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4대 여류시인 중 한 명이며 탁문군 등과 더불어 촉(蜀)의 4대 재녀(才女)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설도(薛涛, 768~832)가 쓴 모란(牡丹)이라는 제목의 칠언률시(七言律诗)를 소개한다. 설도는 양민 출신으로 한때 기녀생활을 하였는데 809년 서촉으로 갓 부임한 11살이나 어린 원진(元稹)과 사랑에 빠졌다가 원진이 타지로 전근가면서 4개월 만에 이별하게 된다. 그래서 설도(薛涛)가 그 아픔을 노래한 시가 춘망사(春望詞)인데 이 시의 일부가 번안되어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곡 동심초의 가사가 된다. 일설에는 809년 처음 만났다가 헤어진 다음 5년 후인 814년 강릉(江陵)에서 재회하였다고 한다. 재회 당시 원진은 상처(喪妻)한 상태이었기에 서로 장래를 약속을 하여 설도(薛涛)는 기대감을 갖고 성도로 돌아왔으나 원진이 곧 다른 여인과 재혼하면서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설도는 좋아하던 화려한 의상을 벗고 암울한 회색 도포를 입고 평생토록 원진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가 평생 짝사랑한 원진(元稹) 또한 그 당시 백거이(白居易)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당나라 시인이며 나중에 재상급 벼슬까지 한 사람이다.
이 시는 설도(薛濤)가 실제로 원진(元稹)을 송별(送别)하고 난 다음 지은 시라고 한다. 모란을 자신이 사랑하는 정인(情人)에 비유하며 정인과 헤어질 때의 아쉬움 그리고 정인과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겉으로는 모란과 이별의 아쉬움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정인(情人)인 원진(元稹)과의 이별을 원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쓸 당시에만 하여도 설도(薛濤)는 그들의 사랑이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으로 보여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여기서 무협산(巫峡散)은 초나라 양왕(襄王)이 꿈 속에서 무산(巫山)의 신녀(神女)를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하다가 깨어서 헤어진 무산협에서의 이별의 고사를 말하고 무릉기(武陵期)는 도연명(陶渊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무릉(武陵)사는 어부가 우연하게 이상향(理想鄕)인 도원경(桃源境)을 발견하였으나 나중에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는 고사를 말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모란꽃은 한번 지고 나면 무산의 선녀나 무릉도원과 마찬가지로 다시는 재현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아쉬워하고 있었으나 뜻밖에 다시 피어나 재회한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무릉도원을 또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기뻐서 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별하는 마당에 재회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인데 어쩌면 설도는 원진과의 사랑이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신분의 차이나 나이의 차이를 쉽게 극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牡丹(모란) - 薛涛(설도)
去春零落暮春时(거춘령락모춘시)
泪湿红笺怨别离(누습홍전원별리)。
常恐便同巫峡散(상공편동무협산)
因何重有武陵期(인하중유무릉기)?
传情每向馨香得(전정매향형향득)
不语还应彼此知(불어환응피차지)。
只欲栏边安枕席(지욕란변안침석)
夜深闲共说相思(야심한공설상사)。
작년 늦봄 꽃잎이 시들어 떨어져 버릴 때
이별을 원망하며 눈물로 붉은 꽃잎을 적셨지
늘 무산 신녀 같은 영원한 이별일까 두려웠는데
어찌 무릉을 다시 찾았듯시 뜻밖에 또 만났을까?
매번 향긋한 향취로 그대의 마음을 전했었지
말하지 않아도 우린 서로 잘 통하는 사이라네
그대 가까이 화단 옆 난간으로 침상을 옮겨
밤새 한가롭게 서로의 그리움을 나누어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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