없이 왕벚나무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왕벚나무가 뭔지는 몰라도 벚나무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바로 왕벚나무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이야기이다. 국내에 등록된 벚나무 종류가 수십 종은 되지만 벚꽃놀이 명소에 가면 꽃을 즐기는 벚나무 대부분이 왕벚나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의도의 벚나무는 90% 이상이 왕벚나무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벚꽃명소인 진해의 여좌천은 거의 100% 왕벚나무이며 경화역 주변도 91% 이상이 왕벚나무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공원이나 가로수 등도 모두 왕벚나무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로 가로수는 왕벚나무가 아닌 벚나무나 잔털벚나무 또는 분홍벚나무인 경우도 많지만 워낙 왕벚나무의 꽃이 아름답고 화려하기 때문에 온통 왕벚나무 일색으로만 느껴지게 된다. 왕벚나무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 만개할 때까지 잎이 나오지 않는 데다가 매우 큰 꽃이 3~5송이씩 모여서 우산모양으로 피는 꽃이 매우 풍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잎 하나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꽃으로만 큰 나무 전체를 뒤덮는 장관을 연출하기에 평소 꽃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왕벚꽃의 아름다움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그 왕벚나무에 대하여 탐구해 보자.
왕벚나무의 국내 도입
우리나라 왕벚나무는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처음 도입된 외래종이다. 공식적으로는 1907년에 국가 차원에서 3년생 1,500주를 들여와 그 중 500주는 남산 왜성대공원에 심고 나머지 1,000주는 여러 지역에 나눠서 심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말이 국가 차원이지 실제로는 일본정부가 일본인들을 위하여 보내서 심은 것이다. 1910년의 한일병합 이전이지만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부터 조선을 합병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고 1885년 한성조약 이후 그 야욕이 노골화 되어 이미 남산에는 일본인 거류지역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1897년에 과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하였던 남산 왜성대(倭城大) 즉 현 예장동(藝場洞) 일대에 왜성대공원을 조성하고 1898년에는 남산대신궁이라는 신사도 건립하였다. 그러고 나니 신사와 함께할 일본의 상징이자 일본인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쿠라가 빠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07년에 3년생 소메이요시노자쿠라 즉 왕벚나무 묘목 500주를 국내 최초로 들여와 왜성대공원에 심은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8년과 1909년 창경궁에 오사카에서 도입한 2년생 왕벚나무 300주를 심었다. 남산에 심은 벚꽃이 1914년에는 제법 자라서 꽃을 피우자 무려 10만 인파가 몰려서 구경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점차 남산 사쿠라가 시들어가면서 우리나라 벚꽃놀이의 중심이 남산에서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꾼 창경궁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그 사이 창경원에는 해마다 다양한 종류의 벚나무를 추가로 도입하여 그 숫자가 2,000그루를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1918년부터 창경원의 벚꽃놀이가 시작되었으며 1924년부터는 야간 벚꽃놀이도 시작했다. 창경원에 심어진 그 벚나무들이 훗날 1984년에 과천 서울대공원과 여의도로 옮겨져 윤중로에서 지금도 해마다 벚꽃놀이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첫 째는 일본 원산 왕벚나무는 조선 침략을 염두에 두었던 일본이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을 위하여 가져다 심었던 것이다. 그 당시 한국에서 근무하던 한 일본 관리는 “벚꽃은 일본을 대표하는 꽃이며 신주(神州)를 표상하고 무사도(武士道)를 상기시키고 요시노(吉野)를 생각케 하며 불의명분에 맞서는 일본의 국화(國華)로 봐야 하므로 고향을 멀리 두고 조선에서 일하고 있는 모국인의 향수를 누그러뜨리고 그 땅에 친밀함을 갖게 하고 내지 연장의 싹을 키워서 안주(安住)할 생각을 굳히는 데 벚꽃은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 1926년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조선총독부나 일본 정부에 대하여 조선에 벚나무를 많이 심어 달라는 이야기이다. 이미 그 이전인 1909년에 국내서 일본어로 발행되던 경성신보(京城新報)에 한반도에는 벚나무가 적어서 일본 거류민의 증가와 함께 벚나무의 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기사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벚나무가 무려 8종이나 자생하지만 그 당시 실제로 벚꽃놀이를 갈만한 토종 벚나무 숲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니까 우리 민족은 매화나 살구꽃 그리고 복사꽃은 즐겨도 벚꽃은 즐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한성에서는 매년 봄이면 인왕산 아래 필운대의 살구꽃을 감상하러 많은 인파들이 모였다는 사료는 많지만 벚꽃을 감상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일본인들이 나중에 우이동계곡과 가오리(수유리)에 주로 개벚나무로 구성된 숲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1912년부터 거기로 가서 벚꽃놀이를 즐겼는데 그게 우리나라 최초의 벚꽃놀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남산과 창경원에 심은 왕벚나무가 자라서 꽃이 피자 교통이 불편하고 감흥도 적은 우이동의 벚나무 숲은 관심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민족은 우리 자생 벚나무에는 그다지 감흥을 못 느끼고 딱히 벚꽃놀이를 한 적이 없었지만 일본인들은 벚나무를 일본의 상징 또는 일종의 신앙으로 여기므로 왕벚나무가 아니더라도 우이동계곡을 찾아서 벚꽃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민족은 비슷한 시기에 꽃이 피는 살구꽃놀이는 가도 벚꽃놀이를 한 적은 없었지만 일본인들은 살구꽃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벚꽃놀이가 필요하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왕벚나무가 도입되어 남산에서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자 그동안 벚꽃에 무심하던 조선인들도 열광하여 무려 10만 인파가 모여서 즐겼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한성부의 인구가 인근 군을 합해도 채 30만이 안되었을 터인데 대단한 인파가 모인 것이다. 그로부터 창경원과 진해 그리고 여의도 등의 벚꽃놀이가 매년 쭉 대성황을 이뤄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왕벚나무 이전에 한반도 봄꽃의 대명사이던 살구꽃은 이제 우리들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있으며 급기야는 가로수로 심어진 멀쩡한 살구나무를 베어내고 벚나무로 교체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위에서 일본에서 도입한 왕벚나무를 일본 이름인 사쿠라라고 몇 번 의도적으로 언급한 이유는 도입 당시는 물론 해방 후 한참까지도 왕벚나무의 우리나라 정식 명칭이 사꾸라였기 때문이다. 일본명이 소메이요시노(ソメイヨシノ, 染井吉野) 또는 요시노자쿠라(ヨシノザクラ, 吉野桜)인 이 왕벚나무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사꾸라라고 불렀다. 1937년에 정태현 선생 등이 발간한 조선식물향명집에 국명이 사꾸라라고 등재되어 있었고 학명은 Prunus yedoensis Matsum.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 당시 신문기사에도 모두 사꾸라 또는 사쿠라로 표기했다. 그 후 국명은 철자를 달리하여 사구라나무라고도 했지만 왕벚나무라는 이름은 해방 후인 1949년 박만규선생의 우리나라식물명감에서 처음 쓴 것이다. 하필이면 일본산 외래종에다가 왕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다니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식물 이름에 왕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것은 매우 흔한 일로서 그런 이름이 약 100개나 된다. 여기서는 꽃이 매우 크고 풍성하게 피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정태현선생은 나중인 1965년에 큰꽃벚나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는데 이 이름이야 말로 이해하기 쉬운 적절한 이름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당시 식물학계에서 논란은 있었지만 제주도 한라산에서 발견된 민벚나무와 일본 소메이요시노를 하나의 종으로 분류하였기에 처음에는 일본 소메이요시노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명명된 왕벚나무는 곧 이 둘을 통합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우리 자생종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다시 둘로 분리되어 제주산 민벚나무가 제주왕벚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국가표준식물목록상의 왕벚나무는 2020년부터 일본산 소메이요시노만을 지칭하게 된다.
