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기타 과 식물/작약과

480 모란(牡丹)을 목단(牧丹)으로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낙은재 2018. 5. 5. 12:39


모란(牡丹)


모란(牡丹)


바야흐로 모란의 계절이 와서 이미 지나가고 있다. 모란만 수십 그루 심어서 가꾸는 매우 대단한 모란정원을 가진 이웃이 있어서 개화 절정기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가서 세상에 제일 아름답다는 모란꽃을 한없이 구경하고 나서야 낙은재는 모란을 탐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이제야 나선다.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이 목본 식물의 올바른 우리나라 이름은 모란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목단이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화투놀이를 하는 분들은 6월 목단이라고 하지 6월 모란이라고 하는 분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모란이 정명이며 목단은 모란의 이명으로 처리되고 있다. 왜 그럴까? 게다가 모란은 분명 중국 원산이며 이름 또한 중국에서 왔는데 중국 한자명은 모단(牡丹)인데 왜 우리는 모란이라고 발음할까? 그리고 많은 분들이 모란을 한자로 牡丹이 아닌 牧丹(목단)으로도 쓰고 이 또한 모란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게 옳은 말일까? 여기에 또 하나 더 궁금한 것은 모란과 매우 비슷한 작약은 도대체 모란과 어떤 관계일까?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답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탐구해 본다.

속명 Paeonia는 그리스 신화속 신들의 의사 파에온(Paeon)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영국 식물학자 Henry Charles Andrews에 의하여 1804년 Paeonia suffruticosa Andrews로 명명된 모란은 중국 황화 유역 몇몇 성이 원산지이지만 워낙 재배 역사가 오래되어 거의 중국 전역으로 널리 퍼져 현재는 동북과 신강 및 운남 등에서도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작약과(Paeoniaceae)의 유일한 속인 작약속의 속명 Paeonia는 1737년 식물분류학의 창시자 린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의사인 파에온(Paeon)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파에온은 의학과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의 제자였는데 그를 질투한 스승의 노여움을 사서 위기에 처하자 제우스가 그를 peony 꽃으로 변하게 만들어 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피오니는 물론 모란일 수도 있고 작약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전설은 파에온이 바로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별명이며 그가 이 peony의 약성을 파악하여 트로이 전쟁에서 다친 병사들을 이 식물로 치료하였기 때문이라는 그의 이름을 땄다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좌)의 인사를 받고 있는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모란은 전세계 작약속 47종 중 하나로서 초본인 작약과는 달리 목본이며 원산지는 중국이다. 
모란은 식물분류체계적으로 Paeoniaceae(과) Paeonia(속)으로 분류된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작약과 작약속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모란이 속하는 속(屬) 즉 Paeonia를 우리는 모란속이라고 하지 않고 작약속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럼 결국 모란과 작약은 같은 속이다. 그래서 외형이 매우 흡사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약속은 중국 뿐만아니라 유럽과 북미에 걸쳐 전세계 47종이 분포하는데 대부분이 작약과 같은 초본(草本)이지만 일부는 목본(木本)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가 중국 원산의 모란이라고 인식하면 되겠다. 우리 뿐만아니라 중국에서도 Paeonia를 작약속(芍药属)이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작약속이 아닌 모란속(ボタン属)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Paeonia에서 파생된 peony가 작약을 이르기도 하지만 모란을 뜻하기도 하여 결국 작약속(Paeonia) 전체 식물을 통칭한다. 그러나 좁게는 주로 적작약 즉 Paeonia lactiflora를 지칭하며 모란은 목본이라고 특별히 tree peony라고 부르는 것을 봐서는 영어권에서도 모란속 보다는 작약속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판단된다. 작약속 식물은 우리나라에 적작약(참작약)과 산작약(백작약) 두 종이 자생하고 있으며 모란 등 외래종을 포함하면 모두 16종이 등록되어 있다. 한때 작약속이 미나라아재비과(Ranunculaceae)로 분류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신설된 작약과의 유일속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학명 Paeonia suffruticosa로 표기되는 모란은 중국에서 수천 년 전부터 자생하고 있었으며 최소한 1,500년 이상의 재배 역사를 가지고 있어 그동안 이리저리 무수한 인위적인 교잡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학명을 Paeonia x suffruticosa로 표기하여 교잡종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기도 한다. 종소명 suffruticosa는 아관목이라는 뜻으로 주로 초본인 작약속에서 키가 2m까지 자라는 목본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작약(芍药)

작약은 아직 개화전이다. 모란보다 조금 늦게 개화하며 초본이라서 목질 줄기가 없다.


