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장미과 아몬드아과/배나무속

1948 배나무 그리고 관련 중국시(詩)

낙은재 2024. 3. 20. 18:04

배꽃(梨花)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등록된 배나무속 수종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18종이었는데 2년 전쯤에 대폭 통합 정리하여 이제는 10종이 남았다. 그 중에서 돌배나무와 산돌배나무 콩배나무 백운배나무 등 4종은 우리 자생종이고 나머지 6종은 중국이나 유럽 중동 등지에서 도입된 외래종이다. 자생종이란 인위적으로 누가 외국에서 들여온 종이 아닌 이 땅에서 원래부터 자라던 그야말로 이 땅 주인들이란 말이다. 배나무는 수분 함량이 많아서 시원하면서도 단맛도 나 과일나무로서 예로부터 인기가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먼 옛날 한자가 도입되기도 전부터 주변에서 재배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부르던 이름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뭔지를 우리는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말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한자어가 도입된 이후에는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 이(梨)로 기록되었기에 이런 한자 기록들로써는 실제 우리말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이후에 비로소 로 기록된 것이 나타나 최소한 조선시대 초기에는 배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배와 한자어 梨의 어원

그런데 고려시대에도 배라고 불렀음을 입증할 수 있는 문헌이 있다. 고려 숙종 8년 1103년에 북송의 서장관으로 고려를 방문하였던 관리 손목(孫穆)이 본국으로 귀국한 후 저술한 계림유사(鷄林類事)라는 책에 중국 한자어를 그 당시 우리나라 즉 고려의 발음으로 그대로 표기한 중요한 기록이 있다. 거기에 梨曰敗(이왈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리[li]라고 발음하는 梨를 고려에서는 배라고 부른다고 그 발음을 배에 발음이 가장 가까운 중국어 敗[bài]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우리는 배를 배라고 불렀으며 글자만 한자어로 梨라고 썼음을 알 수 있다. 배가 우리 자생종이기 때문에 한자어를 도입하기 전부터 재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순수 우리말 배의 어원은 알 길이 없지만 일부에서는 아무르강 유역 민족들이 과즙이 많은 과일에 쓰던 용어인 페(Pe)와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중국에서는 배를 몸에 이로운(利) 나무(木)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많은 식물 이름의 어원을 밝혀낸 명대 본초학자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그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梨者,利也,其性下行流利”라고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梨에 관하여는 이시진도 확신하지는 못하였던지 이로운 나무이기는 하지만 그 어원이 利 + 木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중국 梨의 기록과 이화관련 시

배나무는 우리 외에도 중국과 일본에서도 자생한다. 글자가 일찍이 발달한 중국에서는 당연히 오래된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인 선진시대(고대 ~221 BC)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에 이미 “说有泰室之山,其上有木,叶子像梨子.”이라는 기록이 있다. “태실의 산에는 나무가 많은데 그 잎이 배나무잎과 같다.”라는 내용이다. 배나무는 그 당시에 이미 널리 아는 수종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주(周, 1046 BC~ 256 BC)나라 예기(礼记)에 “有梨树,是列于秋天常见的家用水果之一”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배나무는 가을에 민가에 흔한 과일나무 중 하나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동한 말기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 시대 영웅 바로 그 북해(北海)의 공융(孔融, 153~208)과 배에 관련된 고사는 매우 유명하다.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모가 준 배에서 큰 것 형들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작은 것을 먹었다는 孔融讓梨(공융양리)의 고사는 중국에서 두고두고 형제간 우애의 미풍양속 미담으로 전해진다.

 

공융은 어릴적 먹을 것은 형들에게 양보했지만 나중에 정치가가 되어서는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서기 809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당나라 대시인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江岸梨花(강안이화)라는 시가 배꽃과 관련된 초창기의 유명한 시 중 하나이다. 중국 문인들이 자연에 관심이 매우 많지만 특히 백낙천은 평소 식물에 조예가 매우 깊어 식물 관련된 많은 시를 남겨 낙은재도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그의 시나 이름을 언급하였다. 그의 시를 소개하였거나 식물명에 관여한 그의 이름을 인용한 게시물은 참고로 다음과 같이 많다. 이 정도면 그는 웬만한 수종에는 거의 다 관여하여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 거의 식물학자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파 五月枇杷正满林(오월비파정만림)

앵도 樱桃樊素口(앵도번소구)

복사 大林寺桃花(대림사도화)

철쭉 山石榴寄元九(산석류기원 )

자목련 戏题木兰花(희제목란화)

상록목련 木莲诗并序(목련시병서)

배롱나무 紫微花(자미화)

수국 紫阳花(자양화)

이들 시 외에도 리치(荔枝)와 모란(牡丹) 그리고 계화(桂花)편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한 바 있다.  

