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장미과 아몬드아과/명자 모과속

1899 모과나무 - 명자(榠樝, 榠楂)와 하루 아침에 뒤바뀐 이름

낙은재 2023. 11. 11. 21:36

과거 명자였던 모과나무의 꽃과 열매

 

 

하루아침에 명자와 뒤바뀐 이름 모과

가을에 크고 노란 열매가 달려 눈길을 끄는 정원수 중에서는 제법 큰 나무를 현재 우리 국민들은 모두 모과나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모과나무를 모과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어쩐지 뒷 맛이 개운하지 않다. 이번에 모과와 명자나무속을 탐구하면서 우리 이름 모과와 명자가 일제강점기시절부터 완전히 뒤바뀐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과와 명자꽃의 원산지인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을 우리 선조들도 그대로 따라서 오랫동안 불렀는데 어찌된 일인지 1937년 정태현선생 등이 펴낸 조선식물향명집에서 학명 Pseudocydonia sinensis인 중국 원산 명자(榠樝)를 모과(木瓜)라고 했다. 조선식물향명집에 중국명은 표기가 없지만 일본명은 표기되어 있는데 그게 바로 쿼린(クワリン)이다. 쿼린(クワリン)은 일본에서 지금은 카린(カリン)이라고 발음하는 명자(榠樝)를 과거에 이르던 말이다. 그리고 조선식물향명집에는 또 하나의 명자나무속 수종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그게 명자나무이다. 하지만 학명이 Chaenomeles trichogyna로 표기된 이 명자나무는 지금의 명자꽃이 아니고 나중에 일본 원산 풀명자에 통합되는 우리 자생종으로 일본학자가 테후센보케(テフセンボケ) 즉 조선모과(朝鮮木瓜)라는 뜻의 일본 이름을 붙였던 수종이다. 그 명자나무에는 애기씨꽃나무라는 이명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뚜렷한 명분도 없이 명자는 모과로 모과는 명자로 뒤바꾼 것이다.

 

과거 모과였던 명자꽃의 꽃과 열매
테우센(テウセン)으로 변한 테후센(テフセン)은 조선(朝鮮)을 의미하며  쿼린(クワリン)은 花櫚(화려) 즉 모과나무를 말한다.

 

 

이렇게 되어 조선식물향명집에는 신라시대부터 이땅에서 약용이나 관상용으로 재배하던 모과(木瓜)가 등록에서 빠지게 되었는데 이를 보완코자 정태현선생이 몇 년 후인 1943년에 펴낸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 중국 원산 모과(木瓜)는 산당화(山棠花)라고 하고 일본 원산 초모과(草木瓜)는 풀명자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일제강점기에 우리 식물명이 창씨개명되었다고 말하는데 이건 일본인들이 아닌 우리 학자들에 의하여 완전히 거꾸로 바뀐 것이다. 도대체 그 당시 왜 이렇게 갑자기 황당하게 뒤바꾸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다분히 의식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식물분류학계가 일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던 일제강점기이던 그 당시 일본에서도 중국 원산 명자꽃은 보케(ボケ) 또는 카라보케(カラボケ)라고 한자로는 모과(木瓜) 또는 당모과(唐木瓜)라고 썼으며 일본 원산 풀명자의 경우 쿠사보케(クサボケ)라고 한자로 초모과(草木瓜)로 써서 이들을 모두 모과(木瓜)라고 부른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터인데도 이상하게 Chaenomeles(명자나무)속 수종들에게 모과라는 이름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명자나 산당화라는 이름으로 대체한 것이다.

 

