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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띠 - 과거 소중한 식물이었지만 요즘은 천대받는 모(茅)

낙은재 2021. 6. 28. 16:11

띠 = 모(茅)
띠 = 모(茅)
양지바른 강둑이나 정원의 잔디밭이 띠가 좋아하는 환경이다.

 

 

진달래속을 한창 탐구하던 도중에 뜬금 없이 잠시 짬을 내어 단자엽식물강(单子叶植物纲) 벼목 벼과 띠속으로 분류되는 다년생 초본식물인 띠에 대하여 파악해 본다. 띠는 우리나라 전역의 양지바른 논둑이나 밭둑 그리고 초원에 무리 지어 자란다. 실제로는 그 뿐만 아니라 야산의 비탈이나 도로변 해안가 강둑 등을 가리지 않고 양지바른 곳이면 어디든지 흔하게 자라며 요즘은 골프장은 물론 일반 가정의 정원에서도 잔디에 섞여서 많이 자라고 있는 자생식물이므로 많은 사람이 가까이 접하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띠는 과거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매우 유용하고도 중요한 식물이었다. 비록 열매나 잎을 식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순을 뽑아서 아이들이 간식으로 즐겼고 과거에는 그 줄기와 잎을 볏짚과 같은 용도로 새끼를 꼬거나 밧줄을 만들었고 이엉을 만들어 지붕을 이거나 심지어는 짚신이나 비옷인 도롱이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뿌리를 모근(茅根) 또는 백모근(白茅根)이라며 지혈(止血) 청열(清热) 이뇨(利尿) 등의 약으로 썼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도 모근(茅根)과 모화(茅花) 그리고 모침(茅鍼, 띠의 순)에 대한 약효가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띠의 줄기와 잎을 베어서 가축의 사료나 퇴비로 활용하였음은 물론 불에 잘 타 부싯돌로 불을 붙일 때 불쏘시개로도 사용하는 등 매우 다양하게 이용한 식물이었지만 이제는 이런 용도가 없으니 영락없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잡초로 전락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점차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생명력이 매우 왕성하여 농장이나 잔디밭에 한번 자리를 잡으면 근본적인 퇴치가 어려우므로 오히려 매우 골치 아픈 악명 높은 제거대상 잡초가 된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그토록 소중하게 대접을 받던 식물이 이제는 무관심을 지나 온갖 구박을 받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옛날 우의인 띠 모롱이와 약재로 쓰는 띠의 근경 그리고 어린이 간식용 삐비(우) -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오마이뉴스 

 

 

띠를 한자로는 모()라고 하며 띠로 지붕을 인 집을 모옥(茅屋)이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우리 시골의 허름한 주택인 초가집을 연상시켜 어쩐지 정감이 가는 용어로 느껴진다. 나중인 조선시대에 와서 초가(草家)라는 말이 쓰였으나 그 이전에는 집 건물 자체를 지칭할 때는 가(家)라고는 하지 않고 주로 옥(屋)이라고 썼다. 물론 그 이전에도 두보의 성도 완화계반(浣花溪畔)의 성도초당(成都草堂)의 영향으로 초당(草堂)이라는 말이나 유비의 삼고초려로 유명한 하남성 남양에 있었다는 제갈량의 제갈초려(诸葛草庐) 덕분에 초려(草廬)라는 말도 쓰이기는 하였지만 과거 우리나라 사료에서는 초가집을 주로 모옥(茅屋)이나 초옥(草屋)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초라한 초가집을 모옥(茅屋)이라고 하였으며 아주 작은 집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초가삼간(草家三間)은 극히 최근에 와서 사용되기 시작된 말이고 그 이전에는 일간모옥(一間茅屋) 또는 수간모옥(數間茅屋) 등으로 표현하여 흥부전 같은 문학작품이나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모옥(茅屋)이 가난이나 청빈(淸貧)의 상징으로 쓰인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이다.