 

백거이와 강안이화 

 

 

江岸梨花(강안이화) - 白居易(백거이)

 

梨花有思缘和叶(이화유사연화엽)

一树江头恼杀君(일수강두뇌쇄군)。

最似孀闺少年妇(최사상규소년부)

白妆素袖碧纱裙(백장소수벽사군)。

 

배꽃과 푸른 잎이 그리움을 불러와

강가 배나무 한 그루 그대를 괴롭히네.

영락없이 규방의 청상과부를 닮았네

소박한 화장 흰 저고리에 푸른 치마라.

 

사실 이 시는 그와 함께 한림학사로 일하던 막역지우이자 그와 시가(詩歌) 이론과 관점이 유사하여 언어가 평이하고 통속적인 장편 배율(排律)을 쓰는 새로운 신악부시가(新乐府诗歌)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함께 차운상수(次韵相酬) 형식을 창시하였다는 또 다른 당대 유명 시인인 원진(元稹, 779~831)이 감찰어사로 검남동천(剑南東川)으로 부임하면서 보내온 아래 使東川(사동천) 江花落(강화락)이라는 제목의 시에 대한 화답으로 써서 보낸 것이다. 이래서 그 당시 백거이가 원진에게 보낸 12수를 酬和元九東川路詩十二首(수화원구동천로시12수)라고 한다. 수화(酬和)란 시로 응답한다는 뜻이고 원구(元九)는 원진을 말하며 동천로는 동천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당시 유명한 시인 둘이서 서신을 통하여 각자의 창작시를 발표하는 이른바 우통전시(郵筒傳詩)라는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낸다.

 

使東川(사동천) 江花落(강화락) - 원진(元稹)

 

日暮嘉陵江水东(일모가릉강수동)

梨花万片逐江风(이화만편축강풍)。

江花何处最肠断(강하하처최장단)

半落江流半在空(반락강류반재공)。

 

해질 무렵 가릉강변 동쪽 기슭에

무수한 배꽃잎 강바람에 흩날리네

강과 꽃 어느 쪽이 더 애달파 보이는가

반은 강물에 흐르고 반은 허공을 나르네.

 

바람에 흩날리는 배꽃잎과 원진

 

 

여기까지 왔으면 당나라 4대 여류시인 중 한 명이며 탁문군 등과 더불어 촉(蜀)의 4대 재녀(才女)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설도(薛涛, 768~832)라는 시인의 춘망사(春望詞)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양민 출신으로 한때 기녀생활을 하였던 그녀가 809년 서촉으로 갓 부임한 11살이나 어린 원진(元稹)과 사랑에 빠졌다가 원진이 타지로 전근가면서 4개월 만에 이별하게 된다. 그래서 설도(薛涛)가 그 아픔을 노래한 시가 바로 춘망사(春望詞)이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809년 처음 만났다가 헤어진 다음 5년 후인 814년 강릉(江陵)에서 재회하였다고 한다. 재회 당시 원진은 상처(喪妻)한 상태이었기에 서로 장래를 약속을 하여 설도(薛涛)는 기대감을 갖고 성도로 돌아왔으나 원진이 곧 다른 여인과 재혼하면서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설도는 좋아하던 화려한 의상을 벗고 암울한 회색 도포를 입고 평생토록 원진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 춘망시는 사회적 신분과 나이 차이 등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그리고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과 원망을 표현한 시로서 천고의 명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 시의 제목을 봄의 소망이나 봄을 기다림이라고 하지만 결코 희망적인 그런 의미가 아니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쓴 시이기에 봄을 원망(怨望)하는 노래라고 해야 어울린다. 그리고 비록 설도가 이 시에서 이화(梨花)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피고 지는 꽃은 이화(梨花)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도는 원진과 백거이가 배꽃을 두고서 서로 이별시를 주고받았음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말이다.

