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장미과 아몬드아과/명자 모과속

1897 명자(榠樝)와 모과(木瓜) 산당화(山棠花)의 어원과 뒤죽박죽

낙은재 2023. 11. 5. 13:49

 

풀명자(좌)와 교잡종(중) 그리고 명자꽃(우)

 

 

정원수로 가장 인기 높은 명자나무

장미나 수국과 같이 가장 사랑받는 최고의 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웬만한 정원에서 빠짐없이 한켠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원수가 바로 명자나무가 아닌가 한다. 어느 정원에서나 그 중심에 심어질 나무는 아니지만 키가 아담하기에 어떤 장소에 심어도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우리나라 풍토에 잘 적응하여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아도 매년 매우 풍성하게 꽃을 피우는 관목이 명자나무이다. 무엇보다도 이른 봄 아직 추위가 채 가기도 전에 마치 구슬과도 같은 자홍색 또는 자갈색 맹아가 줄기 마디마다 촘촘하게 나와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금방 터질 것 같던 그 맹아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터지지는 않고 애를 태우다가 그만 매화나 벚꽃 등에 아쉽게도 순서를 빼앗기고 만다. 이와 같이 명자는 결코 여느 봄꽃들과 개화시기를 다투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본연의 순리대로 천천히 개화하는 것이 바로 명자나무이다. 그래서 꽃말을 겸손이나 수줍음이라고 하며 순수 우리말 이름이 애기씨꽃나무인지도 모르겠다. 그 대신에 꽃이 한번 피면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어 겨우 1주일도 못다 채우고 금새 져버리는 여느 봄꽃들과는 비교가 안되게 개화 기간이 길다. 게다가 꽃 색상이 진하든 연하든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명자꽃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른 봄 가장 많은 사람들이 화원에서 찾는 정원수가 바로 명자나무라고 한다.

 

맹아가 매우 매력적인 명자는 화아가 아닌 엽아도 처음에는 자홍색 또는 자갈색을 띤다. 

 

 

 

명자나무속은 전세계에 모두 4개의 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원산지는 일본 원산의 풀명자 한 종을 제외한 나머지 3종은 모두 중국이다. 중국 중남부지방이 원산지인 명자꽃(산당화)과 중국 서남부지방 원산의 중국명자나무 그리고 아직 미등록종인 티베트명자나무가 바로 그 3종이다. 중국과 일본의 가운데에 위치하는 우리나라도 당연히 원산지에 포함될 법하지만 국내서는 제대로된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과거 일본학자 나카이가 발견하여 신종발표한 적도 있었지만 자생지가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4종 외에도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발견되어 처음에는 풀명자의 변종으로 명명되었다가 1920년에 미국 하버드대학 레더교수에 의하여 학명 Chaenomeles × superba로 명명된 명자꽃과 풀명자의 교잡종이 있다. 아직 국내에는 이 교잡종이 등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국내 보급되고 있는 상당수의 원예품종들이 이 교잡종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잡종들은 중국 원산의 명자꽃과 일본 원산의 풀명자 양쪽 특성을 두루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주변에서 중국 명자꽃이나 일본 풀명자의 뚜렷한 특성을 온전하게 가진 나무를 쉽게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명자나무속 4개의 종 외에도 명자나무와 매우 근연한 종이 둘 있는데 그게 바로 얼마전까지 같은 명자나무속으로 분류되었다가 최근에 분리 독립한 모과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상인 코카서스지방이 원산지인 털모과이다. 학명 Cydonia oblonga로 표기되는 털모과는 시중에서 마르멜로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종은 현재 각각 모과나무속과 털모과(키도니아)속의 유일한 종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워낙 명자나무와 대동소이하기에 식물분류학적으로도 처음에 하나에서 둘이 되고 지금 현재는 다시 3개의 속으로 나뉘어 분류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식물분류학이 도입된 이후 모과와 명자를 철저히 분리하여 현재 일반적으로 전혀 다른 수종으로 인식하지만 원산지 중국에서는 물론 서양에서도 이들을 모두 거의 같은 종으로 오랫동안 인식해 왔다. 서양 식물분류학에서도 처음에는 모두 Cydonia(털모과)속으로 분류하다가 나중에 명자와 모과를 Chaenomeles(명자나무)속으로 분리하였고 여기서 다시 모과만 Pseudocydonia(모과나무)속으로 분리 독립시켜 처음 하나의 속에서 현재 3개의 속으로 나뉘어 진 것이다. 그 중에서 지금 현재 국내에 등록된 수종은 명자나무속 명자꽃과 풀명자 그리고 중국명자꽃 등 3종과 모과나무속 모과나무 그리고 키도니아(털모과)속 털모과 등 모두 5종이다. 하지만 서양 식물분류학계와 마찬가지로 원산지 중국에서도 과거 이들 5종을 혼동하여 서로 중복되는 이름으로 부르고 서로 상충되는 정보가 난무하여 혼란스러웠다. 참고로 털모과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생소하지만 중국에는 매우 오래전 한나라시대에 도입되어 이미 송나라 시대에 쓰여진 관련 시가 남아 있고 송대에 출간된 본초서에 약재로서의 효능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재배 역사가 길다. 따라서 이들 3개 속의 수종들은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과속과 명자속의 큰집인 키도니아속의 유일종 털모과

 

 

명자와 모과의 명칭 혼란

원산지 중국에서 이들의 명칭 혼란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중국식물지에서 모과(木瓜)라고 부르는 것을 현재까지도 중의학계에서는 명자(榠樝, 榠楂)라고 하고 우리가 명자 또는 산당화라고 부르는 명자꽃을 중국 고전인 시경(詩經)에서는 모과(木瓜)라고 하였으며 중의학계에서는 현재도 모과(木瓜)라고 하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헌에 등장하는 이들 수종들의 명칭과 정보 또한 덩달아서 매우 혼란스럽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과라고 인식하고 있는 고려시대 문신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선생이 저술한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등장하는 모과(木瓜)나 고려말 충신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詩藁)에 등장하는 모과(木瓜)가 진짜 현대의 모과인지 아니면 명자꽃의 열매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게다가 우리나라 식물분류학계와는 달리 항상 거의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동의보감을 비롯한 한의학계의 정보조차도 이 명자(榠樝)와 모과(木瓜)에 관하여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한의학계에서는 그들이 표준으로 삼았던 본초강목(本草綱目) 등 중국 본초서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의보감에 명시된 모과(木瓜)의 설명은 현대의 모과가 아닌 명자꽃(산당화) 열매에 대한 것이며 동의보감의 명자가 바로 현대 모과에 대한 설명인 것이 므로 거꾸로 되어 있는데도 이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 데다가 지금도 우리나라에서의 명자나무 명칭이 오락가락하고 있어 그 혼란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예를 들면 최근 불과 몇 년 사이에 학명 Chaenomeles speciosa인 명자꽃의 경우 산당화에서 명자나무로 그리고 다시 명자꽃으로 이름을 수시로 변경하여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동안 국내서 명자꽃을 부르던 산당화(山棠花)라는 이름의 어원이 명확하지 않아 파악해 보니 오류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따라서 왜 이런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하여 다소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나름대로 알아보려는 것이다. 

