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인문학(人文學) 광장/낙은재 세상이야기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어원을 찾아서

낙은재 2026. 7. 14. 08:50

서성 왕희지와 난정집서

 

 


중국 역사상 서예(書藝) 즉 글씨를 가장 잘 써 서성(書聖)으로 불린다는 동진(東晉)의 문인 왕희지(王羲之, 303~361)가 서기 353년 봄맞이 행사로 자기가 태수로 있던 회계군(會稽郡, 현재 소흥) 난정(蘭亭)에 42명의 문인들과 함께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를 열면서 모두 27명이 쓴 37편의 시를 모아 편찬하면서 그 서문으로 쓴 난정집서(蘭亭集序)가 역대 서예 작품 중 최고의 걸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원본은 오래전에 소실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왕희지의 열렬한 팬이었던 당태종 이세민이 죽으면서 자기 무덤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28행에 행서 또는 반초서 324자로 구성된 난정집서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여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높이 평가된다. 여하튼 다소 난해한 그 난정집서의 말미에 後之攬者(후지람자) 亦將有感於斯文(역장유감어사문)이란 문구가 있다. 해석하자면 ‘후세의 독자들도 이번 집회의 시문에 대해 감개무량할 것입니다.’이다. 여기서 攬(람)은 원래 람(覽)으로 써야 하지만 왕희지의 증조부(曾祖父)의 이름이 왕람(王覽)이기에 쓰지 못하고 攬(람)으로 바꿔 쓴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 문구의 맨 마지막 두 글자 사문(斯文)을 보자 불현듯 조선 후기 선비들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무시무시한 용어인 사문난적(斯文亂賊)이 생각났다. 국어사전에서 사문난적은 성리학(性理學)에서 교리(敎理)를 어지럽히고 사상(思想)에 어긋나는 언행(言行)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사문(斯文)은 이 학문, 이 도(道)라는 뜻으로 유학의 도의나 문화를 이르는 말이거나 유학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희지가 쓴 난정서 말미의 사문(斯文)은 그냥 이 문서 즉 영어로 한다면 this literature가 되어 우리 국어사전 풀이와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사문(斯文)을 오늘의 화두(話頭)로 삼는다. 

사문(斯文)이 원래 한자 지시대명사 이(것)를 뜻하는 斯와 글이나 문장 또는 학문을 뜻하는 文의 합성어이므로 이 글이나 이 문장 또는 이 학문이 된다. 하지만 공자가 논어에서 斯文을 예악전통문명이라는 의미로 예악의 교화나 전장제도(典章制度)를 말하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인문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후 사문(斯文)은 점차 문화나 문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들이 보여주는 교양이나 태도를 묘사함으로써 온화하고 우아함을 의미하는 말로 변천한다.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는 사문(斯文)을 매우 교양 있고 예의 바르고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하는 형용사로 주로 쓰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사문(斯文)의 영역을 refined、educate、cultured、intellectual、polite、gentle 등으로 한다.

그 원래 출처인 논어 자한(子罕)편 5장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내용을 살펴보면 공자는 성인으로서 나름대로 확실한 소명의식(召命意識)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子畏於匡(자외어광). 曰(왈) 
文王旣沒(문왕지몰) 
文不在玆乎(문부재자호) 
天之將喪斯文也(천지장상사문야)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후사자부득여어사문야) 
天之未喪斯文也(천지미상사문야)
匡人其如予何(광인기여여하)

공자께서 광 땅에서 곤경에 처하자 말씀하셨다.
문 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도(문화)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하늘이 장차 도를 버리려 하셨다면 
나중에 죽을 내가 도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늘이 도를 아직 버리지 않으셨는데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의미가 그렇게 형용사로까지 변천하지는 않고 그저 공자가 했던 학문 즉 유학(儒學)이나 유가문화(儒家文化) 또는 유생(儒生)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 문헌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런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다른 나라에는 없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 후기 당파 싸움꾼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처음 쓴 말이다. 서인인 송시열이 젊은 시절 친구인 남인의 윤휴(尹鑴, 1617~1680)를 제거하기 위하여 만든 명분인 것이다. 사문(斯文)은 유학을 말하고 난적(亂賊)은 나라를 어지럽게 한 도적이라는 말인데 맹자에 나오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이라는 뜻인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줄임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윤휴는 송나라 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해석에서 벗어나 유교 경전의 독자적인 해석을 추구한 자로서 평소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겠는가? 하면서 중용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중용독해(中庸讀解) 등을 저술하게 된다, 그러자 주자의 절대 신봉자인 송시열이 주자의 서술에서 1자 1획을 더하고 빼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비난한다. 그러다가 서인이 승리한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결국 송시열은 윤휴를 죽이고 만다. 실제로 우리 실록 등에 송시열이 윤휴를 鑴是斯文之亂賊(휴시사문지난적)이라고 말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하지만 송시열 자신도 1689년 남인이 승리한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그러다가 1694년 다시 서인이 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에서 남인은 중앙 정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조선말기까지 우리나라는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이 집권하게 된다. 특히 송시열의 제자들로 구성된 강경파 노론이 장기 집권하면서 그를 정치적인 복권 정도가 아니라 조선의 성인인 송자(宋子)라고 부르며 문묘에도 배향하였지만 그의 라이벌인 윤휴(尹鑴)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인물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조선말까지 노론 집안의 이완용 등이 집권하였기 때문이며 근대 식민사관 대표적인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 또한 노론 집안 출신들이기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여하튼 조선시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피해를 받은 선비들은 윤휴 외에도 많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소론임에도 불구하고 송시열과 주자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귀양을 갔다. 병자호란 당시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의 대표격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도 명분뿐인 성리학보다는 실용적인 양명학을 중시했다고 사문난적으로 비난받았으며 윤휴의 사상을 이어받은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李瀷, 1681~1763)도 정계 진출은 못하고 학문에만 힘써 성호학파를 만들어 훗날 조선의 위대한 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으로 그 맥을 이어가게 했다. 다산은 노골적으로 주자의 해석에 의심을 품고 초창기 공자 맹자의 해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방대한 주석서를 써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이로 인한 박해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사학(邪學)인 서학(西學)을 믿었다는 이유로 결국 18년이라는 기나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모든 정보가 투명해 보이는 오늘날에도 사문난적은 여전히 존재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언급하면 역사학계에서 사문난적으로 몰린다.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최근에 부정선거를 말하면 정치판에서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것 같다.   

 

난정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