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장미과 아몬드아과/배나무속

1950 배꽃을 무척 사랑했던 우리 민족, 관련 시(詩)

낙은재 2024. 3. 22. 18:20

 

배나무 고목이 만개한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현존하는 문서로서 배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우리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6권 문무왕 2년 서기 662년에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적병을 만나 이현(梨峴)에서 격살했다고 貴幢弟監星川·軍師述川等, 遇賊校勘 兵於梨峴, 擊殺之..라는 기록이 아닐까 한다. 이현(梨峴)은 배나무가 많은 고개 즉 배고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이현(梨峴)은 황해도 멸악산맥 일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현재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라 문무왕시대 이전에 이미 우리 선조들 주변에는 배나무가 흔하여 지명으로 붙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등록된 배나무가 모두 10종인데 이 중에서 4종이 우리 자생종이므로 당연히 신라시대는 물론 그 이전 어쩌면 우리 선조들보다 먼저 이 땅에서 자라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단지 기록상으로 삼국사기에서부터 중국식 한자어로 이(梨)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 와서는 드디어 지명이 아닌 식물 열매로서의 배에 관한 언급이 고려사 천문편에 나온다. 고려 명종 때인 1177년 1월 29일 庚午 流星出軒轅入張, 大如梨, 尾長三尺許.이라고 하늘에 유성이 나타났는데 그 크기가 배만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그 당시의 배 크기는 현대의 배와는 많이 달리 작았을 것이 분명하다. 현재 지름 3cm 열매가 달리는 돌배나무를 과수용 배나무의 원종으로 보고 있으므로 고려시대라면 돌배보다는 좀 더 컸을 수는 있어도 지름 10cm 안팎인 현대의 배만큼 크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돌배(좌)와 현대의 배(우), 고려시대 재배용 배의 크기는 중간쯤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러다가 고려 무신정권(1170~1270) 시절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배꽃이라는 시가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문집인 보한집(補閑集)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 선조들이 배나무를 단순한 유실수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 꽃을 감상하는 꽃나무로도 인식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梨花(이화) 이규보(李奎報)

 

初疑枝上雪黏華(초의지상설점화)

爲有淸香認是花(위유청향인시화)

飛來易見穿靑樹(비래이견천청수)

落去難知混白沙(낙거난지혼백사)

 

처음에는 가지 위에 눈꽃이 붙었나 의심했더니

맑은 향기 있어 이게 꽃인 줄을 알았네.

흩날리다 푸른 나무에 떨어져 쉬이 보이더니

흰 모래에 떨어지니 섞여 분간하기 어렵구나.

 

 

이규보선생과 돌배나무 꽃

 

 

이번에는 아예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선생의 천수사문(天壽寺門)이라는 시이다. 이규보선생은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기재(奇才)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자유분망하여 형식적인 과거문을 멸시하여 연속 과거에 낙방하다가 나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낙심하고 24세에 개경 천마산에 들어가 장자(莊子)에 관심을 보이며 시문이나 지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아마 그 때 식물과 접할 기회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식물 관련 시들도 그때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생활고 문제도 있고 감투에 대한 욕심이 있어 관직을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32세 때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충헌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 바쳐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이다. 비록 그가 재물 욕심이 없어서 이권에는 개입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무신정권을 찬양한 것으로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저술한 동명왕편 등이 수록된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은 우리에게 과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규보는 유난히 식물애호가였던 것 같다. 지난번 황매화를 지당화(地棠花)라면서 거의 마니아 수준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번에는 배꽃에 대한 사랑도 만만치 않아 여러 수의 시를 남겼다. 아래 시에서는 이별을 운운하고 있는데 이는 당나라 대시인들인 백거이와 원진이 강가에서 핀 배꽃을 주제로 한 이별시를 서로 주고받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天壽寺門(천수사문) – 이규보, 김철희역

 

連天草色碧煙翻(연천초색벽연번)

滿地梨花白雪繁(만지이화백설번)

此是年年離別處(차시년년이별처)

不因送客亦銷魂(불인송색역소혼)

 

하늘에 닿는 풀빛 푸른 연기 뒤치는 듯

땅에 가득 찬 배꽃 흰 눈처럼 피었구나

여기는 해마다 이별하는 곳이라

손님 보내지 않을 때도 넋이 나간다오

 

돌배나무

 

 

이규보보다 약 반세기 이후에 태어난 고려 후기의 문신인 지포(止浦) 김구(金坵, 1211~1278)선생의 문집인 지포집(止浦集)에 실린 낙이화(落梨花)라는 시이다. 정말 봄바람에 휘날리는 배꽃잎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 하다.