만약 하나의 실마리될 만한 변화가 있었다면 20세기 초반 식물분류학이 도입되면서 그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수목학자인 진영(陈嵘, 1888~1971)이 1937년 발간한 중국수목분류학(中国树木分类学)에서 그동안 시경에서 목리(木李)라고 하고 본초강목 등 중의학계에서 명자(榠楂)라고 부르던 현재 우리가 모과라고 부르는 교목을 우리가 명자꽃이나 중국명자꽃 그리고 풀명자라고 부르는 관목들과 함께 Chaenomeles(명자나무)속을 구성하면서 모과속이라고 부르고 그 중에서 학명 Chaenomeles sinensis인 교목을 엉뚱하게 중국 대표적인 수종으로 삼아서 그냥 모과(木瓜)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이게 혹시 우리나라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하지만 그 당시 조선식물향명집에 중국 정보는 이름조차 기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봐서는 긴밀한 교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하튼 중국 학자 진영이 생뚱맞게 붙인 이름이 1978년에 완성된 중국식물지에도 그대로 채택되어 모과(木瓜)라는 정명으로 수록되어 원산지 중국에서도 혼란을 야기시켰다. 중국식물지에서는 그동안 중국에서 2천 년 이상 그냥 모과로 통하던 명자꽃을 추피모과(皱皮木瓜)로 중국명자꽃은 모엽모과(毛叶木瓜)로 일본 원산 풀명자는 일본모과(日本木瓜)라는 이름을 각각 붙인 것이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교목인 모과나무는 현재 원산지인 중국과 우리나라 식물학계의 정명이 동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에서도 모과와 명자를 우리처럼 완전히 뒤바꿔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우리가 명자라고 부르는 관목들을 여전히 모과라고 부르며 다만 앞에 구분하기 위한 수식어를 붙여서 추피모과(皱皮木瓜)나 모엽모과(毛叶木瓜) 또는 일본모과(日本木瓜) 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하튼 1937년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명자(榠楂)라고 불리던 교목이 갑자기 모과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는데 그 여파는 양국이 달랐다. 중국에서는 워낙 명자의 재배역사가 장구한 데다가 시경에서는 목리(木李)라고 하였지만 송나라 시대의 도경본초나 명나라 시대의 본초강목 등 중국의 의학서에서 명자(榠楂)라고 불러 명자가 널리 인식되어 있었기에 아무리 중국식물지에서 모과(木瓜)라고 하여도 민간에서는 주로 명자라고 부르고 있고 지금도 주로 그렇게 통한다.

 