일본 에도시대 탄생한 왕벚나무
왕벚나무 즉 소메이요시노는 일본에서도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일본에서 자생하는 야생 벚나무 10종 중에 소메이요시노는 없다. 그 이유는 이 수종은 일본에서 아직까지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말기에 나타난 것은 맞는데 그 출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가 불투명한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것은 에도시대 말기에서 메이지시대 초기에 일본 동경 토시마구(豊島区)에 조경사들과 정원수 전문 장인들이 모여 있던 화훼단지인 소메이무라촌(染井村)에서 요시노자쿠라(吉野桜)라는 이름으로 재배 유통되고 있었던 것을 일본 박물학자인 후지노 요리나가(藤野 寄命, 1848~1926)박사가 1885년 우에노(上野)공원의 벚나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는 나라현 요시노야마(吉野山)의 벚나무와는 다른 새로운 종임을 간파하고 소메이(染井)무라촌과 요시노(吉野)야마의 앞 글자를 합하여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가 1900년 일본 원예잡지에 발표하면서부터 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1년 일본 식물학자인 마츠무라 진조(松村 任三, 1856~1928)가 에도시대에 탄생한 품종이라고 Prunus yedoensis Matsum.라는 학명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내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아서 의심하던 차에 영국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 아놀드수목원에서 일하던 20세기 최고의 식물채집가이자 탐험가인 Ernest Henry Wilson(1876~1930)이 1916년에 이 품종은 올벚나무와 왜벚나무의 교잡종일 것이라는 의견을 발표한다. 그래서 이후 교잡종임을 나타내는 Prunus x yedoensis라고 학명 표기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몇 번 방문하였던 윌슨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여기서도 여실히 들어난다. 왜냐하면 수십 년 후인 1962년에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의 식물유전학자인 다케나카 요(竹中要)박사가 실제로 올벚나무와 왜벚나무를 교잡시켜 왕벚나무와 비슷한 교잡종을 탄생시키는 실험에 성공하여 윌슨의 주장을 뒷받침하였으며 1995년에 와서는 일본에서 유전자분석으로 부모종이 그의 주장과 같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발견된 왕벚나무
한편 우리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대구에서 생을 마감한 한국명이 엄택기인 프랑스선교사 겸 식물채집가인 Émile Joseph Taquet(1873~1952)신부가 제주도에 근무할 당시인 1908년 제주도 해발 600m 지점에서 일본의 소메이요시노와 매우 비슷한 벚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그가 채집하여 보낸 표본을 대상으로 독일 식물학자인 Bernhard Adalbert Emil Koehne(1848~1918)가 1912년 일본 소메이요시노의 변종으로 분류하여 Prunus yedoensis var. nudiflora Koehne라는 학명으로 명명한다. 그러니까 원종인 일본 소메이요시노는 일본에 자생지가 없는데 그 변종인 제주왕벚나무는 우리나라에 자생지가 발견된 어색한 상황이 된 것이다. 거꾸로 제주왕벚나무가 원종이 되고 일본 소메이요시노가 변종이라야 제대로 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주도가 원산지라는 것을 시사하는 셈이 된다. 그러다가 급기야 일본의 저명한 식물학자인 고이즈미 겐이치(小泉源一, 1883~1953)가 1932년에 제주도를 탐사하여 제주왕벚나무 한 그루와 진짜 일본왕벚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소메이요시노는 제주도가 원산지라는 즉 "Prunus yedoensis Matsum. is a native of Quelpaert."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제주왕벚나무의 학명을 일본 소메이요시노의 변종 신분에서 독립된 원종으로 승격시켜 Prunus × nudiflora (Koehne) Koidz.로 재명명한다. 이 학명이 현재 우리나라 국표식에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한일간 왕벚나무의 원산지 규명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의 시작이 엉뚱하게도 우리 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일본학자에 의하여 주장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일본 고이즈미(小泉)박사는 분명 두 그루가 다른 나무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 당시 우리나라 식물분류학계를 주도하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은 그가 1916년에 발간한 조선삼림식물편 5집에서 이 제주왕벚나무를 글쎄 무슨 이유인지 일본 소메이요시노의 학명 Prunus yedoensis의 이명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리하여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 등재된 사꾸라는 학명 Prunus yedoensis Matsum.에 일본명이 소메이요시노로 되어 있고 제주도 원산 왕벚나무(민벚나무)의 학명 Prunus x nudiflora나 일본명 에이슈우자쿠라(エイシュウザクラ, 瀛州桜)는 조선식물향명집에 별도로 등재되어 있지는 않다. 아마 제주왕벚나무를 일본 소메이요시노의 이명으로 처리한 나카이를 따라서 둘을 하나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49년 박만규선생의 우리나라식물명감에서 사꾸라라는 이름을 왕벚나무로 바꾸면서 민벚나무를 이명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민벚나무가 바로 학명 Prunus × nudiflora를 지칭하는 것이다. 종소명 nudiflora가 naked flower라는 뜻인데 왕벚나무와는 달리 꽃받침이나 꽃자루 그리고 꽃받침통에 털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따라서 우리 이름을 민벚나무라고 한 것 같다. 그러니까 1949년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일단 일본 왕벚나무와 제주 민벚나무를 하나의 종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그 후 1962년 국립과학관장을 하던 박만규(朴萬奎, 1906~1977)박사가 직접 한라산 탐사에 나서 왕벚나무의 자생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까 타케신부가 발견했다는 제주왕벚나무의 자생지를 식물학자로서는 최초로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제주 자생지를 발표하자 그때는 국내서 일본 소메이요시노와 제주 민벚나무를 동일종으로 왕벚나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분류하고 있었기에 소메이요시노의 원산지도 자연스럽게 제주도가 된 셈이다. 