 

落梨花(낙이화) - 김구(金坵)

 

飛舞翩翩去却廻(비무편편거각회)

倒吹還欲上枝開(도취환욕상지개)

無端一片黏絲網(무단일편점사망)

時見蜘蛛捕蝶來(시견지주포접래)

 

펄펄 춤추며 날아 가다가 되돌아 와

도로 가지 위로 올라가 피고자 하네

어쩌다 한 조각이 거미줄에 붙으면

거미가 나비 줄 알고 잡으러 오네

 

바람에 휘날리는 배꽃잎

 

 

시기적 순서에 의하여 그 다음으로 소개할 이화 관련 시가 바로 우리 국민들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 만고의 명시조 다정가(多情歌)이다. 한글로 쓰여진 “이화에 월백하고~”에 익숙하여서 그런지 이 작품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쓰여진 작품일 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작가 이조년(李兆年, 1269~1343)선생은 고려 24대 원종에서부터 28대 충혜왕시대까지 살았던 문신이다. 고려 마지막 공양왕이 34대인 점으로 봐서는 완전히 고려 말기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가장 이른 시기에 이화 관련 시를 남긴 이규보선생에 비하여 겨우 100년 늦게 태어나신 분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시조문학의 역사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 작품은 우탁(禹倬, 1262~1342)선생의 ‘석양에 홀로 서서’와 이조년선생의 다정가로 보는 것 같다. 그런데 한글이 없던 시절 우리말로 된 그 시조를 무슨 수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전해왔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그래서 당초에는 한시로 지어졌는데 나중에 누군가 한글 시조로 번안하고 그 한글 시조를 김천택(金天澤, 1680~?)선생이 1728년 엮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 아니라면 당초 우리말 시조로 창작하여 대대로 구전되어 왔고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한자로 번역한 한시가 보충적으로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고려 후기 문신인 이조년(李兆年, 1269~1343) 작품이라고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는 다음과 같다. 고어를 그대로 올릴 수가 없어서 현대어로 몇 자 고쳐서 올린다. 이 시조의 제목 다정가(多情歌)는 당초에는 없었는데 후세인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지금도 특히 저녁 무렵 배꽃만 보면 생각나는 시조이다.

 

다정가(多情歌) – 이조년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졔

一枝 春心을 子規야 알아마는

多情도 病인양하야 잠못드러 하노라

 

이화(梨花)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 삼경(三更) 
일지춘심(一枝春心) 자규(子規) 알랴마는
다정(多情) 병(病)인양 하여 잠못 이뤄 하노라

 

다음은 정조(正祖) 때 문신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의 문집인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소악부(小樂府)에 실려 있다는 이조년 다정가의 한시(漢詩) 버전이다. 우리말 시조는 3행이지만 한역(漢譯)판인지 아니면 이게 원본(原本)인지는 모르지만 한시는 7언절구(七言絕句)인 4행시로 되어 있다.

 

다정가(多情歌) – 이조년

 

梨花月白三更天(이화월백삼경천) 

啼血聲聲怨杜鵑(제혈성성원두견)

儘覺多情原是病(진각다정원시병)

不關人事不成眠(불관인사불성면)

 

이조년선생과 이화에 월백하는 모습

 

 

다음은 고려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즉사(卽事)라는 7언율시이다. 즉사란 눈 앞에서 보거나 듣거나 한 일을 말한다.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쓴 시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조선에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다시 원나라 과거에도 합격하여 주목을 받았던 목은 이색은 고려의 개혁을 앞장서서 주도하였으나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는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와 대척점에 있던 강경파 정도전과 남은 등은 조선 개국 후 그의 처형을 시도하였으나 이성계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왕자의 난 이후 정도전과 남은 등이 숙청되고 태종(太宗)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이색의 측근인 권근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된 조정으로부터 ‘동방(東方)의 대유(大儒)’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고려에 이어 새로운 조선에서도 여전히 도학(道學)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버리지 않았기에 그는 조선전기 사림(士林)에 의해 절의와 지조의 상징으로 인식된 사람이다. 그는 특히 북송의 은일시인이자 매처학자(梅妻)라는 별호를 가진 임포(林逋, 967~1028)를 무척 동경하여 매화 관련 많은 시를 남겼는데 이는 훗날 퇴계의 지극한 매화 사랑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가 매화를 사랑한 것은 매화가 오상투설(傲霜斗雪)의 불굴의 지조를 상징하기에 그의 정치적 입지와 상통하여 그런 줄 알았더니 이화(梨花) 사랑도 만만치 않은 것을 보니 원래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기야 예나 지금이나 한가한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면 식물에 대한 관심이 저절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즉사(卽事) – 이색, 임정기역

