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매화 품종 중에서 설중매가 가장 친숙하고 가장 선호하는 품종인 것 같다. 그래서 화원에 가면 대부분 설중매를 찾는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설중매를 찾으니까 화원에서 웬만한 조기 개화 품종은 죄다 설중매라 하면서 판매한다. 그 결과 전원생활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 정원에 심어진 매화가 서슴없이 설중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 설중매라는 품종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자.
우리나라에서 설중매는 1984~1985년에 방송된 문화방송 조선왕조오백년시리즈 3탄 월화드라마 설중매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고두심선생이 극중 설중매인 인수대비역을 맡았고 칠삭동이 한명회는 고 정진씨가 맡아서 열연했는데 폭발적인 인기로 한때 70%라는 최고시청률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시청률 공식집계가 1990년부터이므로 역대 최고시청률 드라마 랭킹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랭킹 1위라는 1996년 방송된 최수종 이승연 배용준 주연의 KBS 주말드라마 첫사랑의 65.8%보다도 높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설중매라는 용어를 거의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어느 주류회사에서 설중매라는 매실주를 1997년에 출시하여 더더욱 설중매는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술병에 <눈속에 핀 매화 설중매> 그 밑에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않는다. “라는 결연한 시구까지 인쇄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설중매라는 용어를 문화방송의 드라마가 처음 쓴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구한말인 1908년 충남 해미출신 소설가 구연학(具然學, 1974~?)선생이 1886년 일본 작가 스에히로 텟쵸(末広鉄腸)의 일본 개화기의 동명 정치소설을 번안(飜案)하여 설중매(雪中梅)라는 이름 그대로 발표한 바가 있다. 그럼 이 번안소설이 설중매라는 용어의 우리나라 시초인가? 그건 절대 아니다. 약 900년 전 고려말 대유학자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선생이 시에서 언급한 기록이 있다. 그의 후손이 한참 후인 1626년에 간행한 목은고(牧隱藁)에 문곡성부매화개(聞曲城府梅花開)라는 시의 雪中梅信依然在(설중매신의연재) 즉 ‘올해도 어김없이 눈속 매화 소식은 들려오지만’이라는 구절에 설중매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여말선초의 학자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의 후손이 1674년에 엮은 양촌집(陽村集)에도 설중매가 나타난다. 양촌은 차백첨견증운(次伯瞻見贈韵)이라는 시에서 雪中梅萼吐新芳(설중매악토신방)이라고 했다. 눈속에 파묻혀서 그런지 매화의 새 향기가 꽃받침에서 나온다고 노래하고 있다. 목은선생이나 양촌선생은 눈속에서 피는 매화를 한자식으로 설중매라고 표현한 것이지 특정 매화 품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개화기 번안소설 설중매의 여주인공 장매선과 1980년대 신봉승 극본의 문화방송 드라마 설중매의 여주인공 인수대비는 기품있고 고매한 성품의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설중매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 중국에는 설중매라는 품종의 매화가 존재하는 것일까? 중국은 북송시대 문신인 정해(郑獬, 1022~1072)가 쓴 설중매(雪中梅)라는 시가 남아 있어 설중매라는 용어의 사용 역사가 깊다. 정해의 시에서도 섣달에 내리는 눈에 일찍 피는 조매(早梅)가 눈에 덮혀 설중매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에서도 설중매란 눈 오는 날 피는 품종과 무관한 모든 매화를 뜻하며 매화는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피므로 결국 품격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중국에도 송나라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설중매라는 매화 품종은 없다.
雪中梅(설중매) – 郑獬(정해)
腊雪欺梅飘玉尘,早梅斗巧雪中春。
更无俗艳能相杂,惟有清香可辨真。
姑射仙人冰作体,秦家公主粉为身。
素娥已自称佳丽,更作广寒宫里人。
일본은 아예 설중매(雪中梅)라고 하면 그저 앞에서 언급한 스에히로 텟쵸(末広鉄腸)가 쓴 개화기 정치소설을 뜻한다고 하거나 우리나라보다 훨씬 빠른 약 100년 역사의 일본술 정종의 상표로 인식한다. 물론 설중매(雪中梅)가 ‘雪の中で咲かせる花’라고 즉 ‘눈속에서 피우는 꽃’이라고 풀이를 하지만 일상적으로 눈속의 매화라는 의미로는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매화의 품종명을 잘 알고 있는 데다가 나무에 이름표도 매우 열심히 붙이므로 주로 품종명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품종명을 잘모르면 함부로 아무 이름으로 막 부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본의 수많은 매화 품종 중에서도 설중매라는 이름을 가진 품종은 없는 듯하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는 설중매란 눈 가운데 핀 매화 또는 눈이 내리는 중에 피는 매화로 풀이한다. 그러니까 동적으로 현재 눈이 내리는 중에 피는 매화가 설중매이지만 정적으로 매화가 핀 다음 눈이 내려서 꽃이 눈으로 덮힌 모습도 설중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중매란 특정 매화 품종을 이르는 말이 아니고 그냥 일상적으로 눈속에 핀 매화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설중매는 개화기에 눈만 오면 모든 매화가 설중매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세상 어디에도 설중매라는 매화 품종은 별도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집 매화가 설중매라던가 화원에 가서 설중매를 찾으면 안되는 것이다. 설중 매화의 모습을 연출하고 싶다면 일찍 개화하는 매화 품종들을 구입하여 봄눈이 오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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