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시(詩)/漢詩(한시)

弼雲臺看杏花(필운대간행화) – 朴趾源(박지원)

낙은재 2025. 4. 11. 06:35

 

겸제 정선이 그린 필운상화(弼雲賞花)

 

 

 

요즘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온통 벚나무 천지가 되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일본보다 벚나무가 더 흔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우리가 즐기는 왕벚나무는 국내 도입된 역사가 겨우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1907년 일본인들이 왕벚나무 묘목 1,500주를 들여 와 남산 왜성대공원에 500주를 심고 나머지를 여러 지역에 심은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자라자 1914년 남산에서 개최된 벚꽃놀이에 10만 인파가 모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럼 그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봄 꽃을 전혀 즐기지 않았단 말인가? 풍류를 즐겼던 양반들이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 대상은 삼국시대의 기록에서부터 나오는 살구꽃이었다. 왕벚나무 도래 이전에도 국내에 토종 벚나무들이 더러 있었지만 존재감이 약하여 살구꽃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살구꽃 즉 행화(杏花)에 관한 시는 고려시대에도 있었지만 조선조에 와서는 한양뿐만 아니라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집집마다 살구나무 한 그루 정도 심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수도 한양의 10만 호는 봄이 오면 살구꽃으로 뒤 덮였다고 조선 후기 문신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의 시집인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대저왕성십만호(大抵王城十萬戶)

춘래도시행화촌(春來都是杏花村)

 

대체로 왕성은 십만 호 가까운데

봄이 오니 온통 살구꽃 천지로다.

 

한양에서도 특히 서촌(西村)인 인왕산 아래 필운대(弼雲臺)의 살구꽃이 유명하여 행촌(杏村)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여의도 벚꽃놀이와 비슷하게 그 당시로서는 필운대 (살구)꽃놀이를 필운상화(弼雲賞花)라고 하며 즐겼다. 그래서 필운행화(弼雲杏花)가 성북동의 북둔도화(北屯桃花)와 더불어 봄꽃놀이의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그 당시 한양의 풍류객들의 유상(遊賞) 명소로는 동대문 밖의 흥인문양류(興仁門楊柳)와 무악재 천연정(天然亭)의 연꽃(荷花) 그리고 삼청동과 세검정 탕춘대(蕩春臺) 등의 자연 풍광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필운대(弼雲臺)는 현재 종로구 필운동 지역인데 명나라 사신이 중종의 청에 의하여 인왕산에 붙인 이름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온 것으로 인왕산을 필운산이라고도 했다. 인왕산 자락에 살던 권율(權慄, 1537~1599)장군의 집에서 처가살이 하던 사위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바위에 필운대(弼雲臺)라고 석각한 것이 지금도 배화여고 뒷쪽에 남아 있다. 북둔(北屯)은 조선시대 어영청의 북쪽 파견부대가 주둔하던 지역이라고 북둔이라고 했던 현재의 성북동을 말한다. 천연정(天然亭)은 돈의문(敦義門) 밖 서지(西池) 가에 세운 정자로서 시인 묵객들이 노닐던 곳으로 현재 서대문구 천연동 지역이다. 흥인문양류는 동대문 밖 청계천변의 수양버들 군락을 말한다.

 

여하튼 필운대의 살구꽃이 유명하여 여러 문인들이 다녀간 후 남긴 시들이 있는데 그 중에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한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필운대간행화를 소개한다. 연암은 필운대에서 가까운 아현동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살구꽃이 만개한 광경보다는 몰려든 상춘객들이 더 흥미로웠는지 그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필운대간행화(弼雲臺看杏花) - 박지원

 

斜陽焂斂魂(사양숙렴혼)

上明下幽靜(상명하유정)

花下千萬人(화하천만인)

衣鬚各自境(의수각자경)

 

지는 해 어슴푸레해지니 

위는 밝으나 아래는 그윽하다.

꽃 아래 수많은 사람들

차림새가 제 각각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