모란(牡丹)이 한중일 3국의 정명이고 목단(牧丹)은 우리나라서만 쓰는 이명이다.
원산지 중국에서의 정명은 모란(牡丹)인데 서고(鼠姑)、녹구(鹿韭)、백용(白茸)、목작약(木芍药)、백우금(百雨金)、낙양화(洛阳花)、부귀화(富贵花) 등 매우 다양한 이명이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분명 한자 수컷 모자 牡와 붉은 단자 丹이 결합한 것인데 왜 우리는 모단이라고 하지 않고 모란이라고 할까? 나름대로 분명 이유가 있어서 모단이 모란으로 되었을 터인데 아무도 그 연유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여하튼 모란으로 굳어졌기에 표준어로 삼고 있다. 이는 菩提子(보제자)를 보리자로 그리고 木瓜(목과)를 모과로 읽는 것과 같이 본음이 아닌 속음도 굳어져 버린 것은 예외적으로 표준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道場(도장)을 도량으로 布施(포시)를 보시로 本宅(본택)을 본댁으로 글자와 다르게 발음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모단(牡丹)이 왜 모란으로 발음이 되었을까 하는 이 난해한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중에 이를 제대로 해석하시는 분을 찾아 정말로 기쁘다. 그분은 다름아닌 인제대학교 석좌교수셨던 고 진태하(陣泰夏)박사님이시다. 그분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동국정운(東國正韻)에 “端之爲來, 不唯終聲, 如次第之第, 牡丹之丹之類”라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즉 우리나라 한자 음에서 ‘ㄷ’이 ‘ㄹ’로 변음된 것은 종성에서뿐만 아니라, 초성에서도 ‘次第’가 ‘차례’, ‘牡丹’이 ‘모란’으로 발음되는 것과 같다.] 동국정운에 이런 내용이 있었구나! 이걸 요즘 우리는 속음화(俗音化) 또는 활음조(滑音調)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牡丹을 목단으로 읽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엉터리임은 물론 모단으로 읽어도 틀린 것이 되므로 반드시 모란이라고 발음하고 써야하는 것이다.


동국정운

세종때 발간된 책(운서)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우리나라에서 모란의 이명으로 등재되어 있는 목단(牧丹)이 왜 중국 식물지나 도감에는 이명으로조차도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모란이라는 이름보다는 목단이라고 더 많이 부르는 것 같다. 시인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덕분에 모란이라는 말을 많이 쓰기는 하지만 그래도 화투장의 6월 목단 때문인지 목단이라고 더 많이 부르는 것 같다. 이는 순전히 화투 때문 만은 아니고 우리나라 한의학계에서 약재로 사용하는 모란 뿌리의 껍질 즉 모란피(牡丹皮)를 거의 모두 목단피(牧丹皮)라고 부르고 있으며 한자로 쓰여진 과거의 많은 문헌에 목단(牧丹)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목단도 우리 독창적인 이름은 아니고 이 또한 중국에서 건너온 이름일 것 같은데 문제는 중국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ボタン을 목단(牧丹)으로는 쓰지 않고 모란(牡丹)이라고 쓴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사전에 아예 목단(牧丹)이라는 단어조차도 없다.


