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가시나무가 매우 많다. 현재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무려 237종이나 가시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중에서 잎의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감탕나무과 감탕나무속 호랑가시나무 종류가 217종이나 된다. 그리고 돌가시나무와 용가시나무, 대청가시나무 등 진짜 줄기에 가시가 있는 장미과 장미속 수종도 3종이 된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17종은 식물 전체에 아무리 찾아봐도 가시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가시나무라고 불리는 수종들이다. 참나무과 참나무속으로 상록수인 가시나무와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등 9종이 있으며 나머지 8종은 바로 이제부터 탐구할 대상들인 장미과 홍가시나무속 홍가시나무와 중국홍가시나무 등 8종이다. 도대체 왜 가시가 전혀 없는 이들 17종이 가시나무로 불리고 있는지 그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주엽나무나 아까시나무 시무나무 음나무 탱자나무 오갈피나무 매자나무 등은 나무 줄기에 진짜 무시무시한 가시가 있지만 모두 가시나무로 불리지는 않는다.
가시나무와 홍가시나무들은 가시가 없는데도 가시나무로 불리는 이유는 같은 가시라도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호랑가시나무와 장미들은 진짜 뾰족한 가시가 있지만 뒤의 참나무속 가시나무에서 말하는 가시는 순수 우리말인데 현재 그 어원을 잘 모른다. 다만 일부 국어사전에 도토리같이 생긴 가시나무의 열매를 가시라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가시나무들도 상수리나무나 신갈나무와 같은 참나무속 수종들이므로 그 열매는 그냥 도토리라고 말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시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제주도나 완도 등 제한된 지역에서만 나는 희귀한 수종인데 그 열매를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도토리와 구분하여 가시라고 별도로 불렀을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가시나무라는 용어가 우리 고문헌에는 조선시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한자어가 없어서 쓰는 사람마다 달리 쓰였다. 가시목(加時木)과 가서목(哥舒木) 또는 가사목(加斜木) 등으로 썼다. 이건 한자어가 아닌 순수 우리말이든가 아니면 외래어라는 말이된다.
가시(ガシ) 또는 카시(カシ)는 일본에서도 쓰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재질이 단단한 상록 참나무를 말하며 한자로는 자기들이 만든 한자어인 견(樫)으로 쓴다. 그리고 카시(カシ)라는 용어의 출전이 7세기경에 쓰여진 만엽집(万葉集)이라고 하니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일본에서는 카시는 단단하다는 뜻인 카타시(カタシ) 즉 견시(堅し)가 줄어든 형태라고 한다. 그러나 카타시(堅し)에서 타가 탈락하고 카시(カシ)만 남은 과정을 시원하게 풀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본 일부에서도 조선어 가시에서 온 말이라는 설이 있기는 한다. 그래서 가시나무는 순수 우리말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는 주장이 국내에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쎄 그렇다고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우선 일본에는 가시나무기 매우 많아 흔하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조정 관리들도 그 존재에 대하여 잘 모르던 희귀한 나무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조선에 와서 그 이름을 배워가서 자기들 앞산 뒷산에 흔하게 있는 나무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은 7세기경의 기록인 만엽집(万葉集)이라는 자료가 있고 단단한 나무라는 뜻의 별도의 한자어 견(樫) 자까지 만들어 쓰는데 우리는 겨우 조선시대에 그것도 중기 이후인 1704년 숙종실록에 가시목(加時木)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번 나타난 이후에는 1722년 경종실록에도 등장하고 1725년 영조1년 승정원일기에도 등장하면서 이후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는 분명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매우 단단하고 품질이 우수한 나무가 갑자기 알려지면서 궁중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시목이 과연 진짜 현재의 가시나무인지에 대하여 궁금해진다.
