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이화하자영(梨花下自詠)이라는 5언 율시이다. 조선에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다시 원나라 과거에도 합격하여 주목을 받았던 목은 이색은 고려말 개혁을 앞장서서 주도하였으나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는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와 대척점에 있던 강경파 정도전과 남은 등은 조선 개국 후 그의 처형을 시도하였으나 이성계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왕자의 난 이후 정도전과 남은 등이 숙청되고 태종(太宗)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이색의 측근인 권근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된 조정으로부터 ‘동방(東方)의 대유(大儒)’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고려에 이어 새로운 조선에서도 여전히 도학(道學)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버리지 않았기에 그는 조선전기 사림(士林)에 의해 절의와 지조의 상징으로 인식된 사람이다. 그는 특히 북송의 은일시인이자 매처학자(梅妻鹤子)라는 별호를 가진 임포(林逋, 967~1028)를 무척 동경하여 매화 관련 많은 시를 남겼는데 이는 훗날 퇴계의 지극한 매화 사랑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가 매화를 사랑한 것은 매화가 오상투설(傲霜斗雪)의 불굴의 지조를 상징하기에 그의 정치적 입지와 상통하여 그런 줄 알았더니 이화(梨花)에 관련된 시도 많이 남겼다. 하지만 그의 이화(梨花) 관련 시들을 보면 대부분 한가하고 고독하게 은거하는 개혁가로서 심경을 토로하는 중에 잠깐 한두 마디의 소품으로 등장할 뿐인데 이 시에서는 바람에 흩날리는 배 꽃잎을 보고 있자니 술친구가 생각난다고 말하고 있어 이화(梨花)가 확실한 주인공인 것 같다.
梨花下自詠(이화하자영) - 이색, 임정기역
一樹梨花下(일수이화하)
風微景自繁(풍미경자번)
飄空如雪落(표공여설락)
行地似波奔(행지사파분)
何處對飮酒(하처대음주)
吾家空掩門(오가공엄문)
身閑足幽味(신한족유미)
竟日坐忘言(경일좌망언)
한 그루 활짝 핀 배꽃나무 아래
실바람 부니 경치 절로 번화해라
공중에 날릴 땐 떨어지는 눈 같고
땅에 나부낄 땐 치닫는 물결 같네
어디선 배꽃 대해 술을 마실 텐데
우리 집만 괜히 문을 닫았네그려
몸이 한가하니 그윽한 맛 넉넉해
하루 종일 말을 잊고 앉아 있노라
'시(詩) > 漢詩(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海棠(해당) - 진화(陳澕), 자도(紫桃)와 자두 (2) | 2025.04.17 |
---|---|
宿永平客館用前韻寄申御史兼簡李使君(숙영평객관용전운기신어사겸간이사군) - 서거정(徐居正) (2) | 2025.04.17 |
다정가(多情歌) – 이조년(李兆年), 한시(漢詩) 버전 (2) | 2025.04.16 |
落梨花(낙이화) - 김구(金坵) (0) | 2025.04.16 |
天壽寺門(천수사문) – 이규보(李奎報) (0) | 2025.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