 

두보의 성도초당과 제갈공명의 남양 초려 유적지의 현재 모습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21년인 서기 681년에 왕이 성을 새로 쌓으려고 의상대사에게 자문을 구하자 의상이 백성들의 고생을 염려하여 만류하는 대답을 올리는 대목에서 모옥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王欲新京城(왕욕신경성) 問浮屠義相(문부도의상) 對曰(대왈) “雖在草野茅屋(수재초야모옥) 行正道即福業長(행정도즉복업장) 苟爲不然(구위불연) 雖勞人作城(수로인작성) 亦無所益(역무소익).” 王乃止役(왕내지역). 즉 왕이 왕경에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여 승려 의상(義相)에게 물어보니 의상이 대답하였다. “비록 초야의 띠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곧 복업이 길 것이요,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람을 힘들게 하여 성을 만들지라도 이로운 바가 없습니다.” 이에 왕이 공사를 그만두었다. 라는 내용이다. 역시 괜히 의상대사를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높이 칭송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에도 오대산 월정사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此月精寺慈藏初結茅(차월정사자장초결모)라고 기록한다. 풀이하자면 월정사(月精寺)는 자장율사(590~658)가 처음에 띠집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라는 내용이다. 이미 삼국시대에 우리 자생종 띠를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자 모()라고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삼국시대에 초가집을 모두 모옥(茅屋)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處容郎望海寺)조에 통일신라 49대 헌강대왕(재위 876~886)시절 경주에는 동해까지 초옥(草屋)이 하나도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글쎄 그 당시 정말 띠로 이은 집만 모옥(茅屋)이라고 하고 띠 외에 볏짚이나 억새 또는 갈대 등으로 이은 집을 포함할 때는 초옥(草屋)이라고 구분하여 불렀는지 아니면 둘을 구분 없이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국어사전에서는 과거에는 띠로 이은 집을 모옥이라고 하다가 현재는 약간 애매한 입장을 취하지만 중국에서는 모옥(茅屋)을 현재 모초(茅草)와 갈대(芦苇) 그리고 볏짚(稻草) 등으로 지붕을 덮은 허름한 집이라고 풀이를 한다. 그러므로 자재와 무관하게 모옥이나 초옥을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중국의 모옥(좌)과 일본의 모옥(우)

 

그리고 우리나라 사료에는 띠집이나 초가집을 표현할 때 현재 우리는 거의 쓰지 않는 모자(茅茨)라는 말도 모옥이나 초옥만큼이나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구체적인 주택을 지칭할 때라기보다는 검소한 생활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중국의 문헌에서 따온 말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출전은 한비자 오두의 “尧之王天下也(요지왕천하야) 茅茨不翦(모자부전) 采椽不斲(채연불착)”과 사기 태사공자서의 “堂高三尺(당고3척) 土阶三等(토계3등) 모자부전(茅茨不翦) 채연불괄(采椽不刮)”이라는 대목을 너도나도 인용한 것이다. 둘 다 너무 화려하게 집을 높게 짓지 말고 돌계단을 삼가고 흙계단으로 하고 띠지붕이나 서까래(椽)를 너무 지나치게 깎고 다듬지 말고 검소하게 투박한 그대로 집을 지어 지냈던 요임금시대가 태평성대라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여하튼 모자(茅茨)는 원래 모옥과 같은 말이지만 요임금의 土階茅茨(토계모자)라고 모옥(茅屋) 중에서도 제대로 다듬지도 않은 초라한 집을 뜻하는 용어로 인용되어 조선 마지막인 고종시대의 사료에까지 등장한다. 요즘은 이상하게 가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이 더 이상의 미덕이 아닌지 정치인들이 검소하고 청빈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은근히 부를 자랑하는 것 같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띠집을 뜻하는 모옥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료에 꾸준히 등장한다. 조선이 개국하자마자 1392년 대사헌 남재가 올린 상소 중에 다음의 내용이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躬行勤儉(궁행근검) 致治之本也(치치지본야)。 茅茨土階(모자토계) 堯之儉也(요지검야) 菲食惡衣(비식악의) 禹之儉也(우지검야)。풀이하면 몸소 근검(勤儉)함을 실행하는 것은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이다. 띠로 지붕을 이고 흙으로 계단을 만든 것은 요 임금의 검소함이요, 소박한 음식과 허름한 옷은 우 임금의 검소함이다. 조선 초 태조실록 7년 1398년에 命都堂(명도당) 給茅於失火之家有差(급모어실화지가유차)라는 기록이 있다. 즉 왕이 도당(都堂)에 명하여 불이 났던 집에 띠()를 차등이 있게 나눠 주도록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 당시 백성들의 집은 주로 띠로 지붕을 올려 띠가 중요한 건축자재임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 세종조의 무장으로 김종서와 함께 북방 여진의 정복으로 6진을 개척한 경원병마사 이징옥이 세종 11년에 임금에게 올린 사은문에서 五畝山田(오무산전) 可以免飢乏(가이면기핍) 一間茅屋(일간모옥) 足以送光陰(족이송광음)이라고 오무(五畝)의 산전(山田)이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고 일간모옥(一間茅屋)이면 세월을 보내기에 족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랬던 이징옥이 나중에 세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김종서와 가까운 데다가 강직한 그가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란을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후세의 실학자 체제공은 그를 역적이 아닌 충신임을 암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옥이 항상 청빈과 검소한 생활의 상징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연산 12년에 전교하기를 "慶會樓池邊(경회루지변) 作茅屋三間(작모옥삼간) 設籬圍之(설리위지)." 人謂之淫宮(인위지음궁)。즉 "경회루 연못가에 모옥(茅屋) 3칸을 짓고 울타리를 둘러치라."라고 명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음궁(淫宮)이라 불렀다. 모옥도 쓰기 나름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초가집을 많이 봐 왔지만 왜 띠로 지붕을 올린 띠집을 보지 못하였던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우리 국민들은 초가집이라면 모두 볏짚으로 지붕을 인 집을 떠올리게 된다. 그럼 이를 한자어로 표현하려면 볏집을 뜻하는 도초(稻草)나 도갈(稻秸) 또는 고초(藁草) 등을 써서 도옥(稻屋)이나 고옥(藁屋)이라고 하지 않고서 왜 모옥(茅屋)이라고 하는지가 궁금하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볏집으로 지붕을 올린 집은 고옥(藁屋)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띠 외에도 볏짚이나 갈대로 지붕을 올린 집을 모두 초옥(草屋)이라고 하지만 모옥(茅屋)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중국의 초가는 모두 띠로 지붕을 하고 볏짚을 잘 쓰지 않았기 때문에 모옥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띠가 초가의 대표적인 재료로 인식되기 때문에 모두 모옥이라고 하는 것이다. 초창기 상고시대 중국에서는 띠로 지붕을 이었던 것이다. 주변에서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벼가 도입되기 전에는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벼농사가 도입된 역사가 우리나라는 기원 전후 또는 기원전 900여 년이라고 하며 세계에서 벼농사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중국에서도 7,000~10,000년 전쯤으로 잡고 있다. 물론 벼농사가 시작된 이후에는 볏짚을 많이 활용하였겠지만 그 이전 움막생활을 할 때나 벼농사 이후라도 논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매우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이 띠()나 억새로 지붕을 덮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정이다.