 

국내 등록된 명자나무와 모과나무 그리고 털모과의 한중일 이름 비교

우리이름 학  명 원산지 중국식물지 시경(詩經) 본초강목 일본명
털모과 Cydonia oblonga 중앙
아시아
榅桲(온발)   楂之
(명자지류)
マルメロ
(마루메로)
모과나무 Pseudocydonia sinensis 중국 중남부 木瓜(모과) 木李(목리) 榠楂(명자) 花梨(화리), 榠樝(명자)
명자꽃 Chaenomeles speciosa 중국 중남부 皱皮木瓜
(추피모과)
木瓜(모과) 木瓜(모과) 楙(무) 木瓜(모과)
중국명자꽃 Chaenomeles cathayensis 중국 서남부 毛叶木瓜
(모엽모과)
木桃(목도) 楂子(사자) 真木瓜
(진모과)
풀명자 Chaenomeles japonica 일본 日本木瓜
(일본모과)
    草木瓜
(초모과)

 

 

위 표에 기록된 5종 중 맨위 털모과는 털모과속으로 그 다음 모과나무는 모과나무속으로 그리고 나머지 아래 3종은 명자나무속으로 현대 식물분류학에서는 분류하지만 과거 중국에서는 이들을 모두 명자의 종류 즉 榠(명자류)로 파악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초창기 서양 식물분류학에서 모두 Cydonia속으로 분류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오래된 중국 고전 시경(詩經) 시절에는 아직 털모과가 중국에 도입되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언급이 없으나 한나라(BC 202~AD 280) 때 도입되어 북방에서 재배가 시작되었으므로 명대 쓰여진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털모과 즉 榅桲(온발)을 楂之(개명자지류) 즉 명자의 일종으로 生于北土者(생어북토자) 즉 북방에서 생산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관상용으로 많이 재배하는 일본 원산 풀명자는 명나라 이시진(李時珍, 1518~1593) 시대에는 아직 중원에 없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에서 보듯이 가장 큰 문제는 현대 우리가 주로 관상용 또는 약용으로 정원에 심는 가을에 노란 큰 열매가 아름답게 달리는 키가 5~10m로 제법 크게 자라는 나무인 학명 Pseudocydonia sinensis인 교목을 우리나라에서 모과나무라고 부르는데 원산지 중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인 1978년에 출간된 중국식물지에서만 모과라고 하지 중국 고전인 시경(詩經)에서는 목리(木李)라고 했으며 현대 중의학계나 중국 일반인들은 거의 모두 명자(榠樝)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이를 모과(木瓜)라고 하지 않고 꽃배나무라는 뜻인 花梨(화리)라고 하거나 중국을 따라서 榠樝(명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우리가 명자(榠樝)라고 부르는 학명 Chaenomeles speciosa인 키가 겨우 1~2m에 불과한 관목인 명자꽃(명자나무, 산당화)은 우리 외에는 모두가 모과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서부터 모과라고 하였으며 본초강목을 비롯한 중의학계 모두가 모과라는 그 이름을 따르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이를 모과(木瓜)라고 한다. 그리고 중국식물지에서도 이를 명자라고 하지 않고 추피모과(皱皮木瓜)라고 불러 온 세상에서 이를 명자라고 부르는 나라는 우리 밖에는 없다. 그리고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명자(榠楂)의 어원을 알고나면 이 관목에는 명자라는 이름이 논리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어디서부터 이렇게 이름이 뒤바뀌게 되었을까 그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모과인데 중국과 일본에서 명자라고 하고 국내 한의학에서도 명자라고 했다.
우리는 명자꽃이라고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 관목을 모과라고 한다.

 

 

 

원산지와는 뒤바뀐 식물 이름들

과거 인터넷은 물론 사진도 없던 시절 말이나 글로써만 묘사하여 식물을 파악하였기 때문에 나라 사이의 식물 명칭 혼선은 흔하였다. 예를들면 중국의 목란(木蘭)이 국내서는 목련(木蓮)으로 변하였지만 정작 중국에는 목련이라는 다른 상록 수종들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오동(梧桐)이 국내서는 벽오동(碧梧桐)이 되고 오동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포동(泡桐)이라고 부르는 다른 수종에 붙였다. 위장병에 좋은 낙엽 교목인 중국 후박(厚朴)이라는 이름을 국내서는 남부 상록 교목에다가 붙이고 정작 중국 후박은 국내서는 중국목련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장미과 꽃사과나 모과나무 등을 부르는 이름인 해당(海棠)을 국내서는 토종 장미의 일종으로 모래땅에서 잘 자라는 가시있는 관목에다가 붙이고 있어 실제 중국에서 다양한 해당화 종류들이 도입되자 그들의 이름을 붙이느라 애를 먹고 있다. 그 외에도 중국에서 구골(枸骨)이라고 부르는 가시나무를 우리는 호랑가시나무라고 부르고 가시가 있는 비슷한 다른 나무를 우리는 구골나무라고 부른다. 그리고 중국 계림의 상징이며 향기있는 나무로 유명한 금목서 은목서의 이름 중 은목서(銀木犀)를 엉뚱하게 은목서와 구골나무의 교잡종인 구골목서(枸骨木犀)에다가 붙이고서도 아직도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실상이라서 과거에는 무척 많았다. 그 외에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오류는 독성이 매우 강한 만병초를 중국의 이름난 약재인 석남(石南)으로 잘못 알고서 그렇게 석남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아예 만병통치약이라고 만병초(萬病草)로 고쳐서 부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맹독 식물에다가 국가에서 엉뚱한 만병초라는 표준명을 붙인 결과 실제로 민간에서 불치병 환자들이 지금도 약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만병초꽃에서 채취한 꿀(석청)을 먹고 사망한 사례가 발생하자 식약처에서 경고해도 그 이름이 만병초라서 쉽게 근절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모과와 명자는 원래 비슷한 종이라서 약효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실제로 뒤바뀌어도 의학적으로도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 주로 명자라고 불리는 모과는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 이래 국내에서 모과라는 이름으로 일관되게 불리고 있지만 중국과 우리 선조들 그리고 일본에서 오랜 세월 모과라고 불리던 명자꽃(산당화)은 국내 식물분류학이 도입된 이래 그 이름이 산당화와 명자나무 당명자나무 잔털명자나무 명자꽃 등으로 수시로 어지럽게 변하여 왔다. 아마 1943년 처음부터 엉뚱하게 산당화(山棠花)라는 잘못된 이름을 달고 나와서 그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중국에서 뭐라고 부르던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식으로 이름을 붙여서 부를 수는 있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서 부르는 것과 전혀 뭐가 뭔지를 모르고서 부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신라시대 처음 등장하는 모과(木瓜)