 

柴門寂寞對山開(시문적막대산개)

兀坐秋風想釣臺(올좌추풍상조대)

松樹千尋凌碧漢(송수천심능벽한)

梨花數點落蒼苔(이화점수낙창태)

悠悠送日還多故(유유송일환다고)

咄咄書空又幾回(돌돌서공우기회)

淨盡胸中何脫洒(정진흉중하탈쇄)

抽毫祗恨乏長才(추호지한핍장재)

 

사립문은 적막하게 산 마주해 열렸는데

추풍에 외로이 앉아 낚시터를 생각할 제

천길의 소나무는 푸른 하늘에 치솟고

두어 점 배 꽃은 푸른 이끼에 떨어지네

유유히 날 보내는데 도리어 일은 많아라

허공에 돌돌을 쓴 게 또 그 몇 번이던고

흉중은 맑게 씻어 어찌 그리 초탈한가만

붓 빼들면 높은 재주 없어 한스럴 뿐이네

 

전원과 배꽃

 

 

다음은 이화하자영(梨花下自詠)이라는 시이다. 이번에는 5언 율시이다.

 

梨花下自詠(이화하자영) - 이색, 임정기역

 

一樹梨花下(일수이화하)

風微景自繁(풍미경자번)

飄空如雪落(표공여설락)

行地似波奔(행지사파분)

何處對飮酒(하처대음주)

吾家空掩門(오가공엄문)

身閑足幽味(신한족유미)

竟日坐忘言(경일좌망언)

 

한 그루 배나무 꽃 핀 아래

실바람 부니 경치 절로 번화해라

공중에 날릴 땐 떨어지는 눈 같고

땅에 나부낄 땐 치닫는 물결 같네

어디선 배꽃 대해 술을 마실 텐데

우리 집만 괜히 문을 닫았네그려

몸이 한가하니 그윽한 맛 넉넉해

하루 종일 말을 잊고 앉아 있노라

 

다음은 목은선생의 또 다른 7언율시 유감(有感)이다.

 

有感(유감) – 이색, 임정기역

 

塵世悠悠一夢中(진세유유일몽중)

循環榮辱儘無窮(순환영욕진무궁)

人如逝水那能止(인여서수나능지)

客與浮雲忽已空(객여부운홀기공)

以酒爲名還作累(이주위명환작루)

闔家待罪幸論功(합가대죄행론공)

柳絲黃甚梨花白(유사황심리화백)

寂寞林園春自濃(적막림원춘자농)

 

유유한 풍진 세상 한바탕 꿈속만 같아라

영고 성쇠가 돌고 돌아 모두 끝이 없구려

인생은 유수 같거니 머물게 할 수 있으랴

나그네는 구름과 함께 문득 사라져 버렸네

술로 이름 얻음은 도리어 누가 되거니와

온 가족이 벼슬하여 논공 받음은 다행일세

버들잎은 매우 노랗고 배꽃은 하도 희어

적막한 숲 동산에 봄이 절로 무르녹았네

 

목은 이색

 

 

다음은 조선 초기의 문신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영평의 객관에 묵으면서 앞의 운을 사용하여 신어사에게 부치고 겸하여 이사군에게 적어 부치다.(宿永平客館用前韻寄申御史兼簡李使君)라는 매우 긴 제목의 시이지만 내용은 7언절구로 짧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은 바로 그 지역에서 옛날 서거정선생이 살았기에 붙인 이름이다.

 

宿永平客館用前韻寄申御史兼簡李使君(숙영평객관용전운기신어사겸간이사군) - 서거정(徐居正), 임정기역

 

梨花如雪月如銀(이화여설월여은)

空舘無人更憶君(공관무입경억군)

過盡春宵渾不寐(과진춘소혼불매)

子規啼破滿山雲(자규제파만산운)

 

배꽃은 눈빛 같고 달빛은 은빛 같은데

빈 객사에 사람 없어 또 그대가 생각나네

봄 밤이 다 지새도록 전혀 잠 못 이룰 제

두견새는 산 가득한 구름을 울어 부수네

 

돌배나무

 

 