 

이거야 말로 일간모옥(一間茅屋)이다.

 

 

그래서 모()라는 식물은 먹는 식물도 아닌데 일찍이 시경(詩經)에 여러 차례 등장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주거 문제 해결에서 이 띠가 차풍당우(遮风挡雨)라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니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을지 상상이 간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인을 형용할 때 손을 희고 부드러운 띠의 싹에다 비유하여 手如柔荑(수여유제) 肤如凝脂(부여응지) 즉 ‘미인의 손은 부드러운 백모의 새싹과 같고 피부는 희고 매끄럽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제(荑)는 곧 백모(白茅)를 말한다. 즉 제(荑)는 띠의 부드러운 싹을 말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시경 정녀(静女) 편에 여인이 정인에게 백모(白茅) 한 다발을 따서 선물하는 내용도 나온다. 시경 이후에도 중국의 유명인사나 시인들의 작품에도 모옥(茅屋)이 많이 등장하는데 주로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상징한다. 그 유명한 제갈량(诸葛亮, 181~234)의 삼고초려도 제갈량 자신은 출사표에서 三顾臣于草庐之中(삼고신우초려지중)이라고 썼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삼고모려(三顾茅庐)라고도 부른다. 동진 말기 시인 도연명(陶渊明, 약365~427)이 안빈락도(安贫乐道)적인 전원생활 정취를 표현한 음주20수(饮酒二十首)라는 시를 쓸 때 기거하였다는 경치가 빼어난 그 가옥도 도연명의 모옥(陶渊明的茅屋)이라고 한다. 도연명 자신도 20수 중 제9수에서 남루모첨하(褴缕茅檐下) 미족위고서(未足为高栖)라고 모()라고 칭했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刘禹锡, 772~842)은 누실명(陋室铭)이라는 전문 81자인 짧은 시에서 사시누실(斯是陋室) 유오덕형(惟吾德馨)이라고 하며 자신의 허름한 집을 남양의 제갈량 모옥(南阳诸葛庐)에 비유하면서 비록 집은 누추하여도 자신의 덕과 인품의 향기로 채우면 족하다는 기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를 후인들은 유우석의 모옥(茅屋)이라며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모옥 중 하나로 꼽는다.