그럼 이제부터 과거 우리 조상들은 모과나 명자를 어떻게 불렀는지 알아보자. 거의 모든 식물이 그렇지만 중국 원산의 모과가 정확하게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고문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말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작품을 간추려 879년에 완성하고 886년 신라 정강왕(定康王)에게 바쳤다는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권11에 “投我以木瓜(투아이모과) 報之以瓊琚(보지이경거) 匪報也(비보야) 永以爲好(영이위호)”라는 중국 시경(詩經) 국풍(國風) 위풍(衛風)편의 모과(木瓜)라는 시를 인용한 문구가 있다. 참고로 이 구절은 이후 우리나라 수많은 선비들에 의하여 회자(膾炙)되는 시경 중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가 된다. 그 뜻은 “그대가 나에게 모과를 던지면 나는 경거라는 보석을 드리겠소. 딱히 보답이라기보다는 영원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지요.” 이러면서 같은 문구가 세번 반복되는데 다만 던지는 과일이 모과(木瓜)에서 목도(木桃)와 목리(木李)로 바뀌게 되며 반대급부인 보석도 경거(瓊琚)에서 경요(瓊瑤)와 경구(瓊玖)로 변한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으나 번역은 생략한다. 과일을 주고 보석을 받는 불평등 관계를 노래한 그 창작배경에 관하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환공시절 이웃 위나라가 위급할 때 도와준 것과 관련된 것이라거나 신하와 주군의 관계라는 등의 설이 분분하였지만 송나라 주자(朱子) 즉 주희(朱熹, 1130~1200)선생이 그 당시 남녀간에 과일을 주고 보석(예물)을 받는 것이 풍습이었을 거라는 남녀상호증답설(男女相互赠答说)을 제기한 이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木瓜(모과) 시경(詩經) 국풍(國風) 위풍(衛風)  

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匪報也 永以爲好也

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

投我以木李 報之以瓊玖 匪報也 永以爲好也

 

여기서는 그 창작 배경보다는 여성이 연인에게 던졌다는 바로 그 모과(木瓜)와 목도(木桃) 그리고 목리(木李)가 과연 어떤 과일이냐에 대하여 관심이 더 가는 것이다. 먼저 중국 최고의 사서인 이아(尔雅)의 보충서로서 북송 문학가 육전(陆佃, 1042~1102)이 저술한 훈고서(訓詁書)인 비아(埤雅)에서 진나라 학자 곽박(郭璞, 276~324)의 주석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楙,木瓜。’郭璞注云:‘木如小瓜,酢而可食。木瓜之名取此也。其叶光而厚,其如小瓜而有鼻,津,味不木者木瓜。小于木瓜,味木而酢木桃。似木瓜而无鼻,大于木桃,味木李,亦曰木梨,即楂及和子也。내용인즉 “시경의 모과는 무(楙)라고도 하며 나무에 참외 같은 열매가 달리기에 모과(木瓜)라고 부르며 맛이 시지만 먹을 수는 있다. 잎이 매끈하고 두터우며 열매는 작은 참외와 같은데 끝에 돌기가 있다. 수분이 많고 육질이 목질은 아니다. 그리고 시경의 목도(木桃)는 둥글고 모과보다 작으며 맛이 시면서도 떫고 목질이다. 다음 시경의 목리(木李)는 모과를 닮았으며 목도보다 크며 꼭지 즉 열매 끝에 유두 같은 돌기는 없고 열매의 맛은 떫다. 목리(木李)를 목리(木梨), 명자(楂) 또는 화원자(和子)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시경의 모과는 지금 우리의 명자꽃(산당화)이며 목리는 지금 우리의 모과이며 목도는 우리가 현재 중국명자꽃이라고 부르는 수종이라는 것이다. 이미 천 년 전 송나라 육전(陆佃, 1042~1102)이 명쾌하게 풀이하여 이를 명대 이시진(李時珍, 1518~1593)도 따라서 약간 보충하여 본초강목에서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본초강목에서는 모과는 木瓜(모과) 또는 楙(무)로 목도는 楂子(사자)로 목리는 榠楂(명자)로 명시하여 이게 중국에서 널리 통용되는 이름이 된다.  

 

이 관목과 겹꼭지가 있는 열매를 중국과 우리 선조들이 모과라고 했지만 우리는 현재 명자꽃이라고 한다.
크고 노란 이 열매를 과거 중국에서는 명자라고 했지만 우리는 모과라고 한다.

 

 

중국의 육전이나 이시진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인 우리나라 최치원이 계원필경에 중국 고전에 있는 이 시를 인용하였다고 하여 실제로 모과가 그 당시 국내에 도입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더구나 최치원의 계원필경은 그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근무할 때의 이야기이지 국내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 당시부터 국내 식자들은 모과라는 존재는 최소한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중국 고전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詩經)은 그 당시 학자들의 필독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시대 최치원은 그 시경의 모과 시에 등장하는 과일 3종 중에서 모과(木瓜)만 인용하고 있다. 이건 그 당시 신라인들도 목도와 목리는 몰라도 이 모과만은 알만하다고 판단하였기에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 3종의 과일 중 목도(木桃) 즉 중국명자꽃이 국내 도입된 시기는 신라시대로서는 까마득하게 먼 훗날인 최근인 것이다. 아직도 국내서 중국명자꽃을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시경에서 목리(木李)라고 하는 현대 우리가 모과라고 하며 시골 주택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교목과 시경과 한의학에서 모과(木瓜)라고 하는 관목 즉 현재의 명자꽃은 결코 최근에 도입된 수종은 아닐 것인데 언제인지가 궁금하다. 이에 대한 국내 정보는 부족하지만 이웃 일본 정보는 참고할 수는 있다. 일본에서는 관목인 명자꽃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에 이미 도입되어 관상용으로 또는 약용으로 재배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보다는 우리가 최소한 늦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최치원이 활동하였던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시경에서 언급한 모과 즉 명자꽃(산당화)은 국내에 도입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반면에 교목인 모과는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8)에 도입되었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경우도 최소한 조선 중기 이전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일본과 우리나라에는 수령 800년이라고 주장하는 모과나무 고목이 존재하여 해당 지자체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 추정 수령을 그대로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400~500년 전에는 우리나라나 일본에 모과나무가 도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조선 초기나 중기가 된다. 여하튼 최치원이 인용한 시경의 그 모과는 현재 우리가 모과라고 알고 있는 노란 큰 열매가 아니고 보다 작지만 수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시지만 떫은 맛이 거의 없어 생으로도 먹을만한 명자꽃(산당화) 열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일본에서 800년 되었다는 이시모리(石森) 모과나무
우리나라에도 800년 되었다는 경북 칠곡 도덕암의 모과나무

 

 

그 다음으로 오래된 우리나라 모과 관련 기록은 고려사에 고려 전기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때인 1048년 음력 2월 5일에 하늘에 모과만한 유성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필두로 유성의 크기를 묘사할 때 모과가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유성이란 그 크기가 천차만별이라서 지름 4~6cm에 불과한 명자꽃(산당화)의 열매인지 아니면 길이 10~15cm에 달하는 제법 큰 현대의 모과를 염두에 둔 비유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빈번하게 유성에 비유한 것으로 봐서는 매우 큰 이례적으로 큰 유성은 아닌 것 같다. 여하튼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 관목인 모과 즉 명자꽃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며 그 당시 이름은 명자(榠樝)가 아닌 모과(木瓜)로 불리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명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생전에 저술하고 편집한 내용을 간행한 문집인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권제8 고율시(古律詩) 중에 보광사(普光寺) 주지(主持) 정통사(精通師)로부터 금귤(金橘)ㆍ모과(木瓜)ㆍ홍시(紅柹)를 대접받고 지은 시 중에 모과(木瓜)가 나온다. 여기서도 모과는 우선 생식이 가능한 데다가 반쪽이 블그레하다는 표현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현대의 모과라기보다는 명자꽃 즉 중국의 모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백운거사 이규보 – 고전번역원 홍찬유역

반쪽이 불그레한 모과가 / 木瓜紅半頰(모과홍반협)
점점이 칼 끝에 떨어지네 / 片片落銛鋩(편편락괄망)
융숭한 대접을 어떻게 갚나 / 珍投何以報(진투하이보)
좋은 경거 없는 게 부끄럽구려 / 愧無瓊琚將(괴무경거장)

 

명자꽃 열매 즉 모과는 한쪽이 불그레하게 익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고려말 충신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詩藁) 권21에 실린 시 중에 모과꿀절임이 나온다.