 

설도

 

춘망사(春望詞) - 설도(薛涛)

 

花開不同賞(화개부동상)

꽃이 펴도 함께 감상할 수 없고

花落不同悲(화개부동비)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구나

欲問相思處(욕문상사처)

님이 가장 그리울 때는 언제이던가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

꽃 피고 꽃 지는 시절 이라네

 

攬草結同心(남초결동심)

풀 뜯어 동심결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장이유지음)

님에게 보내려 마음먹다가

春愁正斷絶(춘수정단절)

뒤숭숭한 봄바람 잦아지려니

春鳥復哀鳴(춘조복애명)

봄새가 돌아와 구슬프게 우네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꽃잎은 바람에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아름다운 기약 아직 아득한데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한 마음인 그대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공연히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들

飜作兩相思(벅작양상사)

오히려 그리움을 샘솟게 하는구나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

아침부터 주르르 흐르는 눈물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봄바람 너는 아는가 모르는가

 

중국인들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대만 배우 장균녕(张钧寗)의 느낌을 설도에게 흔히 대입한다.

 

 

이 춘망사(椿望詞)라는 시가 우리나라에 특별히 널리 알려진 이유는 바로 우리 가곡 동심초(同心草)의 가사가 바로 이 시 제3수를 번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곡 동심초(同心草)는 김소월 시인의 스승이라는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이라는 사람이 1934년 발간한 번역시 선집 망우초(忘憂草)에 동심초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것을 1945년 김성태(金聖泰, 1910~2012)교수가 작곡했다. 나중인 1957년 드라마로 그리고 1959년 김진규 최은희 엄앵란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 졌는데 그 때 주제가를 산장의 여인을 불렀던 성악가 출신의 가수 권혜경이 불러서 유명해졌다. 설도의 시 한수로 2절까지 만든 그 노래 동심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동심초 - 김억(金億) 작사, 김성태(金聖泰) 작곡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가수 권혜경의 앨범과 동심쇄

 

 

동심초(同心草)의 정체에 대하여 설이 분분하다. 일종의 풀이라는 설과 연애편지라는 설도 있다. 분명 안서 김억선생은 풀잎을 맺은 것 즉 결초(結草)로 이해하여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나중에 일부에서 연애편지라는 다른 주장도 한다. 설도(薛涛)는 편지쓰기에 편하게 그 당시 종이 제작 사이즈를 변경하고 도홍색으로 채색하여 직접 만들어 썼디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설도전(薛涛笺)이라고 하여 유명세를 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중국 연인들이 관광지에서 흔히 하는 열쇠나 쇠사슬 채우기를 동심쇄(同心鎖)라고 한다고 언급까지 한다. 글쎄 열쇠로 채우는 것이 동심쇄라면 풀로 매듭한 것은 동심초(同心草)라고 해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는 동심초라는 식물은 없다. 중국에서도 동심초라는 식물 정명은 없는데 가끔 감초(甘草)를 동심초라고도 한다. 하지만 설도(薛濤)가 말한 동심초는 감초일 리는 없고 풀로 매듭을 지은 것을 말하며 이건 일종의 남녀간 애정을 상징하는 풀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분명히 설도 자신도 위 시 제2수에서 攬草結同心(남초결동심)이라고 풀(草)을 뜯어(攬) 맺는다(結)라고 언급하고 있어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중국에서도 同心草是一种比喻爱情的草.(동심초시일종비유애정적초)라고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원진과 설도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하느라 글이 길어졌다. 그래도 끝으로 그 유명한 앵행도리(樱杏桃梨)라는 문구를 처음 사용한 백거이의 춘풍이라는 시를 감상하자.