박만규선생은 1932년의 일본학자 고이즈미가 발견하였다는 진짜 일본 소메이요시노에 대하여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벚나무의 자생지는 제주라는 기사가 동아일보 등에 기재된다. 하지만 일본 식물학계에서는 이를 수용한 것은 아니고 하나의 기원설로 받아들인다. 그 후에도 우리나라 대표적인 식물학자인 이창복선생이 제주 원산의 민벚나무를 제주벚나무(1966년)와 한라벚나무(2003년)라는 이름을 제시한 것을 보면 국내서도 일본왕벚나무와 제주왕벚나무가 완전하게 동일한 종이라고 믿거나 주장한 것 같지는 않다. 그 후 한일 양국 식물학자들의 연구로 일본 소메이요시노와 완전 별개의 교잡종임이 밝혀진 현재는 학명 Prunus × nudiflora (Koehne) Koidz.인 제주원산은 제주왕벚나무라는 국명으로 일본원산은 왕벚나무라는 국명 그대로 정리하여 각각 등록되어 있다. 그래서 국내 일부에서는 왕벚나무라는 이름을 제주원산에다가 붙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왕벚나무 원산지 혼란
어느 식물이든 그 자생지는 마땅히 규명하여야 할 과제이지만 공교롭게 그 원산지가 한일간의 마찰로 비화할 이유가 있었기에 왕벚나무의 경우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우선 벚나무를 국가의 상징이거나 일종의 신앙으로 여기는 일본국민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높은 벚나무인 소메이요시노의 원산지가 대한민국 제주도라는 주장은 사실여부를 떠나서 쉽게 수긍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조성된 왕벚나무를 제거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일본산 사쿠라의 식재를 못마땅하게 여긴 애국지사들이 은근히 반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가 횡보(橫步) 염상섭(廉尙燮, 1897~1963)선생 같은 분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 요사이 조선에서도 벚꽃놀이가 풍성풍성한 모양이다.… 조선색과 사꾸라색이 어울릴지 나는 명언(明言)할 수 없다.… 벚꽃은 조선의 하늘같이 청명한 자연색에서는 제 빛을 제대로 내지 못할 것이다.… 조선의 유착한 기와집 용마름 위로나 오막살이 초가집 울타리 위로 벚꽃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암만해도 ‘식민 사꾸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필가인 청오(靑吾) 차상찬(車相瓚, 1887~1946)선생은 팔도의 꽃이야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본 사쿠라에 대비하여 우리 진달래를 내세웠다. “조선 사람으로 외국에 가서 봄을 만날 때에는 먼저 진달래가 보고 싶고 또 진달래를 본다면 몸은 비록 외국에 있어도 마치 고국에 돌아온 것과 같이 반가운 생각이 난다. 그것은 다만 추상적 말이 아니라 누구나 실제로 체험하여 보는 일이다. 조선 사람의 진달래에 대한 애착심은 결코 일본 사람의 사쿠라에 대한 애착심 못지않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치 않고 예로부터 모든 사람의 많은 시와 노래를 가지고도 족히 증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사쿠라는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벌채되기도 한 상황에서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주장은 매우 큰 영향을 주는 중요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즉 오래된 아름다운 벚나무를 굳이 제거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진해시의 경우 광복 후 벚나무 상당수를 벌채하였다가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말이 나오자 중단하고 다시 수입하여 심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932년에 순수하게 학자적인 입장에서 일본학자가 제기한 왕벚나무의 제주도 원산지설이 결과적으로는 우리나라에 심어진 수많은 벚나무들의 생명을 지킨 방패막이 된 셈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후 그동안 눈치 보던 관공서나 기업 또는 가정에서 마음 놓고 앞다퉈 공원이나 학교 가로수 정원 등에 왕벚나무를 마구 심기 시작하여 한반도 금수강산을 순식간에 사쿠라 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는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벚나무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시작은 일본인들이 심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원해서 우리 손으로 직접 심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은 달랐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초토화된 도시 등을 재건할 때 김일성의 명령으로 벚나무 대신에 살구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식물에 깊은 지식이 없는 웬만한 사람들은 살구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면 벚꽃인줄 안다.
일본 왕벚나무의 기원 미상
한편 일본에서는 1932년 일본의 저명한 식물학자가 제주도 원산설을 주장하였음에도 겉으로는 애써 외면하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하였지만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일본내에서 발견되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던 것이다. 일본에는 소메이요시노의 기원에 대하여 3가지 설이 있었다. 하나는 고이즈미박사가 주장한 제주왕벚기원설이고 두 번째는 이즈반도에서의 자연발생설이다. 세 번째는 독립종설이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서에서 실제 교배실험을 통하여 일본 왕벚나무는 올벚나무와 왜벚나무의 수정으로 탄생한 교잡종임을 1965년에 밝혀 첫 번째와 세 번째 설은 그 근거를 많이 상실하였다. 아마 일본에서 유전학자들이 실제 교배실험을 한 것은 1962년 박만규박사가 제주도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확인한 것에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벚나무는 일본 이즈제도의 섬인 오시마에서만 자생하기 때문이다. 그런 왜벚나무가 분포하지 않는 제주도에서 발견된 제주왕벚과는 동일 혈통일 가능성이 배제되어 결국 제주도 원산설을 부정한 셈이다.