 

목은 이색 - 고전번역원 임정기 역

木瓜細切橘交加(모과세절귤교가)

모과를 가늘게 썰고 여기에 귤을 곁들여

崖蜜如膠味已多(애밀여교미이다)

아교 같은 석청 타니 맛이 이미 좋은데

 

글쎄 명자꽃의 열매를 중국에서 모과라고 하면서 꿀에 재이고 달여서 마시지만 그걸 모르는 현대의 우리들은 명자꽃이 아닌 모과의 열매도 잘게 썰어서 꿀절임하기 때문에 목은선생이 실제로 어느 열매를 사용하였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시기적으로 보나 열매 특성으로 보나 명자꽃 열매일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인용한 중국 사서인 이아(尔雅)의 보충서로서 북송 문학가 육전(陆佃, 1042~1102)이 저술한 훈고서(訓詁書)인 비아(埤雅)에 “모과(명자꽃의 열매)는 물러서 꿀절임하기에 적합하다며 씨를 제거하고 찐 다음 생강, 꿀과 함께 으깨고 달여서 겨울에 마시면 좋다.”라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木瓜性脆(모과성취) 可蜜渍之为果(가밀지지위과) 去子蒸烂(거자증란) 捣泥入蜜与姜作煎(도니입밀여강작전) 冬月饮尤佳(동월음우가). 다분히 비아(埤雅)의 이 문구를 의식하여 위 시를 쓴 것이 아닌가 한다. 반면에 현대의 모과 즉 목리(木李)는 그 성질이 단단하여 꿀과 함께 오래 달여서 젤리 모양의 과자로 만들어 먹으라고 설명하고 있다. 木李性坚(목리성견) 可蜜煎及作糕食之(가밀전급작고식지). 명자꽃(산당화)의 열매는 수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떫은 맛이 거의 없기 때문에 차로 끓여 마실 수 있지만 중국명자꽃인 목도(木桃)나 현대의 모과인 목리(木李)는 과육이 거의 목질인 데다가 떫은 맛이 강하여 차로 끓이더라도 우려나올 건덕지가 없으며 떫어서 맛이 없기 때문이다.

 

명자꽃 열매는 수분이 많고 떫지 않아서 생식도 가능하고 생강 꿀과 함께 차로 마셔도 좋다.

 

조선조 초기에도 여전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의 크기를 모과에 비유한다. 글쎄 그게 길이 10~15cm에 달하는 현대 모과인지 아니면 지름 4~6인 명자꽃(산당화)의 열매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지방에서 조공으로 모과를 진상받았다는 기록이 더러 보인다. 아무래도 약용으로 모과를 진상한 것 같다. 그렇다면 명자꽃이다. 중국에서도 약용으로 대량재배하는 것은 거의 모두 약성이 뛰어난 추피모과 즉 명자꽃(산당화)이지 명자 즉 키가 큰 모과는 아니다. 그리고 세종 10년인 1428년에는 상림원에서 강화도에 모과를 심으라고 다음과 같이 상주하자 왕이 윤허한 기록이 있다. “강화부(江華府)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 있어 수기(水氣)가 모인 곳으로 초목의 성장이 다른 곳보다 나은 편이오니 청하옵건대 감자(柑子)ㆍ유자(柚子)ㆍ석류(石榴)ㆍ모과(木瓜) 등의 각종 과목을 재배하도록 하소서.” 하지만 여기서도 모과가 정말 현대의 모과인지 아니면 명자꽃(산당화)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약용이라면 명자꽃일 가능성이 높다. 그 후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문신인 성소(惺所) 허균(許筠, 1569~1618)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모과는 경상도 예천산이 최고라며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木瓜(모과)。產于醴泉者最佳(산우예천자최가)。味如梨而有津(미여리이유진) 그 맛이 배와 같이 수분이 많다고 한 것으로 봐서는 생식이 가능한 명자꽃(산당화)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고려중기 이규보와 여말 이색 그리고 허균에 이르기까지의 모과는 현대 우리가 말하는 교목 모과가 아니고 중국의 약재인 키가 겨우 1~2m에 불과한 관목 모과(木瓜) 즉 명자꽃(산당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조선 전기까지는 국내에 교목인 현대의 모과가 도입되지 않았거나 되었더라도 미미한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명자(榠樝)라는 이름은 조선 중기에 등장