바로 이 궁금증을 풀어 주는 실학자가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선생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고저(苦櫧)라는 제목으로 이 수종에 대하여 해설한 내용이 있다. 선생은 먼저 일본에서 1712년에 발간된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인용하고 거기서 苦櫧子(고저자) 其木堅剛(기목견강)。故今俗多用樫字(고금속다용견자). 次之(차지)。一名橿(일명강)。즉 “고저자 나무는 단단하다. 민간에서 견(樫)으로 흔히 쓴다. 강(橿)이라고도 한다.”라는 내용을 파악하고 이제는 중국 당나라때 쓰여진 음운서인 唐韻(당운)을 찾아서 거기서 강(橿)이 호미자루를 만드는 만년목(萬年木)임을 파악하고서는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가시(加時)라고 부르는데 일본에서는 가지(加之)라고 불러 음이 변하였다라고만 기재되어 있다. 글쎄 이덕무선생도 이 가시나무라는 이름이 국내서는 자료가 없음을 알고서 일본에서 그 근거를 찾았고 부족한 부분을 중국에 가서 보충한 것이지만 명쾌한 결론은 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가시목이 국내에서도 흔하지는 않지만 제주도와 완도 등지에서 자생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가시가 일본 가지가 되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위 고증에서 나오는 나무들은 현재 중국에서는 고저(苦櫧)는 국내는 없는 가시나무와 비슷한 잣밤나무의 일종을 말하고 강(橿)은 덩굴성 황단인 등황단(藤黄檀)을 말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가시나무들을 청강(青冈) 또는 청강력(青冈栎)이라고 한다. 여하튼 그때나 지금이나 가시라는 이름은 중국명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조선 숙종실록 이후에 나타난 가시목(加時木)은 비록 중국의 고저(苦櫧)나 만년목은 아니지만 가시나무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미 1704년 숙종실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문서에 가시나무를 가시목(加時木)이라고 표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선생이 1720년경부터 쓴 성호사설(星湖僿說) 제6권 만물문에 무기의 일종인 협봉(挾棒)을 설명하면서 “지금 제주(濟州)에서 나는 가서목(哥舒木)은 단단하고 질기기로는 제일이다. 북경 사신이 오면 많이 구해 가지고 간다고 하니, 이 가서목으로 협봉을 만들고 겉에다 쇠로 꾸미면 철련(鐵鏈)과 거의 비슷하게 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내용으로 봐서는 가시나무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로 호남에 파견된 죽석관(竹石館) 서영보(徐榮輔, 1759~1816)선생의 문집인 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에 보면 그가 1794년 조정에 올린 호남위유별단(湖南慰諭別單)이라는 장계 중에 “길고 곧은 나무는 반드시 쓸 만한 재목이며 가서목(哥舒木)은 특히 단단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써 군기(軍器)를 만들 때 긴요하게 쓰이는 것인데 오직 이 섬에서만 생산됩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 토산물 중의 기이한 보물입니다. 또 성질이 단단한 나무는 자라는 것이 매우 느려 한 번 잘라 버리면 곧바로 자라는 것이 아니어서 더욱 아끼고 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곧 가죽나무나 상수리나무 등의 쓸모없는 종류와 함께 땔나무가 되어 버립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성호 이익과 죽석관 서영보라는 분들은 아마 가시목(加時木)으로 군용 또는 의장용 긴 장대봉인 가서봉(哥舒棒)을 제작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나무 자체도 가서목(哥舒木)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부터 의장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가서봉(哥舒棒)은 조선초 1419년 세종실록에 등장한 것을 비롯하여 수도 없이 많이 기록에 등장하는 왕실 의장용 장대봉이다. 이는 우리나라 고유 전통이 아니고 중국에서 전래된 의식이다. 그래서 홍길동전의 저자 성소(惺所) 허균(許筠, 1569~1618)선생은 그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가서봉(哥舒棒)은 수나라의 제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훗날 가시나무로 이 봉을 만들었더라도 원래 가서봉은 가시나무와 무관해 보인다. 