 

삼고초려를 중국에선 삼고모려(三顾茅庐)라고도 부른다.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즐긴 도연명의 모옥(좌)과 유우석의 누추한 모옥(우)

 

 

마지막으로 시기적으로는 유우석의 누실명(陋室铭)보다 앞선 당나라 대시인 두보(杜甫, 712~770)가 쓴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노래하였다는 그 유명한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为秋风所破歌)라는 시를 빼 놓을 수가 없다. 시성 두보는 이 시에서 아예 제목 자체에 모옥(茅屋)이라는 단어를 쓴다. 광풍 같은 세찬 가을 바람이 불어와 초당(草堂)의 지붕을 날려버렸다는 참담한 심경의 이야기이다. 여하튼 이들이 기거하였던 모옥이 과연 모두 띠()로만 지붕을 이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띠 보다 구하기 편리한 벼농사 부산물인 볏짚일 수도 있고 사이즈가 큰 갈대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허름하고 초라하고 소박한 건물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나중에 재료가 바뀌었더라도 그저 오래 전부터 쓰던 굳어진 모옥이라는 용어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 따라서 우리도 모옥(茅屋)이라는 용어에서 굳이 띠를 찾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세찬 가을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 버리는 사천성 성도에 있었다는 두보의 모옥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띠의 정체를 파악해 보자. 띠뿐만 아니라 요즘 원예 조경식물로 인기가 높은 같은 벼과의 팜파스그래스나 사초 및 억새 등도 궁금하고 익숙한 이름인 피와 띠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궁금하다. 외떡잎식물인 벼목 벼과는 무려 740여 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종의 숫자는 11,700여 종에 달하는 매우 방대한 과이다. 이 중 우리나라에 등록된 것만도 71개 속에 131종이나 된다. 이들 중에는 최근에 조경용으로 각광을 받는 앞에서 언급한 원예 식물들이 많으며 심지어는 띠도 자색을 띤 잎을 가진 원예품종도 보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띠속은 전세계에 모두 11종이 분포하는데 속명 Imperata는 이탈리아 식물학자 Domenico Cirillo(1739~1799)가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약재상을 했던 Ferrante Imperato의 이름을 따서 1792년에 명명한 것이다. 띠속의 모식종은 학명 Imperata cylindrica인 중국에서 백모(白茅)라고 하는 다년생 초본이며 우리나라 띠는 이 중국의 백모의 변종으로 분류하여 Imperata cylindrica var. koenigii로 학명 표기한다. 여기서 종소명 cylindrica는 실린더 즉 원통형으로 생겼다는 뜻인데 긴 원통형 꽃차례를 말한다. 그리고 변종명 koenigii는 18세기 네덜란드 식물학자 이름에서 온 것이다. 우리나라 띠도 중국에서 자생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독립된 종으로 분류하고 긴 실같이 생긴 털이 많아서 사모(絲茅)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변종으로 중국에서는 독립된 종으로 분류하지만 최근 국제적으로는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따라서 결국 중국의 모()가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우리의 띠와 동일한 종의 식물이 된 것이다. 

 

털이 있는 것은 우리 자생종 띠 즉 사모(絲茅)이고 없는 것이 중국의 띠 백모(白茅)이다. 백모의 근경이 보다 굵고 튼튼하다.

 

 