그렇다면 조선시대 우리나라에는 학명 Pseudocydonia sinensis인 현대의 모과는 도입되지 않고서 과거 중국에서 도입된 명자꽃(산당화)만 모과라고 하면서 쭉 재배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조선 중기부터 모과 외에도 명자(榠樝)라는 용어를 언급하는 문헌들이 속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조선 전기 최고의 어문학자이던 최세진(崔世珍)1527년에 펴낸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모괏 楙()와는 별도로 ()쟛 명으로 ()는 명 쟈로 풀이하고 있어 그 당시에 모과 외에도 명자 즉 현재의 모과가 이미 국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허준(許浚, 1539∼1615)선생이 1610년에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모과와 명쟈(榠樝) 둘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동의보감에 수록된 모과(木瓜)는 현대의 모과가 아닌 명자꽃(산당화)의 열매를 말하고 한글 명쟈로 표기된 명자(榠樝)가 바로 현대의 모과를 지칭한다는 것을 그 특성과 약효로 알 수 있다. 즉 중국 송나라 소송(苏颂, 1020~1101)이 편찬한 도경본초(图经本草)나 명나라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의 본초강목 등 중국 본초서의 설명을 많이 참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과는 항상 제대로 관목을 지칭하고 명자는 항상 제대로 교목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숙종때 유학자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찬한 연행일기(燕行日記)에 1713년 1월 북경 사신으로 가서 북경 현지에서 서부해당(西部海棠)을 보고서 묘사한 내용에 모과의 수형을 닮았다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其高丈餘(기고장여)。其枝幹似梨(기지간사리)。亦似木瓜樹(역사모과수)。詢其名(순기명)。卽西府海棠(즉서부해당)。꽃사과의 일종인 키가 5m까지도 자라는 서부해당을 닮은 수형이라면 키가 겨우 2m에 불과한 관목인 명자꽃(산당화)일 가능성은 거의 없고 현대의 모과를 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약재인 관목 외에도 관상용인 교목도 뭉뚱그려서 모과라고 불렀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 대표적인 실학자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남긴 여암유고(旅菴遺稿)에 그가 전라도 순창에 조성한 순원(淳園)이라는 이름의 정원에 심은 화훼를 소개하면서 명자(榠樝)와 무(楙)를 따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 특성까지 소개하고 있다. 중국의 명자(榠樝)는 현대의 모과나무를 말하고 무(楙)는 현대 우리의 명자꽃(산당화)을 뜻한다. 무(楙)의 특성에 대한 언급이 많지는 않지만 맛이 시다고 설명한 것으로 봐서는 중국 모과 즉 명자꽃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명자(榠樝)의 특성을 기록한 다음 문구로 봐서는 관목인 명자꽃(산당화)인지 교목인 모과나무인지 아리송하기는 하다. 榠樝花與實(명자화여실)。酷類木瓜(혹류모과)。而實差小有赤點(이실차소유적점)。蒂間無重蒂如乳者(체간무중체여유자)。즉 “명자의 꽃과 열매는 모과와 매우 비슷하여 큰 차이가 없지만 붉은 점이 있다. 그리고 열매 끝에 젖꼭지 같은 돌출부가 없다.”인데 여기서 무중체(無重蒂) 즉 겹꼭지가 없다는 점은 명자 즉 현대의 모과인데 열매에 붉은 점이 있다는 것으로 봐서는 현대의 명자꽃(산당화)의 특성이라서 헷갈리게 한다. 하지만 다음 문장 “置箱笥(치상사) 可以辟蟲魚(가이피충어).” 즉 “상자에 두면 잡벌레들을 막을 수 있다.”라는 대목에서 이 수종이 바로 중국의 명자(榠楂) 즉 현대의 모과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맹자의 후손인 당나라 학자인 맹선(孟诜, 621~713)이 그가 쓴 식료본초(食疗本草)에서 “榠楂气辛香(명자기신향) 致衣箱中杀蠹虫(치의상중살두충)”이라고 “명자는 매운 향이 있어 옷상자에 넣어 두면 좀벌레를 죽인다.”라는 기록한 말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심가는 대목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여암이 순창에 조성한 순원에는 무(楙)와 명자(榠樝) 즉 명자꽃와 모과 두 종을 같이 심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 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이 백과사전식으로 찬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탐라에는 당유자라는 기이한 과일이 있는데 그 열매의 크기가 모과만 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耽羅異果辨證說(탐라이과변증설) 唐柚子(당유자) 實大如木瓜(실대여모과) 당유자라면 그 열매의 크기가 명자꽃(산당화)의 수준은 넘어서고 현대 모과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에서 명자라고 하는 교목인 모과는 조선 초기 또는 중기에 관상용 또는 약용으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조선조 중기에 와서는 기존의 모과 외에도 명자라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지만 둘의 구분이 쉽지 않아서 그런지 헷갈리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관목이나 교목을 구분하지 않고 모과 하나로 통칭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가 쓴 종합 농업기술서인 농정회요(農政會要)에는 모과(木瓜)와 명자(榠樝)가 과일나무로 각각 별도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와서는 모과와 명자를 확실하게 구분하여 보급하고 재배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럼 어느 쪽이 현대의 모과일까? 그 것을 알려주는 단서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서 정약용(丁若鏞)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쓴 시명다식(詩名多識)에 시경의 모과(木瓜)는 그대로 모과(木瓜)로 목리(木李)는 명자(榠樝)로 중국 최초의 사서인 이아(尔雅)에 근거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 실학자인 유희(柳僖, 1773∼1837)선생이 1824년경에 펴낸 물명고(物名攷)에도 중국 이아(尔雅)에 근거하여 시경의 모과(木瓜)는 모과(木瓜) 또는 무(㮊)이고 시경의 목도(木桃)는 사자(樝子)이며 목리(木李)는 명자(榠樝)라고 정확하게 그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모과는 현대의 명자꽃이고 사자는 현재의 중국명자꽃이며 명자는 현대의 모과나무를 말한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작자미상 어휘서인 광재물보(廣才物譜)에도 모과 즉 명자꽃과 사자(樝子) 즉 중국명자꽃 그리고 명자 즉 모과나무에다가 온발(榲桲)이라고 중앙아시아 원산의 털모과까지 그 특성을 각각 설명하고 있다. 이쯤되면 그 당시 학문을 한다는 사람이라면 명자와 모과를 제대로 구분하여 정확하게 불러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나무가 크고 열매도 크고 황색이면 명자이고 나무도 작고 열매도 작으며 가끔 겹꼭지 즉 열매 끝 꼭지에 돌기가 있으며 붉은 반점이 있고 맛이 시기는 하지만 떫지는 않고 수분 함량이 많은 것을 모과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木瓜는 원래 음은 목과인데 15세기부터 우리나라에서 모과로 부르는 경향이 강하여 속음인 모과를 현재 표준으로 삼기에 모과로 쓰고 읽는 것이 올바르다. 이런 것을 활음조 현상이라고 하는데 모단(牡丹)을 모란으로 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명자는 한자로 榠樝 또는 榠楂로 쓰는데 이 또한 둘 다 원래 한자의 음은 명사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그렇게 명사로 기록한 문헌도 있지만 명자로 기록한 경우도 많다. 이제는 명자가 굳어져 현재 국어사전에서도 명자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樝(사)나 楂(사)의 중국 원 발음이 자(zhā)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국내 일각에서 명자의 열매를 뜻하는 榠楂子(명사자)가 줄어서 명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원래 중국에서 명자(榠楂)는 나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 열매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국립수목원의 국생정 도감에도 얼마 전까지 모과나무의 열매를 명사라고 하며 약용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명자가 아닌 명사라고 해도 열매를 지칭하는 말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대의 명자꽃인 모과(木瓜)를 제외한 현대의 모과 즉 목리(木李)와 현대의 중국명자꽃인 목도(木桃)의 육질은 목질이라서 찌꺼기 즉 渣(사)가 많다고 사자(楂子)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는 목리(木李)가 오월(吳越)지역에서 많이 생산된다고 초기에 알려졌는데 그 당시는 오월도 만(蠻)이라고 불렀으므로 만자(蛮楂)라고 부르다가 만자(蛮楂)가 명자(榠楂)로 변했다고 이시진이 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의 모과 즉 명자꽃(산당화)의 열매는 수분이 많아 육질이 결코 목질이 아닌 데다가 오랑캐지역에서 생산된 것도 아닌데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명자라고 부르려고 애쓰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마땅하지 않는 것이다.

 

목질 모과는 말려도 그대로 이지만 촉촉한 명자꽃은 크게 수축된다. 그래서 명자꽃을 추피모과라고 하며 모과는 광피모과라고 한다.