 

春风(춘풍) - 白居易(백거이)

 

春风先发苑中梅(춘풍선발원중매)

樱杏桃梨次第开(앵행도리차제개)。

荠花榆荚深村里(제화유협심촌리)

亦道春风为我来(역도춘풍위아래)

 

봄바람 불어와 정원의 매화가 먼저 피고

앵도와 살구꽃 복사꽃 배꽃이 차례로 핀다

깊은 마을엔 냉이꽃과 느릅열매도 보이니

봄바람이 나에게도 불어온다고 말하리

 

이 시는 당 문종 대화 5년 즉 831년에 지은 것으로 당시 59세인 백거이는 낙양에서 하남윤을 지내고 있었다. 이름난 꽃이든 들꽃이든 봄바람은 평등하게 대하여 특별히 누구를 더 후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통치자에게 인재를 골고루 중용하고 편애하지 말라는 바람을 담아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제화(냉이꽃)와 유협(느릅열매)은 그냥 흔한 잡초목을 상징한다.
배꽃 뿐만아니라 잡초목에도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앵행도리(櫻杏桃梨)냐 앵행도리(櫻杏桃李)냐?

우린 그의 정치적 바램보다는 앵행도리(櫻杏桃梨)라는 용어에 관심이 더 간다. 앵행도리(櫻杏桃梨)는 벚나무와 살구나무 복사나무 배나무를 말하며 백낙천은 봄에 꽃이 피는 순서대로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살구가 벚꽃과 거의 동시이거나 오히려 약간 일찍 피기에 위 순서와는 다를 수가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앵(櫻) 특히 왕벚나무가 없던 백낙천 시대의 앵(櫻)은 거의 중국앵도 즉 중국 체리나무를 말한다. 이 수종은 살구보다 일찍 피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일본에는 1월에 꽃이 피는 벚나무 종류들도 더러 있다. 그래서 월등하게 먼저 피는 매화(梅)를 제외하면 앵행도리라고 불러야 봄꽃의 개화순서에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낙은재가 앞 게시글에서 앵행도리(櫻杏桃李)라고 수 차 언급한 것은 앵행도리(櫻杏桃梨)의 오류라는 말인가? 아니다. 전자는 장미과 벚나무속 즉 Prunus속의 대표적인 수종들을 언급하기 위하여 그렇게 부른 이름이다. 왜냐하면 앵행도리(櫻杏桃李)는 모두 하나의 속으로 분류되는 근연종들이지만 앵행도리(櫻杏桃梨)는 별도의 속으로 분류되는 Pynus속 배나무가 포함되어 있어 식물분류학상 그 범위가 넓어지는 차이점이 있다.  

 

앵매도리(桜梅桃李)와 도리행앵(桃李杏櫻)도

일본의 경우는 살구나무와 배나무를 빼고 매화와 자두나무를 추가하여 주로 앵매도리(桜梅桃李)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이는 가마쿠라(1185~1333)시대 불교 일련정종을 창시한 승려 일련(日蓮, 1222~1282)이 써서 널리 알려진 말이라고 한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앵행도리(櫻杏桃梨)나 앵행도리(櫻杏桃李) 둘 다 거의 쓰지 않았다. 다만 도리(桃李)라는 말은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였는데 이 용어는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사기에서 나오는 "桃李不言(도리불언) 下自成蹊(하자성혜)"에 근거한다.  그 뜻은 “도리화는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감상하러 몰려들어 저절로 나무 아래 길이 생긴다.”라는 의미이다. 사마천은 스스로 잘난 척하지 않아도 남이 먼저 알아주는 전한(前漢) 중기의 명장 이광(李廣, ? ~ 119 BC)을 도리(桃李)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앵행도리(櫻杏桃梨) 외에도 봄꽃나무를 표현할 때 도리행앵(桃李杏櫻)이라는 말도 많이 쓰는데 이 용어는 특별한 출전에서 유래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꽃의 순서가 아닌가 한다. 이(李)씨가 워낙 많은 중국인들의 자두꽃 사랑은 각별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자두나무는 결코 무시당할 수종은 아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는 자두나무 품종도 많다. 실제로 국내서 자두꽃축제가 배꽃축제에 비하여 결코 관심이 적지 않다. 그리고 요즘 자두와 매화의 교잡종인 미인매(美人梅)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낙은재로서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결론은 백거이의 춘풍(春風)이라는 시를 근거로 앵행도리(櫻杏桃梨)가 옳고 앵행도리(櫻杏桃李)는 잘못된 용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춘풍은 백낙천과 배꽃에만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자두꽃에도 공평하게 불어오기 때문이다. 다음 게시글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배꽃관련 시사를 탐구하고자 한다.

 

도리불언 하자성혜는 인품이 훌륭한 이광장군을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