띠는 한중일 3국 외에도 주로 기후가 무더운 인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동부가 원산지이지만 왕성한 생명력 때문에 전세계 거의 전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띠는 키가 90cm까지 자라는 다년생 초본으로서 중국에서 초두머리(艹=艸)에 잎의 끝이 마치 창같이 뾰족하게 생겼다고 창을 뜻하는 矛(모)를 붙여서 茅라고 쓰고 矛와 같이 발음한다. 그래서 우리도 모라고 발음하는 것이다. 모는 그 줄기와 잎이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벼와 마찬가지로 새끼를 꼴 수도 있고 이엉을 만들기에도 적당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불에 잘 타는 성질이 있어 불쏘시개로 썼으며 수분을 흡수하지 않고 그냥 흘려 보내 잘 썩지도 않는다. 그래서 원시시대부터 지붕으로 쓰였기에 이런 집을 모옥(茅屋)이라고 하였던 것인데 나중에 볏짚이나 갈대로 대용이 되어도 여전히 모옥이라고 많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시경과 유명 시인들의 글에 많이 등장하여 굳어져 버렸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자재면에서 띠집의 선호도가 높은 것 같다. 여러 겹으로 지붕을 일 경우 밑에는 볏짚으로 올린 다음 맨 위는 띠로 올린다고도 하니 띠집의 선호도를 알 수 있겠다. 그리고 띠는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 근경(根莖) 즉 뿌리줄기를 양혈지혈(凉血止血) 및 청열이뇨(清热利尿)의 약재로 사용한 데다가 백모(白茅)는 길상의 상징으로 여겨져 삼국지 강동 오나라를 개국한 손견의 모가 남편으로부터 백모 한 다발을 선물 받고서 손견을 낳았다는 전설에서부터 제사에 사용하거나 주술사들이 귀신을 부르거나 쫓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잎의 끝이 창과 같이 뾰족하기에 풀 초변에 창 矛(모)를 붙여서 모(茅)라고 한다.
띠지붕은 볏짚지붕보다 섬세한 맛을 풍긴다. 물에는 강하지만 불에 약하여 과거 전쟁에서 화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띠가 자생하는데 이를 치가야(チガヤ)라고 하며 한자로는 천훤(千萱) 또는 모(茅)나 모훤(茅萱) 등으로 쓴다. 번식력이 왕성하기에 앞에 천(千)이 붙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띠의 잎 끝이 뾰족하게 창같이 생겨서 사악한 기운을 막는다고 믿어 마귀를 쫓는 용도로 사용되어 중국과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치노와쿠구리(茅の輪くぐり)라고 매년 6월 30일 띠로 둥글게 큰 테두리를 만들어 신사에 설치하고서는 사람들이 그 사이를 구부리고 지나가게 하여 지나간 반년의 재앙을 제거하고 다음 반년도 잘 지내자는 의미의 행사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불교 때문인지 아니면 유교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그런 주술적이나 종교적인 행사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일본 신사에 설치된 치노와쿠구리(茅の輪くぐり) 푸른 상태에서 만들면 이렇게 누렇게 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37년 정태현선생 등의 조선식물향명집에서 띄 또는 삘기라고 하였다가 1949년 박만규선생의 우리나라식물명감에서는 삐비라고 했다. 그러다가 1980년 이창복선생의 대한식물도감에서 띠라고 한 것이 정명이 되었는데 국어학자들에 의하면 과거에 15세기의 [뒤]에서 15~18세기에 초음이 [ㅂㄷ위]로 변했다가 18~19세기에 [ㅅㄷ위]로 변하고 19세기에 [ㅅㄷ의]가 되었다가 20세기에 와서 [띠]로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고어가 자판에 없기에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 참조) 하지만 이렇게 음운 변화만 추정할 뿐 그게 무슨 연유로 붙은 지는 모르니 답답할 뿐이다. 글쎄 띄가 띠로 변했다니까 아기를 업을 때 쓰는 좁고 긴 천을 띠라고 하지만 띄라고도 한다는 것이 떠올라 뭔가 연관성이 있지않나 싶다. 과거 끈이 없던 시절 이 띠로 물건을 묶는 끈으로 사용하였을 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골에서 잔디 사이에서 자라는 잔디같이 생긴 띠의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삘기를 삐삐라고 하면서 뽑아서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바로 띠였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부터 20세기까지 우리 조상들이 쭉 불러 왔던 한자식 이름 그리고 동의보감에 약재명으로도 기록된 모(茅)는 철저하게 배제하여 이명으로조차도 등록하지 않고 있다. 

띠의 음운 변화 과정

 

 

일본에서 최근에 다소 골치 아픈 잡초로 대두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중일 3국에서는 좋은 이미지를 가진 띠가 서양으로 가서는 천하의 몹쓸 잡초로 취급 받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특히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아열대 지방에서는 매우 잘 자라 키가 3m나 되기도 하며 종자 번식과 줄기 번식에 의한 왕성한 번식력에다가 잎이 푸른 상태에서도 불에 잘 타는 특성이 있어 산불이 날 경우 불길을 키우기 때문에 진화가 어렵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 띠는 fire-adapted species라고 불에 강하고 오히려 불을 이용하여 종족 번식에 활용하는 생존법을 가진 식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을 키워 주변을 다 태운 다음 땅속 깊은 곳의 뿌리줄기에서 다시 싹이 나와 그 주변을 독차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재배 금지 식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필리핀 현지 발음을 따라서 일반 영어명이 cogongrass인 이 띠는 세계 최강 잡초 또는 세계 10대 악명 높은 잡초로 널리 알려져 유럽 및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에서 환경위해식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국제자연보존연맹 즉 IUCN에서도 100대 침입외래종으로 리스트에 올리고 있다.