 

 

본론으로 돌아가 국내에 통일시라시대 이전에 도입되어 재배되던 모과에 추가하여 중국에서 명자라는 새로운 관상용 수종이 도입된다. 이들 두 종은 실제로 나무의 사이즈나 수형면에서는 큰 차이점을 보여 쉽게 구분되지만 동의보감 등 본초서들과 실학자들이 쓴 서적에는 어쩐지 거의 모두 큰 차이점이 없어 구분하기 어려운 열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 내용 일부가 국내 현실에는 약간 부합하지 않은 면이 있어서 그런지 현실에서는 모과와 명자 이들 둘을 제대로 구분하여 부르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표준으로 삼은 중국의 이아(尔雅)와 이를 보충하는 비아(埤雅) 그리고 이를 참고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묘사한 모과 즉 명자꽃의 설명에 국내 실상과 부합하지 않은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모과와 명자를 구분하여 설명하기를 “榠楂木、叶、花、实酷类木瓜,但比木瓜大而黄色。辨之惟看蒂间别有重蒂如乳者为木瓜,无此则榠楂也.”라고 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명자의 잎과 꽃 그리고 열매가 모과와 매우 비슷하지만 열매가 보다 크고 황색이다. 그리고 열매 끝에 젖꼭지 같은 돌기가 있으면 모과이고 없으면 명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명자(현대 모과)가 크고 황색이라는 설명은 옳지만 모과(현대 명자꽃) 꼭지에 돌기 즉 重蒂(중체)가 있다고 설명한 바로 그 대목이 문제인 것이다. 실제로 국내서 살펴보면 모과(중국의 명자)에는 겹꼭지가 없는 것이 당연하고 重蒂(중체)가 있다고 설명되어 있는 명자꽃(산당화)의 열매에도 끝 꼭지(蔕間)에 유두 같은 돌출된 부분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바로 여기서 우리 선조들이 둘의 동정(同定)에 애를 먹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냐 하면 과거 중국에서 약재로 쓰는 모과(우리의 명자꽃)의 열매는 안휘성과 호북성에서 생산되는 것을 선모과(宣木瓜)와 자구모과(资丘木瓜) 등을 최상품으로 꼽았는데 그런 품종의 모과(우리의 명자꽃)는 크고 길쭉하며 끝에 유두 같은 돌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최상품 모과(명자꽃)로 꼽는 선모과(宣木瓜)와 자구모과(资丘木瓜)는 크고 젖꼭지가 있다.

 

게다가 우리 동의보감에서 명자(현대 모과)를 묘사하는 문구에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기형(其形) 혹류모과이차소(酷類木瓜而差小)”이다. 즉 이를 “중국 명자 즉 현대의 모과가 중국 모과 즉 현대의 명자꽃(산당화)의 열매와 비슷하며 그 차이가 거의 없다.”라고 번역하면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만약 이 ‘差小’를 ‘조금 작다’라고 번역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모과의 열매가 명자보다 작다는 것이 되어 국내 현실과는 반대가 된다. 실제로 중국 약재로 쓰는 위에서 언급한 안휘성과 호북성에서 생산되는 품종들은 예외적으로 큰 경우도 있지만 국내에 도입된 명자꽃의 열매는 지름 5cm 내외로 현대의 모과보다는 훨씬 작다. 동의보감에 의한 이 애매한 정보의 영향으로 원산지 중국과는 반대로 열매가 작은 것이 명자가 되고 열매가 큰 것이 모과가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과거 우리 실학자들도 이 내용이 중국 사서나 본초서의 설명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유희(柳僖, 1773∼1837)선생은 1824년경에 펴낸 물명고(物名攷)에서 “榠樝一如木瓜(명자일여모과) 而無重蔕(이무중체) 或云(혹운) 比木瓜小(비모과서) 或云(혹운) 比大(비대)”라고 “명자는 모과와 같은데 겹꼭지가 없다. 명자(현대의 모과)가 혹자는 모과(현대의 명자꽃)에 비하여 작다고 하고 혹자는 크다고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중국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蔕(체)와 鼻(비) 그리고 臍(제)라는 식물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꼭지라는 蔕(체)는 열매 맨 끝 꽃받침이 떨어진 자리 즉 花脱处(화탈처)를 말하고 그 부분이 유두(乳頭) 즉 젖꼭지같이 약간 솟아오른 테두리가 있는 모습을 중체(重蔕)라고 표현하는데 다른 말로는 鼻(비)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배꼽을 뜻하는 臍(제)는 우리가 말하는 열매의 꼭지 즉 열매자루가 달리는 부분을 말한다. 식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조선조 학자들은 이 부분의 해석을 정말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명자꽃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그런 겹꼭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 동정하기 어려웠다.

 

 

 

산단화(山丹花)라는 새로운 자생종(?)의 등장

둘의 구분 기준으로 열매의 차이점만 제시하였는데 위와 같은 사유로 열매의 대소가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하게 된 데다가 어느 쪽에도 존재하지 않는 겹꼭지(重蔕)의 유무로 둘을 구분하라고 하니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뚜렷하게 차이가 나서 쉽게 구분이 가는 나무 자체의 크기나 수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자신있게 둘을 명쾌하게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둘이 헷갈려서 처음에는 둘 다 모과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뒤바꿔 부르기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던 차에 조선중기 이후에 와서는 작은 관목인 모과(현대의 명자꽃)를 닮은 새로운 이름의 수종이 나타난다. 그게 바로 산단화(山丹花)이다. 우선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옥담 이응희(李應禧, 1579~1651)의 옥담시집(玉潭詩集)에 당시 문인들이 주거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24종의 화목류(花木類)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 산단화(山丹花)가 포함되어 있다. 이 산단화가 도대체 무슨 꽃나무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지은 농업 책이자 가정생활 책인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상상 속의 복거(卜居) 방앗간(安碓)인 귀문원(龜文園)에 심어진 화목(花木)을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산단(山丹)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점차 궁금해 진다. 그동안 들어보지 못하던 꽃나무가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문집인 담헌서(湛軒書)에서 그동안의 궁금증을 다소 해소할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 내용 중에 “海棠酷似我國山丹花。但色淡紅而瓣稍大.”라는 문구가 있다. 즉 “해당화는 우리 나라 산단화(山丹花)와 꼭 같은데 다만 색깔이 연분홍에 꽃잎이 좀 큰 편이다.” 하지만 중국의 해당화가 모과의 일종이 아닌 꽃사과의 일종일 수도 있으므로 아직 완전한 답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산에서 피는 붉은 꽃이라는 뜻의 산단화(山丹花)라는 이름으로 보나 홍대용선생의 표현으로 보나 산단화는 우리 자생종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이렇게 되면 일본학자 나카이가 국내서 발견하였다고 1916년 신종 발표한 명자나무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게 된다. 꽃이 더 짙은 붉은 색이고 잎이 더 작다는 것으로 봐서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지만 일본 풀명자의 유사종으로 통합된 나카이의 신종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도 명자나무 자생지라는 말이다. 이 점에 관하여는 현재도 국제적으로 논란중에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성급하게 자생지가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다가 드디어 확실한 답을 조선말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문집인 운양집(雲養集) 중 면양행음집(沔陽行吟集)의 영첩경해당(詠貼梗海棠)이라는 시에서 찾았다. “俗以山丹爲貼梗海棠(속이산단위첩경해당)。山丹深紅(산단심홍)。不類海棠(불류해당)。余常疑之(여상의지)。靈塔山下人家得山丹一本(영탑산하인가득산단일본)。移植盆中(이식분중)。花開淡白淺紅(화개담백천홍)。與海棠相似(여해당상사)。山丹之得名海棠(산단지득명해당)。以有此一種(이유차일종)。盖貴品也(개귀품야).” 번역문을 보면 “세속에서는 산단(山丹)을 첩경해당이라고 하는데, 산단은 짙붉은 색이라, 해당과 다르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것을 의심해왔다. 영탑산(靈塔山) 아래 인가에서 산단 한 그루를 얻어다 화분에 옮겨 심었더니 담박하고 옅은 붉은색 꽃이 피는 것이 해당과 비슷했다. 산단이 해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이런 한 종류가 있기 때문이니, 아마도 귀한 품종인 것 같다.” 정말 시원하고도 귀중한 답을 얻었기에 김윤식선생의 그 시를 감상하고 가자.