문제는 두 번째 설이다. 그러니까 자연교잡종이냐 아니면 인위적인 교잡종이냐 하는 문제인데 답을 쉽게 얻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서 1995년에 유전자 지문분석으로 일본 왕벚나무가 올벚나무와 왜벚나무의 교잡종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 외에도 모든 왕벚나무는 하나의 개체에서 출발한 100% 복제나무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혀 낸다. 즉 접목이나 삽목에 의한 무성생식으로만 번식되었다는 것이다. 왕벚나무는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 특성을 가지고 있어 비록 양성화이기는 하지만 같은 꽃뿐만 아니라 같은 왕벚나무간의 수정도 거부하여 간혹 결실을 하더라도 금새 낙과하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벚나무는 종자번식이 불가능하며 삽목도 성공률이 낮아서 거의 접목으로만 번식이 이루어지므로 우리나라 유통시장에서도 실제 묘목의 단가가 벚나무나 개벚나무 등보다 몇 배나 비싼 것이다. 가끔 왕벚나무 종자를 발아시켜 번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순수 왕벚나무가 아니라 주변의 다른 벚나무 수종과의 교잡이 이루어 진 교잡종이므로 완전한 왕벚나무의 특성이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당시 일본 연구진이 수많은 소메이요시노 개체의 DNA지문을 검사한 결과 모두가 하나의 개체에서 출발하여 번식된 클론(clone)임을 확인 한 것이다.
왕벚나무가 자연교잡종이라면 부모종의 분포지가 겹치는 이즈제도 인근 이즈반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이즈반도 자연발생설이 제기된 것이다. 쓰쿠바대학 이와사키 후미오(岩崎文雄)박사는 이즈반도에 두 종이 분포하기는 하지만 왜벚나무와 올벚나무의 분포지역이 달라서 자연교잡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에도(동경) 소메이마을에서 1720년과 1735년 사이에 인공 교배를 통하여 탄생한 교잡종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하지만 이즈반도 후나하라언덕(船原峠)에서 왜벚나무와 올벚나무의 교잡종으로 추정되는 후나하라요시노(船原吉野)라는 교잡종이 1959년 다케나카 요(竹中要)박사에 의하여 발견되어 소메이요시노의 이즈반도 자연교잡설의 가능성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편 일본 삼림총합연구소의 토시오 카츠기(勝木俊雄)박사는 일본 왕벚나무의 한 부모는 올벚나무이지만 다른 한 부모는 왜벚나무와 벚나무의 교잡종일 것이라는 복합교잡설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민가 주변에 흔한 교잡 원예품종과 올벚나무의 교잡으로 탄생한 것이므로 자연교잡보다는 인위적인 교잡설에 무게를 실었다. 이 주장은 2017년 일본 삼림총합연구소와 기후대학의 공동연구를 통해 왕벚나무는 1회 종간교잡에 의한 잡종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교잡에서 유래했다는 설의 발표로 이어졌다. 여하튼 일본의 소메이요시노 즉 왕벚나무는 처음 하나의 개체에서 계속 복제되어 오고 있지만 그 시초의 개체가 언제 어떻게 탄생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왕벚나무 원산지 규명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한일 학자들간의 왕벚나무 원산지 연구가 시작된다. 먼저 2001년 우리나라 임업연구원의 한 연구자가 DNA 분석을 통해 일본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다소 뜬금없는(?) 주장을 한다. 그 후 김승철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교수팀은 제주 왕벚나무가 제주에서 자생하는 올벚나무를 모계로 벚나무 또는 산벚나무를 부계로 형성된 자연교잡종이라는 연구결과를 2014년 미국 식물학회지에 기고한다. 김승철교수는 제주 왕벚나무의 혈통을 밝힌 것이지 일본 왕벚나무의 혈통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제주왕벚나무의 유전다양성이 풍부하여 일본 소메이요시노를 포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 두었다. 그 해 1월 일본에서는 동경도립대학 연구자들이 DNA 핑거프린트법보다 정밀도가 높은 핵SSR(Simple Sequence Repeat)법을 이용한 DNA 해석법에 의해 일본 왕벚나무의 교잡 비율이 올벚나무 47%, 왜벚나무 37% 벚나무 11% 기타 5%임을 보여주어 토시오 카츠기(勝木俊雄)박사의 복합교잡설 즉 올벚나무 x (왜벚나무 x 벚나무)설을 뒷받침 했다.
이 와중에 2015년 3월 허쭝루(何宗儒) 중국 벚꽃 산업협회 집행주석이라는 사람이 한일 양측은 모두 원산지를 논할 자격이 없다면서 많은 사료는 벚꽃의 발원지가 중국이란 사실을 증명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한일 학자들간의 원산지 논쟁에 끼어들려고 했다. 아마 중국 산동성에서 왕벚나무와 유사한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7년 1월 일본 삼림총합연구소와 오카야마(岡山)이과대학의 공동연구를 통해 제주 왕벚나무는 올벚나무와 산벚나무의 교잡종이므로 일본 왕벚나무와는 혈통이 다르다는 것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도 국립수목원의 지원 아래 명지대와 가천대 연구자가 참여해 왕벚나무의 전체 유전체(게놈)를 해독한 연구 결과를 2018년 9월 발표하였다. 그 발표에 의하면 제주의 왕벚나무와 인접 종은 물론 일본에서 최초로 왕벚나무가 기록된 도쿄대 부속 식물원 즉 고이시카와 식물원의 왕벚나무 표본을 확보해 완전한 유전체를 비교한 결과 제주 왕벚나무와 일본 왕벚나무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서로 다른 식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연구과정에서 관음사 주변에서 자생하는 밑둘레 3.45m인 거목으로서 제주왕벚나무의 어미나무로 지정된 수령 약 150년 된 개체의 유전자가 일본 왕벚나무와 동일하다는 결과가 나와서 놀라게 한다. 학계에서는 그 나무는 재배종인 일본 왕벚나무가 어떤 연유로 탈출하여 제주도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얼버무리고 만다. 뒤이어 일본에서도 2019년 4월 가즈사(上総) DNA연구소와 시마네(島根)대학, 교토부립(京都府立)대학이 공동으로 왕벚나무 게놈 정보(전체 유전체) 해독을 완료했다고 발표하면서 통설대로 왕벚나무는 올벚나무와 왜벚나무를 조상으로 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들 두 조상은 552만 년 전에 다른 종으로 나뉘어졌고 백수 십 년 전에 교잡으로 왕벚나무가 탄생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한일 학자들의 유전자분석에 의한 여러 차례의 연구 결과 일본 소메이요시노와 우리 제주왕벚나무는 유사한 교잡종이기는 하지만 제주왕벚나무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올벚나무 x 벚나무 또는 올벚나무 x 산벚나무의 자연교잡종이며 일본 소메이요시노 즉 왕벚나무는 올벚나무 x 왜벚나무 또는 올벚나무 x (왜벚나무 x 벚나무)간의 인위적인 교잡종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종 결론이다. 겉으로는 떠들썩 하였지만 먼저 일본 왕벚의 제주도 기원설을 제기한 것도 일본 학자이고 그 검증하는 과정에서 한일 학자들간의 실질적인 큰 의견 대립이나 충돌은 없었다. 단지 제주도에서 발견된 민벚나무(P. × nudiflora)와 일본 소메이요시노(P. × yedoensis)는 처음부터 다른 식물이었는데 초창기 이를 동일종이라고 판단했던 것에서부터 오해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국립수목원의 2018년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2020년부터 기존에 자생식물로 분류하였던 왕벚나무를 둘로 나눠 왕벚나무는 재배식물로 재분류하고 제주왕벚나무(민벚나무)를 자생식물로 추가한 것이다.