따라서 가서목(哥舒木)이 가시목(加時木)으로 다시 가시나무로 변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가서목이라는 기록을 남긴 사람은 조선 후기에 와서 성호 이익이나 서영보 선생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헷갈리게 하니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선생도 지방 관아의 병기 창고에서 발견한 가늘고 질기면서 유연한 잘 모르는 목재를 보고서 낭창낭창하다는 뜻의 어려운 한자 아와 나자를 써서 아나목(-橠木)이라고 쓰고 속칭 가사목(加斜木)이라고 부른다고 쓰고 있는데 이 또한 가시나무가 아니겠는가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자료가 더 발견되지 않는다면 현재 조선 중기이후에나 등장하는우리 기록만으로는 가시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일본에서 단단하고 질긴 목재용 나무가 들어 왔는데 알고보니 우리나라에도 제주도나 완도 등지에서 자생하더라는 것이 상식적인 추론이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이렇게 장황하게 가시나무의 어원을 탐구한 이유는 이번에 탐구할 홍가시나무의 가시가 바로 이 가시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참나무속 상록 수종들을 우리가 가시나무라고 하는 것까지는 이미 조선조부터 그렇게 불렀으므로 이해하더라도 참나무와는 전혀 무관하며 일본에서조차도 가시나무라고 부르지 않는 수종을 홍+가시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뾰족한 가시도 없고 그렇다고 도토리를 닮은 열매도 달리지 않는데 왜 이 수종에다가 일본에서 도입된 이름일 가능성이 높은 가시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여하튼 홍가시나무라는 우리 이름은 1943년 정태현선생의 조선삼림식물도설에 의한다. 아마 새순이 붉게 나오며 잎모양이 가시나무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인 것으로 보인다. 홍가시나무를 중국에서는 광엽석남(光叶石楠)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재질이 단단하여 부채의 사북(要)을 만들며 감탕나무(黐)를 닮았다고 가나메모찌(カナメモチ)라고 부르고 한자로는 요리(要黐)라고 쓴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에서도 별명으로 선골목(扇骨木)이라고도 한다. 부채(扇)의 뼈(骨)를 만드는 나무라는 뜻이다. 우리 이름 홍가시나무는 아무래도 유난히 새순이 붉은 변종으로서 일본에서 아카메모치(アカメモチ) 즉 적아리(赤芽黐)라고 부르는 Photinia glabra f. benikaname의 이름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학명 Photinia glabra인 홍가시나무에 대하여는 2016년 193번 게시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이번에는 학명 Photinia serratifolia인 중국홍가시나무를 탐구하는 것이다.
홍가시나무속 즉 Photinia속은 그리스어로 (잎에) 광택이 난다는 뜻인 photeinos에서 온 것이다. 이 속은 1820년 프랑스 식물학자인 René Louiche Desfontaines(1750~1833)가 창설한 것인데 당초에는 중국홍가시나무라고 생각하고 Photinia serrulata Lindl라는 학명을 1821년 부여하고 모식종으로 삼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학명을 중국홍가시나무 학명으로 표기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홍가시나무라 즉 Photinia glabra와 동종이라는 판정이 나와서 모식종이 애매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현재 중국홍가시나무는 1973년 네덜란드 식물학자인 Cornelis Kalkman(1928–1998)이 과거 1829년 프랑스 학자에 의하여 산사나무속으로 명명된 학명 Crataegus serratifolia Desf를 홍가시나무속으로 재분류한 학명 Photinia serratifolia (Desf.) Kalkman을 정명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등록되어 있다. 여기서 종소명 serratifolia는 미세한 거치라는 뜻으로 잎 가장자리의 작은 톱니를 말한다. 홍가시나무속 여러 수종이 자생하는 중국에서는 이 홍가시나무속을 석남(石楠)속이라고 부르며 바로 이 중국홍가시나무를 대표적인 수종으로 삼고서 석남(石楠)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또 다른 원산지인 일본에서는 이 수종을 홍가시나무에 비하여 잎과 꽃이 크다고 오카나메모치(オオカナメモチ)라고 부르고 한자로는 대요리(大要黐)라고 쓴다. 그러니까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들 둘 다 자생하는 일본에서는 홍가시나무를 대표 수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도 일본을 따라서 홍가시나무를 대표로 삼고 이 수종을 마치 중국 고유종인 것처럼 중국홍가시나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이 수종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인도네시아에서도 자생한다.