 

영첩경해당(詠貼梗海棠) -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연세대학교 기태완역

却把鉛華淡抹匀(각파연화담말윤)

빛깔 고운 분을 옅게 칠하고

衣衫原不染香塵(의삼원불염향진)

옷 적삼은 향기로운 먼지에 물들지 않았네

薄醺又被東風困(박풍우피동풍곤)

약간 취한 데다 봄바람까지 맞아 노곤하더니

春睡盈盈小太眞(춘수영영소태진)

봄잠 자는 아리따운 자태 작은 태진일세

 

화분에 심을 정도의 작은 사이즈라는 점과 꽃 색상이 새빨간 선홍색에서부터 담홍색 그리고 백색까지 다양하고 중국 이름이 첩경해당(貼梗海棠)인 점으로 봐서 이 관목은 중국의 모과 즉 현대의 명자꽃이거나 그를 닮은 유사종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중국 모과를 국내서는 모과라는 이름 외에도 산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동안의 궁금증 중 하나가 풀린다. 바로 1943년 정태현선생이 발간한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 학명 Chaenomeles speciosa인 중국식물학계에서 추피모과(皱皮木瓜) 또는 첩경해당(貼梗海棠)이라고 하고 중국 시경과 본초강목 그리고 일본에서도 모과(木瓜)라고 하는 관목에다가 다소 엉뚱한 산당화(山棠花)라는 우리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이유를 말이다. 이건 필시 착오에 의한 산단화(山丹花)의 전와(轉訛)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앞의 홍만선선생이나 김윤식선생의 묘사에 의하면 우리 산단화는 중국 원산의 명자꽃보다는 일본 원산의 풀명자에 가깝다. 이렇다면 나중에 풀명자에 통합된 나카이의 신종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도 정태현선생은 1943년 산당화라는 이름을 중국 원산 모과(명자꽃)에다가 붙였다. 이것은 또 다른 넌센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동안 나카이의 신종 즉 Chaenomeles trichogyna(명자나무)를 중국 모과(명자꽃)의 유사종으로 봐왔기에 그 누구를 탓할 수는 없다. 여하튼 혹자는 정조시대 학자인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의 문집인 간옹선생문집(艮翁先生文集)의 다음 시를 산당화의 출처로 봐서 명자꽃의 이명 중 하나로 설명하지만 글쎄 그건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1780년부터 이듬해까지 삼척부사를 역임한 간옹선생이 말한 산당화(山棠花)는 아무래도 죽서루 바닷가 모래에서 자라는 해당화(海棠花)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름내내 꽃이 피다가 가을이 되면 마무리하는 것이 해당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변의 고운 모래인 명사(鳴沙)와 대관령 및 죽서루라는 지명이 해당화에 어울린다.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작

山棠花盡不勝秋(산당화진부승추)。

久謫鳴沙憶倦遊(구적명사억권유)。

世路初經大關嶺(세로초경대관령)。

聖恩猶借竹西樓(성음유차죽서루)。

 

이렇다면 현재 산당화가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정명에서 탈락하고 최근에 명자꽃으로 변경된 이상 이 수종을 앞으로는 산단화로는 부를지언정 산당화로는 더 이상 부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山丹花(산단화)가 학명 Lilium pumilum인 큰솔나리를 말한다. 그래서 국내 일부 고전의 山丹花(산단화)를 홍백합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식물분류학 도입이후 한중에서 보인 이상한 행보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내용을 정리를 하자면 우리나라는 최소한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관목 약용 수종인 명자꽃(산당화)이 도입되어 중국 이름 그대로 모과라고 불러왔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전에 교목인 현재의 모과나무가 관상용 또는 약용으로 추가 도입 되자 본초학자나 실학자들은 이 교목의 중국 이름이 명자라고 여러 문헌에서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둘의 구분이 어렵다는 이유로 나중에 도입된 중국 명자도 모과로 싸잡아 불리고 먼저 도입된 중국 모과를 명자로 뒤섞여 부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에서는 중국의 모과 즉 현재의 명자꽃과 유사한 새로운 우리 자생종(?)을 산단화(山丹花)라는 우리 독자적인 이름으로도 불렀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 동양에도 식물분류학이 도입되면서 각국이 식물 명칭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먼저 중국에서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중국의 대표적인 수목학자인 진영(陈嵘, 1888~1971)선생이 1937년 발간한 중국수목분류학(中国树木分类学)에서 글쎄 시경에서 목리(木李)라고 하고 본초강목 등 중의학계에서 명자(榠楂)라고 부르는 교목을 엉뚱하게도 그냥 모과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 1978년에 최종 발간된 중국식물지에서도 명자나무속 수종들과 모과나무를 모두 하나의 모과속으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 지금은 Pseudocydonia속으로 분리되었지만 그 당시 학명 Chaenomeles sinensis인 목리(木李) 또는 명자(榠楂)로 불리던 교목에다가 모과라고 모과속의 대표격인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그냥 모과가 아니라 또 다른 이름인 광피모과(光皮木瓜) 정도의 이름을 붙였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을 그냥 모과라고 하여 혼란을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시경시절부터 모과라고 불렀고 중의학계에서도 무려 2천 년 동안 모과라는 이름으로 약재로 써 왔던 학명 Chaenomeles speciosa인 관목에게는 추피모과(皱皮木瓜)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목도(木桃)나 사자(楂子)라고 했던 소교목인 중국명자꽃에는 모엽모과(毛叶木瓜)라는 이름을 붙이고 일본에서 도입된 학명 Chaenomeles japonica인 왜성 관목인 풀명자에게는 일본모과(日本木瓜)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 1937년 정태현선생 등에 의하여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된 식물목록집인 조선식물향명집에 그동안 동의보감이나 물명고 광재물보 등에서 명자(榠樝)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던 Chaenomeles sinensis인 교목에다가 모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글쎄 그 당시 중국 학자 진영(陈嵘)과 어떤 교감이라도 했다는 것인지 정말 의문스럽다. 일제강점기 시절이던 그 때 일본에서는 이 교목을 모과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명자(榠樝)로 쓰고  쿼린(クワリン)이라고 발음하였기에 바로 그 조선식물향명집에 일본명을 그렇게 옆에 기록하고서도 말이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모과를 카린(カリン)이라고 발음하고 한자로는 화리(花梨)나 화려(花櫚) 또는 명자(榠樝)로 표기한다. 그래서 한동안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도감에서조차 나무이름은 모과나무라고 하지만 그 “과실을 명사라 하며 약용한다.”라고 기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 우리나라 어디에선가 발견한 신종이라며 1916년에 발표한 학명 Chaenomeles trichogyna Nakai를 별도 등재하고서는 국명을 명자나무라고 하고 이명으로 애기씨꽃나무라고 붙였다. 그 옆에 일본명이라며 조선모과(朝鮮木瓜)라는 뜻의 일본 이름 테후센보케(テフセンボケ)를 기록하고서도 말이다.  지금은 이 학명이 일본원산의 풀명자 학명 Chaenomeles japonica에 흡수 통합되었는 데다가 국내 자생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외래종으로 인정하지만 그 당시로는 우리 자생종인 별도의 신종으로 판단하였으므로 이 종을 조선식물향명집에 수록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왜 하필이면 명자나무이냐는 것이다. 명자(榠樝)란 키가 5~10m까지 자라는 앞에서 언급한 학명 Chaenomeles sinensis인 교목에다가 붙였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차라리 우리 자생종이라는 이 신종에다가 산단화(山丹花)라는 이름을 붙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큰 아쉬움이 있다. 결국 명자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교목에는 모과라는 이름을 붙이고 훗날 결국 키가 1m에 불과한 왜성관목인 일본 풀명자의 유사종으로 편입되는 우리 자생종에다가 명자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일본 원산 풀명자인데 우리 자생종이라고 명자나무로 당초 등록된 수종은 이 종에 통합되었다. 