그런데 왜 가끔 목단(牧丹)이라는 표기가 중국에서도 보일까? 여기에 대하여는 그 어디에도 설명이 없지만 그 이유는 중국에서 목단(牧丹)과 모란(牡丹)이 동일하게 mǔdan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牡丹을 牧丹으로 잘못 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잘못 쓰여진 표기가 우리나라에 널리 사용되는 이유는 아마 목단(牧丹)은 글자 그대로 발음되기 때문에 발음이 변형된 모란(牡丹)보다는 한자 표기시 거부감이 적어서 일 것이다. 게다가 모란이 마치 순수 우리말 이름 같아서 과거 한자어 표기를 선호하던 풍조도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부에서 목단(牧丹) 마저도 활음조(滑音調)를 이유로 모란으로 발음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말도 안된다. 牧丹은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도 목단으로 등록된 용어이므로 목단으로 제대로 읽는 것이 옳다. 따라서 학명 Paeonia suffruticosa로 표기되는 이 목본 식물은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원산지 중국과 인근 일본 등 동양 3국에서의 정명은 모두 牡丹(모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牧丹(목단)은 우리나라에서만 모란의 이명으로 인정받아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용어이며 이명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란(牡丹)의 어원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며 유래는 무성생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본초강목에서 해석한다.
원산지 중국에는 이 모란을 부르는 이름이 위에 나열한 이명 외에도 화중지왕(花中之王)이나 국색천향(国色天香) 등 이를 극찬한 별명도 무수히 많지만 정명 모란(牡丹)은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어 중국식물지에서는 예상 외로 그 어떤 별명(이명)도 병기하지 않고 모란 단 하나의 이름만 제시한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모란이 최초로 문헌에 나타난 것이 바로 진한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인데 거기에 바로 “牡丹味辛寒,一名鹿韭,一名鼠姑,生山谷”。이런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해석하면 "모란은 맛이 시고 차며 일명 녹구 또는 서고라고 하며 산골짜기에서 자란다." 신농(神農)은 전설적인 인물로 중국 한의학의 창시자이며 3황 중 하나인 염제 신농을 말한다. 그가 저술하였다는 신농본초경은 이시진의 본초강목이 나오기 전까지 중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의학서 겸 식물지였다. 따라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있는 문헌에서 이 식물의 이름이 牡丹이라는데 그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과연 牡丹이 무슨 뜻이냐? 이것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명나라때에 출간되어 신농본초경 이후 중국의 가장 저명한 의학서가 된 본초강목(本草纲目)에서 저자 이시진은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한다. “牡丹虽结籽而根上生苗,故谓“牡“(意谓可无性繁殖),其花红故谓“丹”。"모란은 비록 열매를 맺지만 뿌리에서 새싹이 나와 이른바 무성생식을 하므로 모(牡)라고 하며 그 꽃이 붉기 때문에 단(丹)이라 한다." 여기서 모(牡)는 수컷을 뜻한다. 이시진(李时珍)은 우리나라 허준선생보다 한 세대 정확히는 21년 먼저 태어난 분으로 중국 전통의학을 집대성하여 무려 192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본초강목]을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겨 중국 역사상 가장 저명한 의학가라고 중국에서 약성(药圣)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따라서 모란의 어원은 신농본초경이고 그 이름풀이는 본초강목에 기록되어 있어 매화와 더불어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나무 둘 중 하나임을 실감나게 한다. 여기까지가 최근에 널리 지지받는 모란의 어원에 관한 정설이다.


신농본초경과 본초강목


그러나 중국 일부에서는 이시진의 모란 해석에 다소 억지가 있다고 감히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꽃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약효를 중시하던 시절이라 나름대로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판단되어 소개한다. 
1. 우선 모란은 결실을 잘하며 발아도 잘 되는데 근얼분주가 쉽다고 그걸 무성생식이라고 하여 굳이 수컷이라는 의미인 牡(모)라고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2. 고대 중국 식물명에 자주 등장하는 牡(모)와 두(杜)는 그 당시 암수 즉 남(牡)여(杜)를 지칭하지만 바꿔 말하면 대소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대로 해석하면 모란은 크고 붉은 꽃(大紅花)이 핀다는 의미가 된다. 
3. 일각에서는 牡(모)의 발음이 木과 동일하고 丹의 발음은 새알을 뜻하는 蛋(단)과 동일하여 木蛋 즉 알뿌리가 있는 나무 즉 목작약(木芍药)을 의미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학명 Paeonia suffruticosa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4. 牡(모)의 발음이 고대에는 콩을 뜻하는 豆(두)와 비슷하며 단은 새알을 뜻하므로 모란은 토란 알뿌리를 뜻하는 芋蛋(우단)과 같다고 풀이를 한다. 그 외에 일일이 설명은 생략하지만 신농본초경에서 언급된 鹿韭(녹구)와 鼠姑(서고) 그리고 작약(芍药)의 글자를 풀이하면 모두 구경(球莖)을 가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들로 귀결되므로 결국 모두 같은 의미라는 주장을 한다.