제주왕벚나무 보급 운동
이렇게 되자 또 다시 일본 왕벚나무를 걷어내고 제주왕벚나무로 교체하자는 운동이 국내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다. 제주왕벚나무가 발견된 지가 114년이나 되었는데 그동안 보급운동은커녕 제대로 소개도 안 하던 사람들이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일본 왕벚나무를 베어내고 제주왕벚나무를 심겠다고 나선 것을 보니 안타깝다. 제주왕벚나무의 보급을 장려하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멀쩡하게 잘 심어져 있는 왕벚나무를 제거하자고 선동한다면 정말 찬성하기 어렵다. 그리고 제주왕벚나무가 정말 일본 왕벚나무를 대체할 만큼 충분한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아직은 미지수 아닌가 한다. 미국과 일본의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들어난 속 좁은 일본사람들과 같은 행동은 제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밉다고 그 나라에서 온 식물을 학대하는 것은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할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
과거 노일전쟁 후인 1905년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러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고마움의 표시로 일본 동경시가 1912년에 미국 워싱턴 DC에 왕벚나무 등 6,000그루를 보낸다. 그 때 보낸 벚나무 중 약 절반을 포토맥강변에 심었는데 잘 자라서 지금은 고목이 되어 해마다 개최되는 벚꽃축제에서 그 아름다움을 뽐내며 미일간 우호를 상징하고 있다. 그 때 미국에서 답례로 1915년에 동경에 보낸 나무가 바로 꽃산딸나무 60그루였다. 동양에 최초로 온 꽃산딸나무 60그루를 식물원이나 공원 등지에 심었다가 나중에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적국인 미국에서 온 나무라고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훼손해 버린다. 그래서 전후에 찾아보니 동경원예고등학교에 심어진 단 한 그루만 남아 벚나무 대부분이 살아 있는 미국과 대조를 보였다. 이게 소국과 대국의 차이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래서 미국에서 벚나무를 받은 100주년 기념으로 2012년에 다시 꽃산딸나무 묘목 3,000주를 일본으로 보냈다.
2020년 왕벚나무를 둘로 분리할 때 왜 왕벚나무라는 명칭을 일본 소메이요시노에 양보하고 자생종에게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느냐고 국립수목원에 항의하는 사태가 현재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왕벚나무라는 이름은 일본 원산 소메이요시노를 일본에서는 왕자쿠라라고 하지 않는데 우리나라에서 꽃이 크고 풍성하게 핀다고 붙인 이름이다. 과거에 일본 원산과 우리 자생종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왕벚나무라고 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최근에 둘을 분리하면서 그 이름을 일본 원산에다가 그대로 유지시키고 우리 자생종은 새로운 제주왕벚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 화근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식물이름에 왕이 들어간 것이 왕버들 왕머루 왕보리수나무 왕괴불나무 대왕참나무 왕고들빼기 왕원추리 등 약 100종이나 된다. 식물학계에서는 별 생각 없이 단지 크다고 붙인 이름이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최고의 벚나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워낙 그 벚나무가 그런 칭호를 받을 만하기에 더더욱 그렇게 오해하게 된다. 국생정 도감에 의하면 비록 꽃의 지름은 제주왕벚나무가 3cm로 일본 왕벚나무 3.8cm에 비하여 다소 작지만 그래도 그동안 같이 왕벚나무로 불려왔고 또한 우리 자생종은 자생지가 확인된 교잡종이지만 일본 왕벚나무는 아직 그 출처가 불투명한 근본이 없는 상태이므로 굳이 일본 원산에다가 왕벚나무라는 명칭을 고스란히 줄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는 하다. 그러나 자생지 제주도에서 그동안 가로수로 심었던 왕벚나무도 대부분 일본 원산인 것이 현실이며 국립수목원에서는 왕벚나무라고 하면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일본산을 지칭해 왔으므로 이제 와서 제주 원산에다 붙이면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는 변이다. 그렇게 자생종에다가 왕벚나무를 붙이면 현장에서는 시기를 따져서 구왕벚나무와 신왕벚나무로 구분하여 불러야 될 지 모른다. 그래서 국립수목원의 해명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신중하게 명칭를 정했어도 이런 항의에 직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일본 소메이요시노에는 그냥 왕벚나무가 아니라 일본왕벚나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생 왕벚나무 심기 운동도 저절로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에서 원산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메이요시노 즉 왕벚나무의 특징
다시 일본 왕벚나무 즉 소메이요시노로 되돌아가서 소메이요시노는 일본에서 여러 차례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단 한 번의 우연한 교잡에서 얻어진 품종이 아니라 여러 번의 교잡 과정을 거쳐서 개발된 품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 부모종이라는 올벚나무와 왜벚나무(오시마벚나무)의 장점만 가지고 태어난 품종 같다. 그래서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열광하는 것이다. 우선 가장 중요한 장점인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핀다는 점인데 이런 특성은 대개 이른 봄 아직 겨울 추위가 다 가기도 전에 꽃을 피우는 수종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라서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올벚나무가 거의 유일하다. 일본에서는 후지벚나무와 춘추벚나무 그리고 대만벚나무 등이 그런 특징을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대중적이지는 않다. 왕벚나무는 그렇게 일찍 개화하는 편은 아니지만 모계 혈통인 올벚나무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서 잎보다 꽃이 먼저 피며 꽃이 거의 질 때까지 잎이 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반면에 꽃의 크기는 부계 혈통인 왜벚나무를 닮아서 지름 3~3.8cm로 올벚나무의 2cm에 비하면 많이 크다. 그리고 하나의 꽃차례에 많은 송이의 꽃이 풍성하게 피는 것은 올벚나무의 영향이며 잎뒷면과 잎자루 그리고 꽃자루와 꽃받침 및 암술대 기부에 털이 많으며 화서축이 거의 없는 것도 올벚나무를 닮았다.