만병초가 아닌 이 수종이 진짜 석남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수종의 중국 이름 석남(石楠)에 대하여 이다. 이 수종은 수형이 아름답고 새잎이 홍색이고 꽃이 풍성하게 피며 겨울에는 붉은 열매가 아름다워 관상용으로도 인기가 높으며 단단하고 치밀한 목재는 수레나 악기 손잡이용으로 적합한 데다가 그 뿌리와 잎은 약재로도 유명하다. 다음은 중국 의학서에 기록된 석남의 잎과 뿌리의 약효를 거의 모두 정리한 것이다. 국내서 석남이 워낙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런 것이다.
석남(石楠)
효능 : 거풍지통(祛风止痛) 두풍두통(头风头痛) 요슬무력(腰膝无力) 풍습근골동통(风湿筋骨疼痛)
엽(葉) : 거풍보신(祛风补肾) 풍습근골통(风湿筋骨痛) 양위유정(阳痿遗精)
근(根) : 거풍제습(祛风除湿) 활혈해독(活血解毒) 풍비(风痹) 역절통풍(历节痛风) 외감해수(外感咳嗽) 창옹종통(疮痈肿痛) 질타손상(跌打损伤) 적취(积聚) 풍비(风痹)
우리나라 동의보감의 석남(石南)에 대한 설명은 예상 외로 비교적 간단하다. 근골피부풍(筋骨皮膚風) 양신강음(養腎强陰) 요각약(療脚弱)이 전부이다. 하지만 근육통과 뼈 그리고 피부병에다가 신장기능을 강화하고 정력을 좋게 하며 다리관절에 좋다니 그 범위가 결코 좁지는 않다. 그런데 이 석남을 현재 거의 모두 만병초(萬病草)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는 동의보감 대역본에서조차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어 이의 수정이 요구된다. 허준선생이 언급한 석남은 바로 이 중국홍가시나무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진달래과 만병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바로 동의보감 그 자체에 있다. 바로 효능 뒤에 부연 설명된 생종남산석상(生終南山石上) 여비파엽(如枇杷葉) 무모(無毛) 저지초용(猪脂炒用)이라는 문구에 이미 이 수종이 석남(石楠)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원래 중국홍가시나무의 중국이름 석남(石南)이 “생우석간향양지처(生于石间向阳之处 고명석남(故名石南)” 즉 암석지대의 남향 양지녘에서 자라기에 석남이라고 부른다고 명대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파나무와 비슷하다고 중국에서 석남을 비파 접목용 대목으로 많이 쓴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의 석남은 절대로 국내서도 자생하는 만병초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옛날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울릉도 등지에서 석남이 자생한다고 믿었다. 고려사절요에 11권에 의하면 고려 의종 11년 즉 1157년에 왕이 울릉의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옛날에 주현(州縣)이 있었고 백성이 거주할만하다고 들어 명주도 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었는데, 가서 보고 와서 김유립이 아뢰기를, “섬 안에 큰 산이 있으며, ---중략--- 촌락의 흔적은 7군데이고 석불· 철종· 석탑이 있습니다. 시호(柴胡)· 호본(蒿本)· 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논의(백성들의 이주)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유립의 보고대로 실제로 울릉도에는 지금도 석남초(石南草) 즉 진달래속 만병초가 많이 자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만병초를 중국의 석남으로 잘못 알고서 민간에서 약으로 써 왔던 것이다. 그리고 만병초가 많이 자생하는 일본인들에게도 그게 바로 중국의 석남이라고 알려주어 일본은 아직까지도 진달래속 만병초들을 석남이라고 부르고 있다. 석남의 약효가 여러 병에 두루 효과가 있으므로 20세에 들어서 민간에서부터 만병초(萬病草)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 당시 대구 약령시장 등 중국 수입 석남을 취급하는 약재상에서도 석남을 만병초라고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가짜 석남인 우리 자생종도 덩달아서 만병초로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 진달래 일종인 우리 자생종의 정식 명칭을 아예 만병초라고 못을 박아 버렸다. 일본명이 사쿠나게(シャクナゲ) 즉 석남화(石楠花)이므로 주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헐! 그게 먼 옛날 우리가 잘못 알려준 것인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런데 만병초는 만병을 고치기는커녕 치명적인 독성이 있어 절대 피해야 할 식물이므로 현재 우리나라 식약처에서 식용불가식물로 지정하였음에도 민간에서 아직도 말기 환자들의 약으로 쓰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글쎄 미량의 독을 섭취하였을 경우 마취효과로 일시적인 통증완화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히말라야 석청이라는 만병초 꿀을 먹고 사망한 사례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발생한 적도 있었으므로 절대 금해야 되는 식물이다. 약재로 널리 알려진 석남 즉 중국홍가시나무의 잎에도 Cyanogenic glycosides라고 시안배당체(Cyan配糖体) 또는 청산배당체(靑酸配糖体)라고 하는 독성이 있다. 시안배당체는 복숭아씨, 사과씨, 아마씨, 은행 열매, 매실씨 등에 함유되어 있는데 반응성이 낮아서 먹어도 문제가 없으나 다량 섭취시 장내에서 미생물반응으로 시안화합물 생성시 중독증세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섭취에 주의해야 한다. 다행히 열을 가하면 사라진다. 그래서 동의보감에서 저지초용(猪脂炒用)이라고 돼지기름에 볶아서 쓰라고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시안배당체가 있으면 수입 통관이 되지 않는다.