중국의 모란 역사
일찍이 글자를 발명한 중국은 그 덕분에 항상 그들만 오랜 역사를 가진 것처럼 떠들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중국 감숙성 무위현에서 비교적 최근인 1956부터 1981까지 4차에 걸쳐 발굴된 동한(BC25~220) 초기시대 분묘군에서 모란으로 혈어병을 치료한다는 기록이 나와 신농본초경의 모란 어원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당나라 이전에는 모란이라는 말이 없었다는 주장은 그 근거를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약초로 모란이 이용되었지만 남북조시대에 와서는 관상용으로 재배되기 시작을 한다. 북제(550~577) 세조때의 화가 양자화(杨子华)가 그린 그림에 분명 모란으로 추정되는 꽃나무가 있다고 당나라 위현(韦绚)이 쓴 유빈객가화록(刘宾客嘉话录)에 기록되어 있어 이미 그 수나라 이전에 모란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송시대 그려진 모란호접도

당태종이 이런 그림을 보냈으면 선덕여왕이 향기없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중국 왕조별 모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많다. 수양제때 벽지 200리의 땅을 개발, 서원(西苑)이라는 정원을 조성하여 이주(易州)에서 온 모란 20상자 등을 심었는데 거기가 지금의 낙양 서원공원 일대라고 한다. 지금의 중국 낙양이 모란의 중심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수나라때 모란 품종명이 등장하고 있으며 황궁과 고관대작의 정원에 심었다고 한다. 당조에 와서는 유종원이 쓴 용성록(龙城录)에 송단부(宋单父)라는 자는 모란의 품종개발에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어 1,000종이 각기 다른 꽃을 피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급기야 양귀비에 푹 빠진 당현종(685~762)은 그 송단부를 불러 장안 여산에 모란을 무려 만주나 심었다고 하며 꽃의 색상이 모두 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송단부의 사후에 그 기술이 실전되었다고 모두들 아쉬워 했다고 한다. 그 이전 장안의 황궁을 거닐던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백화의 일제개방을 명했는데도 모란의 개화가 늦다고 낙양으로 추방해 버려서 낙양이 현재 모란의 재배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대신 모란은 불굴의 기개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고 하는 다소 황당한 설도 있다.

실제로 송나라 시절 낙양이 모란재배 중심지가 되어 주사후(周师厚)의 낙양모란기와 낙양화목기 그리고 구양수(欧阳修)의 낙양모란기(洛阳牡丹记) 등 모란을 예찬하는 글들이 쏟아진다. 결론은 모란이 꽃 중에 최고이고 낙양이 모란 재배의 최적지라는 이야기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계속 하려니 재미가 없다. 여기서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의 모든 모란 기록은 모두 牡丹으로 되어 있으며 牧丹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나라에서 와서는 모두들 牧丹으로 고쳐서 구양수(1007~1072)의 洛陽牧丹記라고 한자로 적고 한글로는 낙양목단기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낙양모란기라고까지 적고 있다. 즉 옛 문헌의 원문이 어떻게 되어있던 인용하는 사람이 한글을 모란이나 목단 한자로는 牡丹과 牧丹 중에서 자기가 쓰고 싶은 용어로 마음대로 바꿔 써버리니 진짜 원본을 보지 않고서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원산지에서도 쓰지 않는 牧丹이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할 길이 막막하다. 


목단(牧丹)은 삼국유사의 오류에서 비롯된 잘못된 용어인데다가 정명도 아니므로 되도록 모란(牡丹)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국어학자도 아닌 내가 왜 원본까지 구해서 봐야 해? 하면서 짜증을 내고 있던 차에 드디어 여기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어 매우 기쁘다. 이 또한 인제대학교 석좌교수셨던 고 진태하(陣泰夏)박사님께서 언급하고 계시다. 그분의 책 국어산책 182쪽에 수록된 의견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唐太宗送畵牧丹, 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 見畵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 待其開落, 果如 其言”이라 한 기록에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설마 이게 정말 우리 선조들의 실수로 잘못 쓰인 용어였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중국에는 목단(牧丹)이라는 용어는 거의 안쓰고 목단피(牧丹皮)라는 용어는 더러 쓰이는데 이건 조선족들이 사용하는 용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렇게 되면 같은 내용을 수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은 어떠한가 싶어 하는 수 없이 고생하여 찾아 봤더니 거기에는 得自唐來牡丹花圖幷花子(득자당래모란화도병화자)라고 되어 있어 제대로 모란(牡丹)으로 쓰여져 있다. 따라서 목단은 비록 오랫동안 굳어져 표준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애초 오류에서 비롯되었으며 현재 해당 식물의 정명도 아니므로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삼국유사(좌)와 삼국사기(우)