 

띠가 많은 들은 불이나면 띠가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에 진화하기 어렵다. 불에 타 주변 식물이 다 죽으면 혼자 남아 점령한다. 이래서 넓은 초원이 많은 나라에서는 천하의 몹쓸 잡초로 인식하여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도 원산지인 한중일에서는 화재에 대한 언급도 별로 없고 주변 식물의 생장을 심하게 방해한다는 언급도 없이 그다지 문제가 안 되는 이유는 나름대로 천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띠가 마냥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억새에게 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억새는 다시 소나무에 밀려서 결국 소나무 숲이 형성되므로 크게 문제가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글쎄 억새가 아니라도 우리나라의 경우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나무들이 빽빽하기 때문에 양지가 없어 숲에는 띠가 살기 어려운 환경이고 민가 주변에서 논두렁 밭두렁에서 자란 띠는 가축의 사료 즉 소먹이풀이나 거름용으로 다 베어졌기에 환경을 파괴한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뭐 이런 식물이 한둘이 아니다. 어느 식물이던 원산지에서는 먹이 사슬이 존재하여 평형을 유지하는데 갑자기 타 지역으로 옮겨지면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식물의 꽃차례를 구분하는 종류 중에 유제화서(柔荑花序)라는 것이 있다. 유제(柔荑)가 분명 띠의 새싹이라면 유제화서는 당연히 띠와 같은 화서가 되어야 마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띠는 조밀한 원추화서이고 정작 유제화서는 버들이나 참나무개암나무 서아나무 가래나무 자작나무 등 아래로 처지는 화서들을 말하여 흥미롭다. 그래서 유제(葇荑)가 띠의 싹이 아닌 버드나무의 꽃을 말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유제화서를 미상화서(尾状花序)라고 한다.

 

이렇게 아래로 처지는 화서를 유제화서 또는 미상화서라고 하지만 정작 띠는 원추화서이다.

 

 

등록명 : 띠

이   명 : 띄, 삘기, 삐비, 삐삐, 모(茅)

학   명 : Imperata cylindrica var. koenigii (Retz.) Pilg.

통합명 : Imperata cylindrica (L.) Raeusch.

분   류 : 벼과 띠속 다년생 초본

원산지 : 한중일 인도 아프리카 등

중국명 : 백모(白茅), 사모(丝茅)

일본명 : 치가야(千茅)

영어명 : cogongrass

높   이 : 30~90cm (최대 3m)

줄   기 : 1~4마디

꽃차례 : 원추화서 수상

개화기 : 4~6월

내한성 : 영하 28도

 

도로변이나 시골 무덤 주변 잔디밭에 가면 영락없이 띠가 자란다. 가정의 정원에도 많이 자라지만 수시로 잔디를 깎아 버리면 잘 보이지 않는다.
꽃밥은 황색이고 암술대는 자흑색이라서 컬러풀하다.
띠는 종자번식 외에도 지하경에 의한 영양번식도 왕성하다.
띠의 열매에는 암술머리가 남아 있다.
띠는 마디에 2~10mm 길이의 백색 유모가 있다. 오른쪽 엽초(叶鞘)에도 털이 있는 경우가 있다.
다년생 초본이지만 겨울에는 지상부는 말라 죽는다.
띠 줄기 
어린 띠의 전초와 뿌리
우리나라에 홍띠라고 등록된 붉은 잎을 가진 원예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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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벼과 식물 중 요즘 조경용으로 인기 높은 식물들 중 일부이다.

 

조경용으로 인기가 높은 키가 큰 팜파스그래스
억새도 벼과 식물이다.
토끼꼬리풀
사초는 키가 작은 편이다.
털쥐꼬리새로 등록된 핑크뮬리도 벼과 식물이다.
수크렁
풍지초
조경용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피도 벼과 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