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평의 자랑거리 세미원(洗美苑)에는 자세히 보니 이상한 설치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 의미가 붙투명한 불이문(不二門)이 그렇고 추사(秋史)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데도 거금을 들여 건립하였다는 세한정(歲寒庭)이 그렇다. 게다가 입구에는 두 개의 시비가 있는데 그 또한 심상(尋常)하지는 않다.
그중 하나는 조선 전기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이 26살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후에 지었다는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있는 시조이다.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성진(腥塵)이 잠겼에라.
언제나 남북풍진(南北風塵)을 헤쳐볼가 하노라.
웅장한 기백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이는 아마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하여 한반도를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가는 수도의 젖줄 한강의 수질을 더럽히던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아름다운 연꽃 정원으로 바꾸어 수질과 환경을 개선한 세미원의 설립자인 이훈석(1946~ ) 원장의 초창기 원대한 포부가 보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역모로 처형되기는 했지만 젊은 남이 장군의 기개를 높이 산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또 다른 하나는 남이 시비 바로 옆에 서있는 선조의 의주우음(義州偶吟)이라는 시비인데 이거야 말로 진짜 문제로 보인다. 선조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주(義州)로 피난 가서 통곡하면서 지었다는 한시인데 임진왜란이 마치 전적으로 신하들의 당파싸움 때문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선조의 찌질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근에 조선최악의 왕 5명 중에 선조가 높은 순위에 들어간다는 것을 세미원 건립당시인 2004년에는 예상하지 못하였나 보다. 더구나 역사선생 출신이라는 이훈석 원장이 그랬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선조는 1592년 일본이 침략하기 직전인 1589년부터 정철을 앞 세워 3년 동안 동인(東人) 선비들 무려 1,000여 명을 처형하는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벌였으며 심지어는 전란 중에도 관련자들을 처벌한 집요함을 보인 자이다.
여하튼 이 한시는 한참 후인 인조 때 정사인 승정원일기에 신하들의 상소문에 인용되면서 나오지만 선조 당시의 정사에는 없다. 하지만 의병장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 광해군 시절까지의 전란 상황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야사인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실려 있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主上殿下(주상전하) 久滯天涯(구체천애) 悲感咏詞云(비감영사운)
주상전하께서 먼 변방에 오래 체류하니 비감하여 시를 읊기를
國危蒼黃日(국위창황일)
나라가 위태하여 다급한 날에
誰能郭李忠(수능곽이충)
누가 곽자의와 이광필 같은 충성을 하겠는가
去邠存大計(거빈존대계)
한양을 버린 것은 큰 계책을 위함이니
恢復仗諸公(회복장제공)
회복할 일은 제공들만 믿겠네
痛哭關山月(통곡관산월)
국경 산의 달을 보며 통곡을 하고
傷心鴨水風(상심압수풍)
압록강의 강바람에 상심하도다
朝臣今日後(조신금일후)
조정의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에도
寧復更西東(영부갱서동)
설마 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할 것인가
去邠(거빈)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피난 감
郭李(곽이) 당(唐) 나라를 중흥시킨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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