삼국사기에 제대로 牡丹(모란)으로 기록된 것이 삼국유사에 와서 牧丹(목단)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모란과 중국의 국화 지정
청나라시대까지 모란이 최고의 꽃나무라고 인정하고 왔던 중국은 사실상 모란을 국화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 말기 실제로 국화로 지정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1929년 모란이 아닌 매화를 국화로 지정하게 된다. 그러다가 공산정권이 들어서 매화로 지정한 국화를 폐지하고 만다. 따라서 현재 중국은 국화가 없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별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아니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꽃들이 너무 많아서 딱히 어느 하나를 지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몇 차례 시도를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중국화훼협회에서 모란을 단독 국화로 지정하고 봄의 난과 여름의 연꽃 그리고 가을의 국화(菊花)와 겨울의 매화를 사계절 보조 국화(國花)로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무산된 바 있고 2007년에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원사 공동 발의로 모란과 매화 두 종을 같이 국화로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이 또한 양회(兩會)를 통과하지 못하였다. 매화와 모란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의 크기가 너무 팽팽하기 때문이다. 모란은 1985년 중국 인민들의 투표로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10대 꽃 중에 매화에 이어 두 번째로 뽑힌 바 있다. 중국인들은 모란의 꽃이 色泽艳丽(색택절려), 玉笑珠香(옥소주향), 风流潇洒(풍류소쇄), 富丽堂皇(부려당황), 雍荣华贵(옹영화귀)하다고 좋은 말은 죄다 끌어다 칭송한다. 그러나 비록 나무라고는 하지만 그 줄기가 유약하여 불상정발(不上挺拔) 즉 굳세고도 우뚝서는 힘찬 기운이 없어서 매번 14억 대국의 국화로 지정되는데 마지막 걸림돌이 되고 있다.

모란의 국내 도입시기
우리나라는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또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당나라에서 당태종(재위 626~649)이 모란꽃의 그림과 모란씨 석되를 보내왔다고 삼국사기(1145)와 삼국유사(1281)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이 보다 늦은 804~806년 사이 중국으로 유학간 공해화상(空海和尙)이 귀국길에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에는 724~749년 해외에 최초로 보급한 나라가 우리가 아닌 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록 그 전래 시기는 차이가 좀 나지만 공해화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일본 자료와 일치한다. 그럼 우리나라 덕만공주가 그림의 꽃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실제로 심었더니 정말 향기가 없더라는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고사는 뭐란 말인지. 일본에서 유학온 스님이 가져간 모란은 기록에 남고 당나라 황제가 신라에 선물한 그림과 모란씨는 기록에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별 관심을 안 보이는 우리나라 자료는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았다는 말인지? 여하튼 당태종의 아버지 당고조 이연(재위 618~626)이 621년 우리나라에 신라 사신의 귀국길에 회사(回賜)로 그림과 병풍 비단 등을 보냈다는 기록은 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설총(658~?)이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에게 바친 화왕계(花王戒)에 나오는 화왕(花王)이 바로 모란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화왕기에는 딱히 화왕이 모란이라는 말도 없고 꽃의 묘사도 부족하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설총 당시는 아직 중국에서도 모란이 화중지왕(花中之王)이나 국색천향(国色天香)의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설총이 말한 화왕은 모란이 아닐 것이며 선덕여왕의 고사에 나오는 모란도 중국의 재배역사에 비추어 볼 때 국내로 도입되기에는 시기적으로 조금 빠르며 더구나 꽃에 향기가 없다는 기록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중국에서도 당나라 측천무후가 처음 모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황궁에 심기시작하였고 당현종 때에 가서나 유행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을 편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고려초에나 도입된 것으로 추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왕계의 화왕은 모란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선덕여왕 당시 모란의 국내 도입은 쉽게 부정할 것 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중국은 이미 수양제(재위 604~617) 시절 모란 재배가 확대되어 황궁와 고관들 정원에 심었으며 강성한 고구려와 대치하던 수나라나 당나라로서는 공동의 적을 둔 신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진평왕시절 나름대로 매우 귀한 꽃을 우리나라에 선물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일본 유학승이 800년대 초에 일본으로 가져간 모란을 그보다 한참 늦은 고려시대에나 국내 도입되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당시 당나라와 신라는 나당연합군을 편성할 정도의 우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당시의 모란은 수도 없는 교잡에 의하여 개량된 현재 우리가 보는 품종들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향기가 없거나 향기가 매우 약한 모란의 품종도 충분히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모란(牡丹)


모란(牡丹)



모란 관련 시

여하튼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 오면서 모란에 대한 글이 많이 나온다. 특히 모란을 무척 사랑한 백운거사 이규보(1169~1241)의 모란 관련 시가 많은데 그 중 절화행(折花行)을 한번 감상해 보자.