건조시킬 때 수축하지 않는다고 모과나무는 광피모과라고 하고 많이 수축한다고 명자꽃을 추피모과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부터 도입되어 모과라고 불리었으며 동의보감 등 한의학에도 모과라고 하였고 조선말 여러 실학자들의 문헌에도 모두 모과라고 불리던 중국 원산의 관목인 지금의 명자꽃(산당화)과는 달리 뒤늦게 조선시대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가 현재 모과라고 부르는 교목인 중국 명자는 도입 초창기부터 다소 헷갈려서 모과라는 이름과 명자라는 이름이 혼동되는 모습을 보여왔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20세기 초 식물분류학계에서 열매가 큰 교목이 모과이고 꽃이 아름다운 작은 관목이 명자라고 확실하게 구분하여 주니 일반인들은 따를 수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 결과 그동안의 명칭 혼란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는 그 누구도 모과나무와 명자나무가 비슷하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과거 우리 선조들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유사한 종의 혼란스럽던 식물 명칭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바람직하지만 과거 우리 선조들이 문헌에서 모과(木瓜)라고 기록한 것과 심지어는 동의보감 등에 기록된 모과까지도 죄다 현대 우리가 모과라고 하는 교목으로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 이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과거 우리 선조들이 명자라고 부르던 것을 모과라고 바꿔서 부르는 것은 원산지 중국과도 궤를 같이 하니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 고문서나 한의학서적의 모과까지 소급하여 현재의 모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고려시대 이전의 문헌에 나오는 모과는 당연히 현대의 명자꽃을 말한다. 그리고 현대의 모과가 국내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어 명자와 모과라는 이름이 같이 등장하던 조선 중기 이후에 다소 혼용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의학계와 실학자들은 끝까지 모과와 명자를 제대로 구분했다. 그러므로 우리 고문헌의 명자는 모두 현대의 모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면 되고 고문헌의 모과는 대부분 명자꽃을 지칭하지만 조선시대 일부 문헌에는 현대의 모과나무를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태현선생 등이 명자나무속에서 분리되어 독립한 모과나무속 교목인 학명 Pseudocydonia sinensis만을 모과라고 하고 나머지 명자나무속 즉 Chaenomeles속 수종들은 철저히 모과라는 이름을 배제하고 명자나 산당화로 부르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 가설도 성립하지 않는다. 모과나무속은 1906년 명자나무속에서 분리되었지만 1937년 당시 중국은 분리론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모두를 모과라고 하였으나 우리는 분리론을 따라서 1937년 조선향명집에 이미 모과를 새로운 Pseudocydonia(모과나무)속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1943년 정태현선생의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는 모과나무도 명자나무속 하나의 종으로 편입하여 학명 Chaenomeles sinensis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과거 명자와 모과의 명칭 혼란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관목인 명자꽃이 도입되어 중국이름 그대로 모과라고 불리면서 약용으로 또는 관상용으로 재배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또 다른 수종인 키가 큰 명자가 도입되었지만 국내서 그만 기존의 모과와 구분이 어려워서 혼동하여 그 이름에서 혼선이 온 것이다. 지금 현재는 우리 주변에서 명자꽃과 모과나무를 혼동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다. 이들 둘은 나무의 크기나 열매의 크기 그리고 꽃모양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구분하기가 매우 쉽다. 하지만 과거에는 중국에서 온 둘을 구분하는 방법은 단지 열매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교 설명하였는데 문제는 여기에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은 대목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표준으로 삼은 중국의 이아(尔雅)와 이를 보충하는 비아(埤雅) 그리고 이를 참고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모과와 명자를 구분하여 설명하기를 “榠楂木、叶、花、实酷类木瓜,但比木瓜大而黄色。辨之惟看蒂间别有重蒂如乳者为木瓜,无此则榠楂也.”라고 한다. 참고로 중국에서 명자를 榠楂와 榠樝로 혼용하여 쓴다. 중국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명자의 잎과 꽃 그리고 열매가 모과와 매우 비슷하지만 열매가 보다 크고 황색이다. 그리고 열매 끝에 젖꼭지 같은 돌기가 있으면 모과이고 없으면 명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명자(현대 모과)가 크고 황색이라는 설명은 옳지만 모과(현대 명자꽃) 꼭지에 돌기 즉 重蒂(중체)가 있다고 설명한 바로 그 대목이 문제인 것이다. 실제로 국내서 살펴보면 모과(중국의 명자)에는 겹꼭지가 없는 것이 당연하고 重蒂(중체)가 있다고 설명되어 있는 명자꽃(산당화)의 열매에도 끝 꼭지(蔕間)에 유두 같은 돌출된 부분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바로 여기서 우리 선조들이 둘을 구분하느라 애를 먹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냐 하면 과거 중국에서 약재로 쓰는 모과(우리의 명자꽃)의 열매는 안휘성과 호북성에서 생산되는 것을 산지명을 붙여서 선모과(宣木瓜)와 자구모과(资丘木瓜) 등으로 부르면서 최상품으로 꼽았는데 그런 품종의 모과(현재의 명자꽃)들은 크고 길쭉하며 끝에 유두 같은 돌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동의보감에서 명자(현대 모과)를 묘사하는 문구에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기형(其形) 혹류모과이차소(酷類木瓜而差小)”이다. 즉 이를 “중국 명자 즉 현대의 모과가 중국 모과 즉 현대의 명자꽃(산당화)의 열매와 비슷하여 그 차이가 거의 없다.”라고 번역하면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만약 이 ‘差小’를 ‘조금 작다’라고 번역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모과의 열매가 명자보다 작다는 것이 되어 국내 현실과는 반대가 되는 것이다.

 

중국 모과 즉 명자꽃은 열매 끝에 유두와 같은 겹꼭지가 있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서는 보기 힘든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 숙종때 유학자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찬한 연행일기(燕行日記)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이 백과사전식으로 찬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 몇몇 문서에 교목인 중국 명자를 모과라고 기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신이자 화가 겸 서예가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선생의 시집인 무헌집(楙軒集)에 보면 충청도 서산일대에 있던 평신진(平薪鎭)의 첨사(僉使)로 재직할 당시 공관 침실 후원에 큰 모과 한 그루가 있어 무헌(楙軒)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인 후한(25~220) 시대에 저술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등장하는 무(楙)는 중국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시경의 모과(木瓜)를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모과나무가 아닌 관목인 명자꽃을 말하는 것이다. 신위선생 자신도 무(楙)가 모과라고 즉 楙木瓜也(무모과야)라고 언급하면서도 관사 뒤에 큰 나무라고 언급한 그 내용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큰나무인 현대의 모과나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무(楙)에 대하여 더 알아보자. 무(楙)는 茂(무)와 같은 의미의 글자로 무성하다는 뜻이다. 명자꽃 즉 모과의 줄기가 무성하게 나오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풀이한다.