그리고 잘 자라는 왕성한 생명력과 어린 나이에 꽃이 피는 특성은 과거 일본에서 너무 잘 자라서 숯을 생산하는 땔감으로 썼던 왜벚나무에서 온 특성이다. 다만 올벚나무는 벚나무 중에서 가장 수명이 길고 왜벚나무도 일본에 800년 된 고목이 있을 정도로 수명이 결코 짧지 않는데 왜 왕벚나무의 수명은 그렇게 짧은지 의문이다. 우리나라 제주왕벚나무는 수령 270년 된 고목도 있다는데 일본 왕벚나무는 후쿠시마현 가이세이야마(開成山)공원에 1873년에 심어진 나무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었다는데 그 나이가 겨우 150년 정도라고 한다. 일본 왕벚나무의 자체의 등장 시기가 1720년과 1735년 사이로 추정된다니까 아직 수명을 논하기는 이르기는 하지만 여하튼 가로수로 심어진 경우 20~30년 후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그 이후는 노쇠가 시작되어 60년을 채우기 어렵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공해나 아스팔트 포장 등 환경 때문이라는 설과 너무 성장이 빠르기 때문에 노쇠도 빠르다는 설 등이 있지만 아직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왕벚나무의 꽃받침통은 항아리형인 올벚나무와 가느다란 관모양인 왜벚나무의 중간쯤 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왕벚나무의 개화기간이 짧은 것으로 느껴지는데 결코 벚나무 등과 비교하여도 짧지 않고 오히려 더 길다고 한다. 그럼에도 짧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가 단일 개체로부터 복제된 클론이므로 유전적으로 동일하여 같은 지역에서는 일제히 꽃이 피고 일제히 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벚나무는 자가수분이 어려워 종자번식이 불가능 하다. 결실 발아가 되는 경우는 인근 타 벚나무 수종들과의 교잡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왕벚나무의 원예품종
왕벚나무의 학명을 편의상 Prunus × yedoensis Matsum.이라고 표기하지만 이는 넓은 의미로 올벚나무와 왜벚나무의 교잡종을 총칭하는 학명이므로 좁은 의미로 특정 교잡종인 소메이요시노를 정확하게 지칭하려면 Prunus × yedoensis ‘Somei-yoshino’라고 표기도 한다. 왜냐하면 왕벚나무에도 원예품종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일본 유전학연구서의 식물유전학자인 다케나카 요(竹中要)박사가 교배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여 1957년에 ‘미카도요시노(ミカドヨシノ, 御帝吉野)’라는 품종도 있고 이즈반도 후나하라언덕(船原峠)에서 다케나카 요(竹中要)박사에 의하여 1959년에 발견된 올벚나무와 왜벚나무의 자연교잡종으로 추정되는 ‘후나하라요시노(船原吉野)’라는 품종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등록된 왕벚나무 '모이르헤이미'라는 품종도 있고 워싱턴 DC.에 심어진 벚나무숲의 3%를 점유하는 ‘아케보노’라는 품종도 있다. 1969년 영국에서 이름이 붙여진 'Pink Shell'과 'Ivensii'이라는 품종도 있으며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Perpendens’라는 품종도 있다.
세계 최고의 정원수 왕벚나무
이제 왕벚나무의 인기에 대하여 파악해 보자. 우선 우리나라는 여의도와 진해의 벚나무는 거의 모두 즉 90% 이상이 일본산 왕벚나무이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고 심지어는 제주도의 가로수도 거의 모두 일본산 왕벚나무라고 한다. 그러니 전국의 공원이나 강변 개천가 및 호숫가 등에 관상용으로 심어진 나무는 당연히 왕벚나무라야 맞다. 비용을 들여서 벚나무나 개벚나무(분홍벚나무와 잔털벚나무를 통합한 개념)를 심는 사람이 없는 것이 정상인데 어떻게 분당 중앙공원 일대에는 왕벚나무가 겨우 52%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예산 몇 푼 아끼자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 여기저기 신도시 조성으로 갑자기 수요가 급증하여 묘목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겹벚꽃 품종들의 공급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붉은색 꽃이 피는 수종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지만 여전히 왕벚나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초기에는 일본사람들이 심은 일본 벚나무라고 눈치를 보면서 심다가 나중에 우리나라 자생종이라고 하는 바람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너도나도 심었던 것이다. 그래서 벚꽃 명소의 왕벚나무의 점유율이 90%를 넘으며 심지어는 진해 여좌천의 경우는 100%가 왕벚나무라고 한다. 이런 사례는 일본에도 없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1910년 독일에서 처음 도입한 서양에서도 왕벚나무의 인기는 매우 높다. 어느 누가 선정하여도 세계 10대 관상용 수종에는 반드시 왕벚나무가 들어간다. 워싱턴 DC의 벚나무숲을 조성하는 3,800그루 벚나무 중에 왕벚나무가 70%이고 왕벚나무의 원예품종인 아케보노가 3%로 모두 73%나 된다. 그런데 서양 정원에는 너무 덩치가 큰 왕벚나무가 부담스러워 사이즈가 적당한 겹벚꽃 원예품종인 칸잔의 인기가 지역에 따라서는 왕벚나무를 능가한다니 놀랍다. 칸잔은 앞 1829번 게시글에서 다룬 바 있는데 이 품종은 워싱턴 벚나무의 13%를 차지하여 왕벚나무 다음으로 숫자가 많다.
일본인들에게 왕벚나무란?