折花行(절화행) - 이규보

牡丹含露眞珠顆(모란함로진주과)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을
美人折得窓前過(미인절득창전과) 꺾어든 여인이 창으로 다가와 
含笑問檀郞(함소문단랑) 미소를 띠며 정인에게 묻는다. 
花强妾貌强(화강첩모강)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檀郞故相戱(단랑고상희) 정인이 장난끼를 되받아 
强道花枝好(강도화지호) "꽃이 그대보다 더 예쁘구려." 
美人妬花勝(미인투화승) 여인은 그 말을 듣고 토라져서 
踏破花枝道(답파화지도) 꽃을 밟아 뭉개며 말하기를 
花若勝於妾(화약승어첩) "꽃이 나보다 더 예쁘거든 
今宵花同宿(금소화동숙) "오늘밤은 꽃과 동침하시구려."


모란(牡丹)


중국에는 이규보보다 많이 앞선 당나라시대에 이미 모란에 관련된 많은 시가 등장하는데 그 중 유우석(772~842)의 상모란이 유명하다. 여기서 모란의 아름다움을 그 유명한 국색(国色)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처음 등장한다. 유우석(刘禹锡)은 당나라 문학가로서 유종원 백거이와 더불어 3걸로 불리는 사람이다.


赏牡丹(상모란) -유우석

庭前芍药妖无格(정전작약요무격) 정원의 작약이 예쁘기는 하지만 격이 좀 떨어지고
池上芙蕖净少情(지상부거정소정) 연못에 핀 연꽃은 맑고 깨끗하지만 열정이 부족하다.
唯有牡丹真国色(유유모란진국색) 오직 모란만이 진정 나라안에서 으뜸이라 
花开时节动京城(화개시절동경성) 꽃이 피는 시절에는 온 경성이 들썩이네.


모란(牡丹)


모란을 이야기 하면서 시선 이태백의 그 유명한 청평조(清平调)를 빠뜨릴 수는 없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당현종에게 급하게 불려가 약간의 술주정을 부리면서 즉석에서 지은 시라서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명시라고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이 시는 모란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보다는 당현종 앞에서 양귀비의 미모를 칭찬하며 아부하기에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관의 심기를 건드리고 양귀비를 이미지가 좋지 않은 조비연에 비유하였다고 이 시로 말미암아 나중에 파직을 당한다. 관직에 적응이 안되어 스스로 떠난 것일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양귀비에 푹 빠진 당현종을 풍자한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무식한 내 눈에는 그저 양귀비의 미모를 마냥 찬양만 한 것 같다.


청평조(清平调) 3수(三首) - 이백

云想衣裳花相容(운상의상화상용)  찬란한 의상은 구름인 듯 고운 얼굴은 꽃인 듯
春风拂槛露华浓(춘풍불람로화농)。봄바람 난간을 스치고 진주 이슬 꽃잎에 맺혔네 
若非群玉山头见(약비군옥산두견)  서왕모의 군옥산 정상에서 본 선녀가 아니라면 
会向瑶台月下逢(회향요대월하봉)。필시 곤륜산 요대의 달빛 아래 신선으로 만나려나 
一枝秾艳露凝香(일지농염로응향)  농염한 진주 이슬 맺힌 꽃가지 향기 날리니
云雨巫山枉断肠(운우무산왕단장)。물거품된 무산운우를 애절타한 것이 헛되구려 
借问汉宫谁得似(차문한궁수득사)  묻노니 한나라 궁중에 어느 미녀가 있어 견줄까
可怜飞燕倚新妆(가련비연의신장)。설령 어여쁜 비연이 새단장하고 온들 가능할까 

名花倾国两相欢(명화경국양상환)  아름다운 모란꽃과 경국지색 여인이 서로 기뻐하니 
长得君王带笑看(장득군왕대소간)。바라보는 임금님 만면미소 그칠 줄 모르고 
解释春风无限恨(해석춘풍무한한),살랑이는 봄바람에 온갖 근심 날려 보내며
沉香亭北倚阑干(침향정북의난간)。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서있다.


명화인 모란(牡丹)과 경국지색인 양귀비



누가 뭐래도 나는 우리나라 김영랑(1903~1950)님의 아래 시가 가장 좋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牡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