 

무(楙)는 명자꽃의 또 다른 중국 이름

그런데 우리나라 일각에서 모과나무가 아닌 명자꽃을 뜻하는 이름 무(楙)에 관한 기록으로 엉뚱하게 국내에 모과나무가 도입된 시기를 추정하려고 한다. 그게 바로 우리나라 유일한 모과나무 천연기념물이라는 연제리 모과나무이다. 조선 초기 유윤(柳潤, ?~1476)이라는 선비가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으나 1455년 단종이 폐위되자 관직을 버리고 청주 무동(楙洞) 즉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로 들어가 은거한다. 임금인 세조가 수차례 불러도 거절하자 세조가 그에게 무동처사(楙洞處士)라는 어서(御書)를 하사하여 세상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무동처사가 은거한 마을에 모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그 마을을 모과울 한자로는 무동(楙洞)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 그 나무가 아직도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연제리에 남아 있어 201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그 나무의 수령을 처음에는 대략 300~350년으로 추정하다가 나중에 천연기념물 지정 과정에서 슬쩍 500년으로 상향되었다고 한다. 유윤선생이 말년에 심었더라도 최소한 550년은 되어야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유윤선생이 그 나무를 그림으로 그려서 자기는 모과와 같은 쓸모없는 사람이니 부르지 말아 달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벼슬을 사양할 때 이미 제법 큰 나무라는 이야기가 되니 최소한 600년은 넘어야 될 성싶다. 그 마을을 무동이라고 부를 정도라면 최소한 50년은 넘은 나무라야 어울리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연제리 모과나무 - 하지만 무(楙)는 명자꽃이지 모과나무가 아니다. 

 

 

그 당시 선비라면 무(楙)가 바로 중국 모과를 뜻한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중인 1527년에 어문학자 최세진(崔世珍)이 펴낸 한자 학습서인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楙(무)는 모괏 무로 榠(명)은 명쟛 명으로 樝(자)는 명쟛 쟈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과는 현대의 모과나무가 아닌 그 당시의 모과 즉 명자꽃을 말하고 명쟈라는 것이 바로 현대의 모과인 것이다. 아마 그 충청도 마을에서 약용 모과를 집단으로 재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모과울이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약재로 인근 공주지역의 모과가 품질이 좋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세조가 아닌 광해군이 어필을 하사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어느 쪽이던 정사에는 없다. 다만 조선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1811~1876)선생이 문집에서 유윤선생의 손자인 삼성당(三省堂) 유민(柳汶)의 묘지명(墓誌銘)을 기록한 내용 중에 “祖諱潤。有文章。蚤登司馬。端廟遜位後。隱居淸州之西。累徵不起。世稱楙洞處士.”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에 알려진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왕이 어필을 하사한 이야기는 없고 단지 수차례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며 세간에서 그를 무동처사라고 불렀다는 언급만 있다. 이런 기록의 영향으로 후손들이 현대의 모과나무를 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연제리에 있다는 그 나무가 실제로 500년은커녕 300년이 되었는지도 의문이다.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 392호로 지정된 개풍군 풍덕리 모과나무는 수령이 250년에 불과하고 또 다른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북한에서 말하는 천연기념물 454호로 지정된 해주시 영양리에 있는 모과나무는 높이가 8.5m인데도 수령이 110~160년이라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수명이 짧은 모과나무는 원산지 중국에서도 수령 500년이며 최고령으로 친다. 그리고 수종에 무관하게 우리나라 고목들의 나이 추정은 알려진 그대로 무조건 믿을 바는 못 된다는 이야기이다.