그리고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왕벚나무를 무척 사랑하며 꽃이 일제히 피고 일제히 지는 특성이 일본 국민성과도 부합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 일본의 가장 유명한 벚나무 명소인 나라현 요시노야마(吉野山)에는 3만 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 있지만 왕벚나무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일본인들이 야마자쿠라라고 부르는 벚나무라고 한다. 물론 왕벚나무가 탄생하기도 전부터 사쿠라숲이 조성되었지만 추가할 공간이 없어서 왕벚나무를 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벚나무의 운치가 왕벚나무보다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왕벚나무는 하나의 개체에서 복제된 클론이므로 모든 특성이 같다. 그래서 같은 장소에서는 개화시기가 동일하여 동시에 피었다가 동시에 지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반면에 벚나무는 각 개체마다 고유의 유전적 특성이 있어 꽃 모습이나 색상 그리고 개화시기 등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오랫동안 벚꽃을 은근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을 내세운다. 그래서 실제로 요시노산에는 고도에 따라 개화시기가 다르므로 옛날부터 벚나무군락을 하천본(下千本) 중천본(中千本) 상천본(上千本) 오천본(奧千本)이라며 구분하여 부른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왕벚나무가 1700년대 초반에 등장하여 그 화려한 꽃모습으로 단번에 세인들의 눈길은 끌었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벚나무들을 베어내고 왕벚나무로 교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으로 사회적인 격변기를 맞이하여 영주들의 대정원이 붕괴되면서 기존 나무들이 벌채 등으로 마구 파괴되었는데 그 자리를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은 왕벚나무 일색으로 채워지게 된다. 꽃이 아름다운 데다가 성장이 빠르고 개화적령이 낮기 때문에 급속하게 정원을 복구하기에는 더 이상 적합한 나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사찰이나 신사의 기존 벚나무들도 수난을 당한 뒤 왕벚나무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에도 말기에 일본에는 무려 300종의 벚나무 원예품종들이 있었다는데 이들 모두가 벌채 또는 교체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뜻있는 자들이나 벚나무애호가들은 수많은 품종들이 멸종위기를 맞고 그 대신에 왕벚나무 일색으로 심어지는 것을 무척 우려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바로 그 때 아라강변 어느 마을의 이장이던 시미즈켄고(清水謙吾)라는 사람이 나서서 멸종 위기를 맞은 벚나무 품종들을 거둬가 동경 아라강변(荒川辺)에 심어 오색 벚나무숲을 조성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수많은 소중한 벚나무 품종들을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라강(荒川)의 하류가 분리되어 벚나무가 심어진 지역은 스미다강(隅田川)으로 불리는데 그때 그 강변에 심어진 오색벚꽃에 1884년 미국에서 여행 온 한 여성이 매료되어 훗날 워싱턴 DC 포토맥강변의 벚나무숲이 조성되는 계기가 된다. 그 여성은 미국 언론인이자 여행작가이며 지리학자인 Eliza Ruhamah Scidmore(1856~1928)로서 귀국 후에 포토맥강변에 벚나무숲을 조성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관리들에게 매번 거절당하였는데도 무려 20여 년 동안 끈질기게 노력하여 드디어 미국 제27대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의 부인인 헬렌 테프트여사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한다. 한편 주미 일본대사를 통하여 일본측 동경시장에게 귀띔하여 러일강화조약체결에 미국이 중재한 것에 대한 사례로 벚나무를 보내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워싱턴 DC의 벚나무숲이 조성된 것이다.
불안한 왕벚나무의 미래
그 당시 일본 식자층에서 우려한대로 왕벚나무 일색으로 심어진 집단식재지에서 현재 많은 문제점이 대두되고 있다. 우선 심각한 병충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빗자루병이라고 개화시기에 꽃이 피지 않고 작은 잎이 많이 나오며 가지가 부풀어 팽창하고 가을에 대나무 빗자루 모양의 가지가 많이 나와 마치 까치집 같은 것을 지어 영어로는 Witch's broom 즉 마녀의 빗자루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이를 상상속의 괴물인 덴구(天狗)의 집이라고 부른다. 곰팡이 균에 의하여 발생하는 이 증상은 국내서도 특히 대추나무에 많고 벚나무들 중에서는 유독 왕벚나무에 많다고 한다. 다음은 잔나비불로초 등의 목재부후균류의 번식이다. 초기에는 외부에서 증상을 진단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 발견되면 결국 병든 부위를 잘라내는 수밖에는 없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공원이나 가로수로 심어진 왕벚나무에 이런 증상에 의한 피해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나무는 뿌리 부분이 백색 균사로 덮여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정원수나 마찬가지로 나무에 구멍을 내어 가지를 죽이는 천공충(穿孔蟲)의 피해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유입된 벚나무사향하늘소의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줄기에 구멍을 내고 들어가 알을 낳고 부화시켜 수많은 유충들이 안에서 갉아먹어 줄기를 죽이게 된다. 국내서도 딱지벌레나 복숭아유리나방 등이 그렇게 천공을 만들어 여러 정원수들을 죽이지만 일본의 경우는 새로 유입된 사향하늘소는 아직 천적이 없어서 고생하는 것 같다. 그 밖의 문제점은 도시의 가로수로 심어진 경우 아스팔트 포장으로 빛과 물이 부족하거나 지하 공간이 부족하여 뿌리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여 영양이 부실한 경우가 많아 나무가 쇠약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온난화로 남방한계선이 과거에는 규슈 남쪽 섬인 야쿠시마까지였으나 최근에는 점차 북상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벚나무종류에 비하여 왕벚나무가 유독 약한 이유는 종자번식을 하지 못하고 모두 접목 등에 의한 무성번식만 하므로 환경변화나 병충해에 스스로 대항하려는 내성을 획득하는 것은 애초부터 봉쇄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대개 무리 지어 집단으로 식재되므로 하나의 개체만 감염되어도 급속하게 전체로 확산되는 단점이 있어 특별히 심각하다는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과 같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미 일부에서 유사한 병충해가 발생하고 있어 조만간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일본에서는 공익재단인 일본꽃협회에서 왕벚나무의 대체수종으로 에도히간(エドヒガン, 江戸彼岸) 즉 올벚나무와 타이료자쿠라(タイリョウザクラ, 大漁桜) 진다이아케보노(ジンダイアケボノ, 神代曙) 마이히메(マイヒメ, 舞姫) 하나카가미(ハナカガミ, 華加賀美) 이치요우(イチヨウ, 一葉) 코우카(コウカ, 紅華) 칸잔(カンザン, 関山) 등 8개 품종을 추천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하여는 우리나라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미 유력한 대체수종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우리 토종인 제주왕벚나무이다.