 

 

그 결과 이미 신라시대부터 이 땅에 도입되어 약용 및 식용 또는 관상용으로 재배하던 관목인 중국 원산 모과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것인지 아예 수록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었던지 정태현선생이 1943년 조선삼림식물도설에는 중국 추피모과(皱皮木瓜)인 학명 Chaenomeles speciosa와 일본 풀모과(草木瓜)인 학명 Chaenomeles japonica를 등재하는데 추피모과에는 과거부터 써 오던 모과라는 이름은 이미 선점되었으니 쓸 수가 없었기에 산당화(山棠花)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일본 풀모과에는 풀명자나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일본에서 풀모과(草木瓜)라고 하는 것을 굳이 풀명자나무(草榠樝-)로 변경한 것을 보면 정태현선생 등은 모과와 명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반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즉 열매가 큰 것이 모과이고 작은 것을 명자로 말이다. 헐! 허준선생이나 유희선생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혼이 좀 나야 될 듯싶다. 그래서 중국에서 모과(木瓜)나 추피모과(皱皮木瓜) 또는 첩경해당(貼梗海棠)이라고 불리며 우리나라에 오래전에 도입되어 모과라는 이름으로 쭉 재배되어 왔던 관목이 갑자기 산당화(山棠花)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당화(山棠花)는 조선 후기 간옹 이헌경(李獻慶, 1719~1791)선생이 해당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쓴 바가 있지만 모과나 명자와는 전혀 무관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아마 조선 후기부터 일각에서 새로운 우리 자생종이라고 불리던 꽃이 진한 홍색이고 잎이 작은 산단화(山丹花)를 염두에 둔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 인지 그만 산당화(山棠花)로 전와(轉訛)되고 만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교목인 명자는 국내서 모과가 되고 중국 관목인 모과는 국내서 산당화가 되었으며 나중에 일본 풀명자로 통합되는 국내 신종은 명자나무가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제대로 된 이름이 하나도 없다.

 

한편 일본 나카이가 우리나라에서 발견하였다는 신종으로 조선식물향명집에 명자나무라는 이름으로 수록된 Chaenomeles trichogyna는 독립된 종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지는 못하고 일본 원산 풀명자(草木瓜)인 Chaenomeles japonica나 중국 원산 추피모과인 Chaenomeles speciosa 어느 한쪽으로 통합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학자들이 쉽게 결론은 못내리고 논란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 때는 중국 모과에 가깝다고 판단되어 학명을 Chaenomeles lagenaria (Loisel.) Koidz.로 표기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학명이 현존 중국 추피모과의 학명 Chaenomeles speciosa (Sweet) Nakai보다 3년이나 족보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국 Chaenomeles lagenaria와 함께 일본 원산 풀명자의 유사종으로 최종 판명되어 결국 Chaenomeles japonica의 이명으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조선식물향명집에서 우리 자생종에 처음 쓴 명자나무라는 이름은 현재 일본 원산의 풀명자에 흡수통합되었으므로 국명 명자나무는 중국 원산 산당화와는 별개의 수종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 한참동안 국내 신종 Chaenomeles trichogyna가 중국 추피모과의 유사종으로 인식되어 왔는 데다가 중국 모과(추피모과)는 오래전에 도입되어 과거 신라시대부터 재배되어 왔으므로 국내 보급 비중면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세하기에 명자나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명자꽃(산당화)으로 통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명자의 어원은 과육이 목질이라는 뜻

하지만 도대체 명자(榠楂)라는 이름이 뭐가 그리 좋다고 모과(木瓜)라는 이름은 철저히 배제하고 이리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에서 명자(榠楂)의 어원을 살펴보면 열매에 수분은 거의 없고 목질이 강하여 씹으면 찌꺼기(渣)가 많이 생겨 도저히 삼키기 어려워 뱉어내야만 하는 과일이므로 찌꺼기가 많은 나무라고 楂(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남방 오월(吳越) 즉 만(蠻)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었기에 만사(蠻楂)라고 하다가 변하여 명사(榠楂) 즉 명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좋은 의미를 가진 이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약성이 떨어지고 시면서도 떫은 맛에 목질이라서 식용으로도 전혀 적합하지 않은 중국 원산 교목인 모과에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중국에서 약용으로 널리 쓰는 관목인 명자꽃은 수분함량도 많으며 신맛은 있지만 떫은 맛이 거의 없어 생식도 가능한 수준인데 이 수종에다가 자꾸 명자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애쓰는 모습은 정말 아닌 것 같다. 중국에서는 중의학계에서만 명자(榠楂)나 사자(楂子)라는 용어를 써도 식물학계에서는 일체 쓰지 않고 모든 수종을 모과(木瓜)로 통일하여 불렀다. 모과가 별도의 속으로 분리된 지금 현재도 명자나무속을 모과해당속(木瓜海棠属)이라고 하며 구성 수종들을 모두 xx모과(木瓜) 또는 xx해당(海棠)이라고 하지 명자라는 이름으로는 부르지 않는다. 일본 또한 명자나무속 즉 Chaenomeles속은 그 어떠한 수종도 명자라고 하지 않고 모두 모과 또는 xx모과라고 부른다. 마지막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1937년 이후 우리나라 식물학계에서 모과와 명자의 이름을 하루 아침에 뒤바꿔 버렸고 거기에다가 생뚱맞은 산당화라는 이름까지 끌어와 엉뚱한 수종에다가 붙여서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2017년 이후 불과 몇 년 사이에 과거 우리 선조들이 천 년 이상 모과라고 불러왔던 학명 Chaenomeles speciosa인 중국 원산 관목을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산당화에서 명자나무로 그리고 다시 명자꽃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찌 표준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또 다시 변경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농가에서 모과라는 약재로 대량 재배하는 명자꽃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