 

북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250년 개풍모과나무와 수령 110년 해주모과나무(우)

 

 

따라서 천연기념물 522호로 지정된 연제리 모과나무가 유윤시절에 심어졌다는 이야기는 수긍하기 의심스럽다. 게다가 무(楙)가 원래 현재의 모과나무가 아닌 명자꽃을 뜻하는 한자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윤선생보다 약간 이른 시대의 사람인 조선 초기의 문인이자 불교 승려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사찰 뜰에서 무화를 보고’라는 뜻의 사정간무화(寺庭看楙花)라는 다음의 시는 정말 그 시대에 현대의 모과가 국내에 도입되었는지 헷갈리게 한다. 주렁주렁 달린 열매에 가지가 늘어지거나 단생이므로 꽃이 성글게 보이는 것은 현대의 모과에 대한 표현 같은데 제목이 열매가 아닌 꽃을 감상한 것이므로 이건 꽃이 아름다워 flowering quince로 불리는 명자꽃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귀엽고 아름다운 새소리와 잘 어울리는 꽃은 아무래도 모과꽃보다는 명자꽃이 제격이다. 그래서 매월당 시에서의 무(楙)도 글자 그대로 그 당시 모과인 명자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함부로 매월당이 현재의 모과나무를 잘못 무(楙)로 썼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조선 최고의 천재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다.

 

寺庭看楙花(사정간무화) 김시습-한국불교전집역

 

去歲初看葉落時(거세초간락엽시)

작년 처음 본 건 낙엽 지던 때

纍纍秋實偃柔枝(누루추실언유지)

주렁주렁 열매에 가지 늘어졌지

今年又見踈花蘂(금년우견소화예)

올해 또 보니, 성근 꽃들에

恰恰鶯聲又一奇(흡흡앵성우일기)

꾀꼴꾀꼴 새소리도 기이하구나

 

모과나무의 국내 도입 시기

그렇다면 국내에 현재의 모과나무가 언제 도입되었을까? 우리 문헌에 명자(榠樝)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어문학자 최세진(崔世珍)이 1527년에 펴낸 한자 학습서인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모괏 楙(무)와는 별도로 榠(명)은 명쟛 명으로 樝(사)는 명쟛 쟈로 풀이하고 있다. 그후 17세기에 榠樝를 명쟈라고 언문으로 부기한 허준선생의 동의보감이 있다. 위의 문헌에서 보면 원래 국내서 사로 발음되는 한자 樝는 명자를 뜻할 때는 처음부터 쟈로 읽힌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분히 중국의 발음 zhā(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나중에 명쟈가 현재의 명자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18세기에 와서는 실학자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1781)선생이 그가 전라도 순창에 조성한 정원인 순원(淳園)에 명자(榠樝)와 무(楙)를 별도로 각각 식재하였다는 기록이 여암유고(旅菴遺稿)에 남아 있다. 그리고 조선 말기인 19세기에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가 쓴 종합 농업기술서인 농정회요(農政會要)에는 모과(木瓜)와 명자(榠樝)가 각각 별도의 과일나무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는 모과나무 즉 중국 명자가 최소한 1527년 이전에 도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전의 문헌은 아직 찾지 못했다. 모과나무를 카린(カリン)이라고 발음하고 한자로 화리(花梨) 또는 명자(榠樝)로 쓰는 일본에서도 그 정확한 도입시기와 도입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도시대(1603~1868)에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었다고 대부분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관영(寛永) 11년 즉 1634년경에 나가사키로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100년 이상 늦게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통하여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와 같이 훈몽자회에서부터 동의보감 그리고 여러 실학자들의 문헌에 명자(榠樝)라고 분명하게 모과나 무(楙)와는 다른 수종으로 소개된 크고 노란 열매를 맺는 교목을 식물분류학이 도입되면서 하루 아침에 모과와 이름을 뒤바꾼 결과 한의학계에서의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오늘 현재 네이버에서 ‘모과’를 검색하면 소위 지식백과로 분류되는 웹 페이지가 다수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하나 같이 사진은 현재 모과를 쓰고 있지만 그 내용은 거의 모두 명자꽃 열매에 대한 것들이다. 심지어는 한의학관련 정보들까지 과거 모과와 명자로 확연하게 구분하던 것을 이제는 현재의 모과도 과거의 약재 모과(명자)의 범주에 포함시켜서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명자꽃의 열매인 한약재 모과와 모과나무의 열매 한약재 명자는 그 약효에서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그래서 동의보감에서도 대동소이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 성질과 맛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명자꽃의 열매의 성미는 시지만 떫은 맛은 없고 수분이 많으며 따뜻하지만 모과는 시면서도 떫고 목질이며 평이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약효에 관하여는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명자꽃보다는 모과나무 열매 수확이 많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현재의 모과도 한약재로 중국 모과와 거의 같은 약성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 그래서 국립수목원에서 운영하는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의 도감에도 얼마전까지 모과나무편에 “과실을 명사라 하며 약용한다.”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이제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제는 모과나무 열매도 한약재 모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과 – 과거의 명자(榠樝)