일본에서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소메이요시노 순수혈통의 보존이라고 한다. 종자번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변에 벚나무나 산벚나무 등과의 자연교잡으로 많은 교잡종이 계속 탄생하고 있어 순수혈통이 줄어들게 되는 것을 일본에서는 유전자오염이라고 말하고 우려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의도적으로 왕벚나무 주변 일정거리 이내에는 여타 벚나무들을 심지 않아 순수한 왕벚나무 혈통을 보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마 이미 많이 오염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왕벚나무 묘목을 심어 거의 10년이나 되어서야 꽃을 피웠는데 그것도 꽃이 잎과 동시에 나온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이는 분명 벚나무 등과의 교잡된 잡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왕벚나무는 실생이 없고 접목의 경우는 2~3년이면 개화를 한다. 따라서 왕벚나무 실생 묘목은 원래부터 없는 것이고 삽목이나 접목이라고 하더라도 그 접수나 삽수를 채취한 어미나무가 이미 교잡종이며 순수 왕벚나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국내에 그런 유전자가 오염된 왕벚나무가 많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벚꽃문화는 왕벚나무와 함께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남용익(南龍翼, 1628~1692)선생이 1655년(효종 6년) 6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9개월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기록한 문건별록(聞見別錄) 원림(園林)편을 보면 일본에서 벚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꽃 가운데 우리나라에 없는 것으로는 사꾸라나무(櫻木)가 있으니 그 가지가 간들간들하면서 길고 그 잎이 둥글둥글 하면서 그 꽃은 겹꽃(千葉) 홑꽃(單葉) 두 종류가 있어 크기가 흰 국화만 한데 그 나라에서는 제일품으로 친다는 것이니 곧 기이한 꽃이다.” 이렇듯 조정에 보고하는 문건에 국내에 없는 나무라고 언급한 것으로 봐서는 우리나라에도 벚나무가 여러 종 자생한다고 나중에 알려졌지만 실제로 조선시대 조정 문신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국내 자생종인 개벚나무를 홍양호(洪良浩, 1724~1802)선생이 일본에서 도입하여 우이동계곡에 심었던 것도 국내 자생여부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봄 꽃나무 중에서 벚나무를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무심하던 우리 민족에게 벚꽃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알려준 나무가 바로 일본 원산 소메이요시노 즉 왕벚나무인 것이다. 이제는 버스커 버스커 (Busker Busker)의 벚꽃 엔딩을 비롯하여 수많은 벚꽃 관련 노래가 나오고 무수한 화가들이 벚꽃을 그리며 벚꽃이 휘날리는 장면이 담긴 영화도 수도 없이 많다. 지금의 벚꽃문화는 우리 역사상 그 어느 때의 꽃문화보다 왕성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왕벚나무를 우리는 도입초기부터 한동안 사꾸라 또는 사쿠라라고 불렀는데 우리 국어사전에는 사쿠라는 벚나무 외에 다른 뜻도 있다. 즉 “다른 속셈을 가지고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 특히 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을 이른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왕벚나무에 열광할 때는 언제고 왜 사쿠라를 이런 나쁜 말로 쓸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것도 일본을 비하하는 행동의 일종인가? 하지만 그건 전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만든 말이 아니다. 일본 에도시대부터 극장에서 부탁을 받고 배우에게 중간에 말을 걸거나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분위기를 띄우는 대신에 연극을 공짜로 보는 자들을 사쿠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유래는 벚꽃과 같이 화려하게 분위기를 확 띄웠다가 확 사라진다고 그렇게 불렀다는데 다른 설들도 있다. 이 용어는 메이지시대에 널리 퍼졌다는데 노점상 등의 동료로서 손님을 가장하여 물건을 사는 척 하거나 칭찬하여 다른 손님의 구매심을 자극하는 자 또는 그런 행동을 말하기도 한다. 즉 바람잡이나 앞잡이 야바위꾼 등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의미로는 한자로 僞客(위객)이라고 쓰며 영어로 번역할 경우 shill 또는 fake나 fake customer로 쓴다. 우리나라에는 요즘 노점 주변의 바람잡이보다는 인터넷 사이버공간에 매우 다양한 댓글부대가 엄청나게 많은데 이들이 모두가 사쿠라인 것이다.
등록명 : 왕벚나무
희망명 : 일본왕벚나무
학 명 : Prunus × yedoensis Matsum.
분 류 : 장미과 벚나속 낙엽 교목
원산지 : 일본에서 발견된 교잡종
부모종 : 왜벚나무(부) 올벚나무(모)
일본명 : 소메이요시노(ソメイヨシノ, 染井吉野)
중국명 : 동경앵화(东京樱花)
영어명 : Yoshino Cherry
수 고 : 4~16m
수 피 : 회색, 가로피목
가 지 : 소지 담자갈색, 무모, 눈지 피목 녹색, 유모
동 아 : 난원형, 12~16인편, 연모
엽 편 : 타원란형, 도란형
잎크기 : 5~12 x 2.5~7cm
잎모양 : 선단점첨, 급미첨, 기부 원형 희설형
잎거치 : 첨예중거치, 치단점첨, 소선체
잎색상 : 상면 심록색, 무모, 하면 담록색, 연맥유모
잎 맥 : 측맥 7~10대
잎자루 : 1.3~1.5cm, 유모, 정단 1~2개 선체 혹 무선체
탁 엽 : 피침형, 우열선치, 유모, 조락
화 서 : 산형총상, 3~5송이 선엽개방
화서축 : 극단
꽃크기 : 지름 3~3.8cm
총포편 : 갈색, 타원란형, 6~7 x 4~5mm, 양면 유모
포 편 : 살색, 숟갈상 장원형, 5 x 2~3mm, 변 선체
꽃자루 : 2~2.5cm, 단유모
악 통 : 통상항아리형, 7~8 x 3mm, 소유모
악 편 : 3각상장란형, 5mm, 선단점첨, 변 선치
꽃부리 : 백색, 분홍색, 타원란형, 선단 오목, 선연 2렬
수 술 : 32매, 꽃잎보다 짧음
암술대 : 기부 유모, 수술과 같은 길이
열 매 : 핵과 근구형, 지름 7~10mm, 흑색, 핵표면 구릉문, 시고 쓴 맛
개화기 : 4월
결실기 : 6월
특 징 : 자가불화합성
염색체 : 2n=16
내한성 : 영하 29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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