이미 홍가시나무라는 이름이 마음에 안드는데 거기에 중국 고유종도 아닌데 중국홍가시나무라고 하니 답답하다. 혹시 홍가시나무는 일본 원산이고 중국홍가시나무는 중국 원산인 것처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둘 다 우리나라만 빼고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일부 동남아시아에서 자생하는데도 말이다. 그냥 일본을 따라서 큰잎홍가시나무라고 하던지 아니면 학명의 종소명을 따라서 세치홍가시나무라고 해도 무난하지 않았을까 한다. 홍가시나무에 대하여 1982년 안학수선생 등은 저술한 한국농식물자원명감에서 붉은순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그게 더 적합한 이름이 아닌가 한다. 중국홍가시나무는 나무도 잎도 꽃도 홍가시나무보다 더 크고 잎의 측맥이 25~30쌍으로 10~18쌍인 홍가시나무보다 많다.
등록명 : 중국홍가시나무
학 명 : Photinia serratifolia (Desf.) Kalkman
이 명 : Photinia serrulata Lindl.
분 류 : 장미과 홍가시나무속 상록 관목 소교목
원산지 :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명 : 석남(石楠) 착목(凿木) 천년홍(千年红) 선골목(扇骨木) 필수(笔树) 석안수(石眼树)장군리(将军梨) 석남시(石楠柴) 석강(石纲) 착각(凿角) 산관목(山官木)
일본명 : 오카나메모치(オオカナメモチ) 대요리(大要黐) 철림수(鐵林樹)
영어명 : Taiwanese photinia, Chinese photinia
수 고 : 4~6m 최대 12m
가 지 : 갈회색, 무모
수 피 : 불규칙 박리
동 아 : 난형, 인편갈색, 무모
엽 편 : 혁질, 장타원형, 장도란형 도란상타원형, 약한 독성
신 엽 : 홍색
잎크기 : 9~22 x 3~6.5cm
잎모양 : 선단미첨, 기부원형 관설형, 소생 선세거치, 근기부전연
잎면모 : 상면 광량, 유시 중맥융모, 성숙후 양면무모
잎면맥 : 중맥현저, 측맥 25~30대
잎자루 : 조장, 2~4cm, 유시 융모, 이후 무모
꽃차례 : 복산방화서 정생, 지름 10~16mm, 총화경 무모
꽃자루 : 무모, 3~5mm
꽃특징 : 밀생, 지름 6~8mm, 약간 불쾌한 냄새
꽃받침 : 약통 배상, 1mm, 무모, 악편 활3각형, 길이 1mm, 선단급첨, 무모
화 판 : 백색, 근원형, 지름 3~4mm, 내외양면 무모
수 술 : 20, 외륜교화판대, 내륜대자색
암술대 : 2~3, 기부합생, 주두두상, 자방 정단 유모
열 매 : 구형, 지름 5~6mm, 홍색, 후 갈자생
종 자 : 난형, 길이 2mm, 갈색, 평활
개화기 : 4~5월
결실기 : 10월
용 도 : 관상용, 목재용, 약용
내한성 : 영하 21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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