성미 : 酸(산) 澀(삽) 平(평)

약효 : 消痰(소염) 祛風濕(거풍습) 治噁心(치오심) 泛酸(봉산) 吐瀉轉筋(토사전근) 痢疾(이질) 風濕筋骨酸痛(풍습근골산통)

 

현재의 명자꽃 – 과거의 모과(木瓜)

성미 : 酸(산) 温(온)

약효 : 平肝舒筋(평간서근) 和胃化湿(화위화습) 用于湿痹拘挛(용우습비구련) 腰膝关节酸重疼痛(요슬관절산중동통) 吐泻转筋(토사전근) 脚气水肿(각기수종)

 

중국과 일본에서도 명칭 혼란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모과와 명자를 혼동하는 사람들은커녕 이제는 둘이 비슷한 종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명칭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일반인들이 모과라고 하는 새로운 과일이 있다. 그게 바로 중앙아메리카 열대지역이 원산지인 학명 Carica papaya인 파파야를 지칭한다. 상록 활엽 소교목인 이 수종의 중국 정명이 番木瓜(반모과)이지만 일반에게는 그냥 모과(木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木瓜(모과)는 식물분류학적으로는 우리 모과를 뜻하고 중의학적으로는 명자꽃을 뜻하며 마트에서는 파파야를 뜻하게 되어 혼란스럽다. 그래서 중국에서 우리 모과를 지칭하려면 명자(榠楂)나 광피모과(光皮木瓜)로 불러야 뜻이 명확해 진다. 광피모과란 모과의 육질이 목질이라서 단단하여 건조시켜도 크게 수축하지 않고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건조시 크게 수축하여 주름이 생기는 모과 즉 추피모과(皱皮木瓜)에 대비하여 붙인 이름이다. 일본에서는 모과를 카린(カリン)이라고 발음하고 한자로 화리(花梨) 또는 화려(花櫚)라고 쓰며 명자(榠樝)라고도 쓰기는 하지만 그 어원은 중국 이름과는 무관하다. 일본 카린은 엉뚱하게도 단단한 모과나무의 목재에서 온다. 일본에서 카린이란 자단(紫檀)이나 흑단(黒檀), 철도목(鉄刀木) 등 재질이 매우 단단한 수종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특히 모과나무 목재가 학명 Pterocarpus indicus인 인도자단(印度紫檀) 즉 화려(花櫚)의 무늬를 닮았기에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모과나 명자와는 전혀 무관한 이름이므로 일본에서는 별 혼란이 없을 듯 하지만 실상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일본에서도 모과나무의 열매인 모과를 생약명으로 화모과(和木瓜)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모과나무를 결코 모과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그 열매인 카린(榠樝)을 중국 약재 모과(木瓜)의 대용으로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과거 망고와 모과를 혼동하여 망고의 이명이던 암라수(菴羅樹)로 모과나무를 부르는 지역도 있고 나가노지역에서는 초창기 포르투갈에서 도입된 털모과 즉 마르멜로(マルメロ)와 혼동하여 털모과를 지금도 카린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이래저래 여러 나라에서 모과나무는 그 이름이 혼란스럽다.

 

중국 마트에 가면 열대 과일인 파파야를 모과(木瓜)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모과의 목재가 인도자단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를 닮았다고 카린(花櫚)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암라(菴羅)라고 하는 망고를 닮았다고 모과나무를  암라수(菴羅樹)라고도 부른다.

 

 

누가 모과를 못생겼다고 하는가?