이화 관련 시 소개는 그만하고 이화와 관련된 명칭 몇 개를 알아본다. 우선 우리나라 웬만한 지방에는 배고개나 배나무골,  배나무산이  한둘은 있어 그 수효를 파악하기 조차 어려울 것이다. 조선 효종 때 목멱산 남쪽 역원(驛院) 주변에 배나무가 많다고 특별히 이태원(梨泰院)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벼슬아치가 이동하거나 공문을 전달할 때 마필(馬匹)이나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보던 곳을 역(驛)이라 하고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숙소를 원(院)이라 하였다. 이를 합하여 역원(驛院)이라 했는데 역참(驛站)이라고도 했다. 중종 이전에 종로구 이화동 일대에 배나무가 많은 지역에 정자를 짓고 이화정(梨花亭)이라 했기에 그 동네 이름이 이화정동이 되었으며 그 자리에 이승만박사가 해방 후 귀국하여 거처를 잡았는데 그게 지금은 사적인 된 이화장(梨花莊)이다. 그리고 고종 때 김윤식이 올린 몇 개의 이름 중에서 주변에 배나무가 있기에 왕이 직접 선정한 이름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인데 이게 바로 오늘날 이화여고 이화여대의 전신인 것이다. 송파와 강남에는 배밭이 많았기에 현재도 관내 배밭공원이 있으며 비교적 최근까지도 배밭이 있었던 태릉에는 배밭갈비집이 무수하게 많았고 지금도 인근 경기도 지역에 더러 있다.

 

이화장과 과거 흔했던 태릉배갈비집

 

 

참고로 1897년 탄생하여 1910년 한일병합까지 존재하였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문양인 이화문은 한자로 李花紋(이화문)으로 써 배꽃이 아닌 자두꽃이다.  이는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의 황실의 성씨가 이(李)씨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당나라 왕족의 성씨이었으며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이(李)씨를 상징하기에 자두꽃(李花)이 특별히 대접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김씨에 이은 두번 째로 많은 성씨인 데다가 조선왕족의 성씨라서 절대 무시당할 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 북경에 있는 황실정원 이화원은 한자로 颐和园(이화원)으로 쓰기에 배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청나라 말기 중국 역사상 최악의 황녀인 탐욕스러운 서태후가 붙인 명칭인데 이화(颐和)의 의미가 이양충화(颐养冲和) 또는 이양천년(颐养天年) 심평기화(心平气和)로 서태후 자기 자신의 원기 보양 또는 자신의 건강과 노후의 안락 및 장수를 기원하는 이름으로 풀이되어 정말 누구에서 설명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러니 중국에서 이화원(颐和园) 명칭에 대한 설명을 잘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중국 북경의 이화원(頤和園)과 대한제국의 이화문장(李花紋章)은 배꽃과는 무관하다.

 

 

이러고 보니 우리 선조들의 백설과 같이 순결한 배꽃에 대한 사랑도 결코 매화에 뒤지지 않는다. 그럼 요즘의 우리들은 어떨까? 다른 꽃나무들은 제쳐두고서라도 동양의 전통적인 봄꽃들인 매(梅)나 앵행도리(櫻杏桃李)와 비교하면 이화(梨花)는 완전히 뒤로 밀려난 것이 현실이다. 가장 먼저 피어 봄소식을 알리는 매화(梅花) 그리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벚꽃(櫻花)은 말할 것도 없고 은은하게 고향의 정취를 풍기는 살구꽃(杏花)이나 뒤늦게 등장하지만 화려한 색감으로 다가오는 복사꽃(桃花)에도 완전히 밀리는 모습이다. 심지어는 봄꽃으로서는 그다지 존재감이 없다는 자두꽃(李花)도 벅차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꽃을 감상하기 위하여 배나무를 정원수로 심는 가정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나무시장에서도 유실수가 아닌 관상용 배나무는 공급조차도 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배나무는 꽃을 감상하기 위하여 개발한 관상용 원예품종 즉 꽃배나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꽃매화와 꽃사과 그리고 꽃복사나무와 같이 꽃모양이나 잎 또는 수형이 매우 다양한 아름다운 원예품종들이 배나무에는 없다. 심지어는 꽃자두나무도 있고 살구나무 마저도 겹꽃이나 매화와의 교잡종 등의 품종이 보이지만 배나무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배나무에 대한 향수가 있어도 돌배나 산돌배 등은 나무 사이즈가 너무 커 가정의 정원에는 부담스럽다. 유일하게 우리 자생종 콩배나무만이 사이즈가 3m 안팎이므로 정원수로 적당하다. 하지만 특이하게 이 수종을 공급하는 화원도 매우 드물다. 이와 같이 시골 배농장이 아니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것이 배꽃이므로 점점 우리와는 멀어지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수많은 봄꽃 축제 중에서 배꽃축제는 정말 흔하지 않는데 그래도 매년 꾸준히 개최하는 지역이 소수라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산돌배나무도 정원수로는 사이즈가 너무 크다.
콩배인데 키가 겨우3m 정도이므로 정원수로 적합하다. 한택수목원
콩배는 열매가 사이즈도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