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서 관련 역사 기록을 찾아 본다. 조선후기 홍문관교리를 역임한 임천상(任天常, 1754~1822)이 편찬한 해동명신지장집략(海東名臣誌狀輯略)의 장릉조제신(莊陵朝諸臣) 영월부호장증공조참판(寧越府戶長贈工曹參判) 엄흥도(嚴興道)편에 실린 내용이다. 참고로 장릉지(莊陵誌)는 조선전기 제6대 왕 단종의 왕위 피탈 후에 전개된 상황을 단종 측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서이다.
謹按《莊陵誌》, 端宗以上王居別宮, 六臣事發, 鄭麟趾上疏以爲: “曩者成三問之謀, 上王實預知, 得罪宗社, 不可享有位號。 請早爲之所, 以防後患。” 俄而遷于寧越, 尋害之。 戶長嚴興道往來獄街哭泣, 具棺葬之。 嗚呼! 自古忠節之士, 不但出於世胄華族。 當是時, 販君規利, 必致其君於淫禍, 然後快於心者, 其視嚴戶長, 爲如何哉?
장릉지에 따르면, 단종이 별궁에 기거하고 있을 때 여섯 신하의 난이 발각되었다고 한다. 정인지는 상소를 올려 "죽은 성삼문의 모의는 사실 상왕이 미리 알고 있었기에 조상 사당을 모독했으니 어떤 위호도 누릴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빠른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 직후 단종은 영월로 이송되어 결국 살해되었다. 호장 엄흥도는 감옥 앞에서 통곡하고 관을 준비하여 장례를 치렀다. 오호! 예로부터 충절지사는 명문 귀족가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임금을 팔아 권력을 취하고 결국 군주를 방탕과 파멸로 몰아넣어야 만족을 느꼈던 자들이 어찌 엄흥도를 생각했겠는가?
嚴戶長興道, 家世寧越人。 爲府吏, 以文無害, 至首吏戶長。 景泰七年丙子, 端宗遜于寧越, 居客舍東軒。 明年, 禁府都事王邦衍奉賜藥到府, 踧蹴不敢入, 從吏頓足促之, 乃入伏庭中。 端宗具翼善冠、衮龍袍, 出御堂上, 問所以來, 都事不敢言, 有一貢生請自當之, 以弓弦縊而弑之。 貢生, 吏目也。 是日, 雷雨大作, 烈風拔木, 黑霧彌空。 其貢生未出客舍門, 血流九竅斃, 侍女從人爭投郡之東江, 浮屍滿江。 端宗旣遇害, 暴之獄街, 邑宰以下皆㥘於淫禍, 亡敢收斂者。 嚴戶長獨臨街痛哭, 取平日所御衣衾, 具襲斂入棺, 往來號泣, 道路觀者莫不感動。 其家人懼有禍, 止之, 乃曰: “爲善被禍, 吾所甘心。” 翌日, 率吏民同志者奉葬于郡北冬乙音.
영월 출신 엄흥도는 현에서 아전이 되어 능력과 성품으로 승진을 거듭하여 수석 호장이 되었다. 경태 7년(1456년) 단종이 상왕에서 물러나 영월로 내려와 객사 동헌에 머물게 되었다. 이듬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현에 도착했다. 그는 주저하며 감히 들어가기를 망설였지만 시종들의 재촉에 못 이겨 안으로 들어가 마당에 엎드렸다.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단종이 당상으로 나와 왕방연에게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다. 금부도사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지만 한 하급 관리인 공생이 스스로 나서서 단종을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 그러자 갑자기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강풍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렸으며 검은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다. 단종을 시해한 그 공생이 객사 문을 나서기도 전에 아홉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었다. 단종의 시녀들과 하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현의 동강에 몸을 던져 강을 시체로 가득 채웠다. 단종이 살해된 후 그의 시신은 감옥 앞에 버려졌지만 후환이 두려워 고을 원 이하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오직 호장 엄흥도만이 홀로 거리에서 통곡했다. 그는 단종이 평소 입던 옷가지를 가져와 염습한 후 시신을 관에 넣고는 오열하며 거리 오갔다.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동하게 만들었다. 그의 가족들은 불행이 닥칠까 두려워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선행을 베풀다가 불행을 겪는 것이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그는 관리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그를 현 북쪽의 동을음에 묻었다.
戶長死後, 葬府南八溪, 子孫皆逃散避禍。 郡男女相傳, 指冬乙音稱魯陵, 爲具祭物, 以時享之, 凡吉凶禍福, 皆就祀。 久猶爲之哀慟, 言被鄭麟趾奸賊輩所激, 致我君不終云。 中宗時, 始官爲致祭。 宣祖十三年, 因監司鄭澈言, 具墓石標之曰魯山墓。 役畢, 督役、諸守皆贊監司建議之美, 伊川守柳認之獨曰: “魯山在雲鄕, 御衮龍袍, 戴平天冠, 高拱寶座, 如三相、六臣輩忠臣義士, 各以其職列侍左右, 奈何立石標刻, 强稱爲魯山墓乎?” 滿座默然。 至肅宗世, 始追封爲陵, 陵號莊陵。 陵傍有六臣祠, 嚴戶長亦配享, 贈工曹佐郞。 英宗時, 命錄用戶長子孫, 遣禮曹郞賜祭, 累贈官至工曹參判。 正宗十五年, 因特敎, 與三相、五宗英、三戚、六臣諸死節人, 竝享于莊陵配食壇。
호장 엄흥도는 죽어 현 남쪽 팔계에 묻혔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재앙을 피해 도망쳤다. 현의 남녀들은 동을음을 모두 노릉이라고 부르며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 제사를 올렸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단종이 간악한 정인지 일당의 모함으로 요절했다고 슬퍼했습니다. 중종 시대에 처음으로 관리가 임명되어 무덤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선조 13년 감찰관 정철의 제안으로 노산묘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공사가 완료되자 감찰관과 지방관들은 모두 정철의 제안을 칭송했다. 이천(강원도)의 태수 유인지가 이렇게 말했다. "노산은 운향에 있으며 곤룡포를 입고 평천관을 쓴 채 좌우에 삼정승 육대신 충신의사들과 함께 높은 옥좌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묘지석을 노산묘라 하겠습니까?"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침묵에 잠겼다. 숙종 재위 시절 노산묘는 장릉이라는 이름으로 승격되었으며 곁에 사육신 사당이 세워지고 엄호장 역시 공조좌랑으로 추증되어 배향되었다. 그 후 영조시대에 와서 공조참판직으로 추증되었고 정조 15년 특별 교지로 3상 5종영 3척 6신 등 충신들과 함께 장릉 배식단에 모셔졌다.
外史氏曰: “均是集賢之士, 而有六臣焉, 有鄭麟趾、申叔舟焉; 均是越中之吏, 而有嚴戶長焉, 有貢生焉, 其所爲相縣若是甚何也? 彼貢生者受陰誅, 血出九竅死, 而戶長贈官至亞卿, 且與六臣配食於陵下, 其義聲香名, 將愈久而愈著。 天之報施, 昭昭不可誣, 斯可以勸後世爲善者矣。”
역사가들을 말한다. 같은 집현전 학자 출신이지만 사육신이 있는 반면에 정인지 신숙주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둘 다 아전 출신이지만 엄호장과 단종을 처결한 공생은 그 결말이 어떠한가? 공생은 은밀히 천벌을 받아 아홉 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지만 호장은 사후에 정승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아 사육신들과 함께 왕릉에 배향되었지 않았는가? 그의 의로움과 명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날 것이다. 하늘의 보상은 분명하고 부정될 수 없다. 이는 후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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