그럼 여기서 모과와 관련된 우리나라 속담이나 중국과 일본의 민간속설에 대하여 파악해 보자. 우선 우리나라 속담에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다 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모과는 겉보기가 멀쩡한 현재의 모과를 말한다. 왜냐하면 향이나 크기 또는 모양은 좋지만 육질이 목질인 데다가 수분도 없고 더구나 맛이 시면서도 떫기 때문에 생식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속담은 수긍이 간다. 그리고 또 다른 속담이 있는게 그게 모과의 명예를 치명적으로 훼손하고 있다. 모과에서 세 번 놀란다는 그 것이다. 첫 째 못생겨서 놀라고 두 번째는 향이 좋아서 놀라고 세 번째는 맛이 없어 먹을 수가 없어서 놀란다는 것이다.  만약 이 속담의 모과가 과거의 모과 즉 명자꽃의 열매라면 못생겼다거나 향이 좋다는 것까지는 수긍이 간다. 하지만 신맛은 나지만 수분 함량도 많아서 못먹을 정도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 모과도 과거의 모과인 명자꽃 열매가 아니고 현재의 모과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명백한 오류가 있다. 누가 왜 모과를 못생겼다고 말하느냐 말이다. 결코 모과는 추하지 않다. 오히려 과피에서 광채가 나며 밝은 노란색으로 가을에 익어가는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그런데 왜 모과가 못생겼다고 할까?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일제강점기에 잘못 전해진 정보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 현재도 일본에서는 털모과 즉 마르멜로를 모과와 마찬가지로 카린(カリン)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털모과는 정말 거의 대부분이 볼품없이 못생겼다. 우선 과피에 털이 지저분하게 남아 있는 데다가 그 표면이 매우 울퉁불퉁한 것이 많다. 게다가 맛도 모과와 마찬가지로 시면서도 떫은 맛이 난다. 그런데도 모과와 마찬가지로 향기가 진하고 약재로도 쓴다. 그렇다면 이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가공식이나 방향용으로 사용하는 마르멜로 즉 털모과를 보고서 나온 속담이라고 추정된다. 세상 어느 누구도 모과 열매가 추하다고 표현하는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병들어서 찌든 모과가 아니라면 말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인터넷에 못생긴 모과로 올려진 사진의 대부분은 털모과의 사진이다. 그만큼 실제로 못생긴 모과는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왜? 원래 잘 생긴 것이 모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제외한 그 어느 나라에서 모과 열매를 특별히 아름답다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생겼다고 표현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못생긴 것은 모두 털모과 열매이다. 일본 일부 지방에서 털모과도 모과와 마찬가지로 카린이라고 한다.
이게 모과인데 뭘 그리 못생겼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가장 못생긴 모과라야 이 정도 수준

 

다음은 민간에서 모과의 효능을 치켜세우면서 중국 속담이라면서 흔히들 인용하는 구절이 “杏一益(행일익) 梨二益(이이익) 木瓜百益(모과백익)" 즉 살구는 한가지 좋은 점이 배는 두 가지 좋은 점이 모과는 백 가지 좋은 점이 있는 과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과를 百益之果(백익지과) 또는 水果之皇(수과지황) 또는 万寿瓜(만수과)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추피모과(皱皮木瓜)로 불리는 명자꽃의 경우 꽃도 매우 아름답고 열매의 향이 좋고 시기는 하지만 생으로도 먹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약효가 뛰어나기 때문에 이런 찬사를 받을만 하다. 하지만 이 중국 민간 속설의 모과(木瓜)도 원래는 명자꽃이 아닌 중국 남방에서 여지(荔枝)와 바나나(香蕉, 향초) 그리고 파인애플(菠萝, 파나)과 더불어 영남(岭南) 4대 과일로 꼽히는 파파야(木瓜, 모과)를 말한다. 정식 명칭이 番木瓜(반모과)인 파파야를 일반인들이 주로 모과(木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일본 속담에는 돈을 빌려준다(貸す)는 의미인 카시노키(カシノキ) 즉 가시나무는 집 뒤뜰에 심고 돈을 빌린다(借りる)는 뜻인 카린(カリン)은 집 앞에다 심으면 장사가 잘 된다는 설이 있다. 여기서 카린은 모과나무일 수도 있고 털모과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발음이기 때문이다. 

 

모과나무의 학명

모과나무는 프랑스 식물학자인 André Thouin(1747~1824)에 의하여 1812년 털모과속으로 분류하여 Cydonia sinensis Thouin라는 학명이 처음으로 부여된다.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보지 못하던 수종이라서 비록 털은 없지만 그래도 털모과와 가장 비슷하다고 봤던 것이다. 그러다가 후에 다른 학자들에 의하여 배나무속으로 변경되었다가 명자나무속이 신설되자 1890년 독일 식물학자인 Bernhard Adalbert Emil Koehne(1848~1918)에 의하여 명자나무속으로 편입되어 Chaenomeles sinensis (Thouin) Koehne라는 학명 부여받는다. 그렇게 하여 모과나무는 모식종인 일본 원산의 풀명자와 나중에 발견된 중국 원산의 명자꽃 그리고 중국 원산의 또 다른 중국명자꽃과 더불어 같은 명자나무속 일원이 된다. 이 당시 우리는 이 Chaenomeles속을 명자나무속이라고 불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모과속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수피가 벗겨지는 특성이 있고 줄기에 가시도 없고 꽃이 단생으로 엽액에서 나오며 잎거치에 샘선이 있는 등 명자나무들과는 차이점을 보여 독일 식물학자인 Camillo Karl Schneider(1876~1951)가 1906년에 키도니아를 닮은 속이라는 뜻의 새로운속을 신설하고 그 유일한 종으로 이 모과나무를 Pseudocydonia sinensis (Thouin) C.K. Schneid.라고 명명하여 분리 독립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는 분리론을 따라 학명 Pseudocydonia sinensis로 표기하였으나 1943년 정태현선생이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는 명자나무속으로 편입하고 국명을 모과에서 모과나무라고 하고 학명을 Chaenomeles sinensis로 변경하여 이 학명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래서 국내 일부 자료에는 아직도 학명이 명자나무속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현재는 다시 모과속으로 되돌아가 현재의 학명인 Pseudocydonia sinensis로 표기하고 있다.

 

등록명 : 모과나무

학    명 : Pseudocydonia sinensis (Thouin) C.K.Schneid.

이    명 : Chaenomeles sinensis (Thouin) Koehne

분    류 : 장미과 사과나무족 모과나무속 낙엽 교목

원산지 : 중국

중국명 : 木瓜(모과) 榠楂(명자) 木李(목리) 海棠(해당)

별    명 : 木梨(목리) 光皮木瓜(광피모과) 土木瓜(토모과) 蛮楂(만자)

일본명 : カリン(花梨, 榠樝) キボケ(木木瓜)

영어명 : Chinese quince

수    고 : 5~10m 최대 18m

수    피 : 편상 탈락

가    지 : 무자, 원주형, 유시 유모, 곧 탈락, 자홍색

이년지 : 무모, 자갈색

동    아 : 반원형, 원단원둔, 무모, 자갈색

엽    편 : 타원란형 타원장원형 희도란형

잎크기 : 5~8 x 3.5~5.5cm

잎모양 : 선단급첨, 기부관설형 원형, 자망상첨예거치, 치첨유선

잎면모 : 유시하면 황백색융모 밀생, 즉시 탈락무모

잎자루 : 5~10mm, 유모, 선치

탁    엽 : 막질, 난상피침형, 선단점첨, 선치, 7mm길이

꽃차례 : 단생 생엽액

꽃자루 : 단조 5~10mm, 무모

꽃크기 : 지름 2.5~3cm

꽃받침 : 종상 외면무모

악    편 : 삼각피침형, 6~10mm, 선단점첨, 선치, 외면무모, 내면천갈색융모, 반절

꽃    잎 : 도란형 담분홍색

수    술 : 다수 꽃잎의 절반보다 짧음

암    술 : 3~5 기부합생 유모 화두두상 불현명분열 수술과 등장

열    매 : 장타원형, 10~15cm 길이, 암황색 목질 방향 떫은맛

과    경 : 단

개화기 : 4월

결실기 : 9~10월

용    도 : 관상용, 목재용 식용 약용 해주(解酒) 거담(去痰) 순기(顺气) 지리(止痢)

내한성 : 영하 29도

 

모과나무 꽃은 하나씩 엽액에서 나온다. 암술은 3~5개이며 기부합생이다. 
모과나무 꽃
모과나무
모과나무
수피가 매우 매력적이다.
잎에 날카로운 거치가 있으며 거치끝에 샘선이 있다.
새잎 뒷면에는 융모가 있으나 곧 탈락한다. 단풍이 아름답게 들기도 한다.
모과나무 자갈색 동아와 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