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탐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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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국적 논란과 일본 국명으로 된 우리 자생식물의 학명

낙은재 2018. 10. 1. 21:59


동의보감 중 탕액편이 본초학서이며 식물지라고 할 수 있다.


한중일 동양 3국 중에서 식물학이 가장 앞섰던 나라는 단연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3만 종이 넘는 방대한 식물이 중국 땅에 존재한다는 것도 겨우 몇 천 종에 불과한 우리로서는 그저 부럽기만 한데다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 한의학의 근간이 바로 본초학 즉 식물학이 아니던가? 과거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신농본초경(神农本草经)까지는 들먹이지 않더라도 근세에 와서 제대로 완비된 본초서 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중국은 이미 1596년에 명나라 이시진(李时珍)이 저술한 그 유명한 본초강목(本草纲目)이 출간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게 곧바로 1613년 의성(醫聖) 허준(許浚)에 의하여 저술된 동양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이 발간된다. 


그러나 일본은 그때까지 변변한 본초학서가 없다가 1709년 카이바라 에키켄(貝原 益軒)이란 유학자가 저술한 생물학 및 농학 교본인 대화본초(大和本草)가 발간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한참 후인 1803년에 와서야 지볼트가 일본의 린네라고 칭송하였다는 오노 란산(小野蘭山)이 저술한 본초강목계몽(本草綱目啓蒙)이 출간된다. 이미 이때는 서양의 식물학자들이 일본을 다녀간 뒤가 되며 내용도 제목 그대로 중국의 본초강목을 기초로 하여 해설하고 일본 것을 약간 가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식물을 약재로 연구하는 본초학 기준이고 주로 관상용 식물을 심는 정원의 역사에 관하여는 중국이 가장 앞섰던 것은 인정하겠으나 우리나라가 일본에 앞섰다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은 관상수로서의 식물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이제까지 목본 탐구를 하면서 개별 수목에 대한 옛날 자료가 일본에는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전혀 없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화본초

약용식물보다는 농산물과 동식물을 다루고 있어 나름대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다.


데지마의 3학자(出島の三学者) 

여하튼 동양 3국 중에서 본초학이 가장 뒤처졌던 일본이 린네가 창시한 서양의 식물분류학이 도입되면서부터는 판도를 완전히 뒤집고 가장 그것도 아주 월등하게 앞선 나라로 받돋움한다. 일본이 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물론 우리나라 보다는 더 넓은 기후분포대의 영토를 가지고 있어 우리보다는 약간 더 다양한 식물 자원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다양함에 크게 못미치는 일본이 식물분류학에서 월등하게 앞선 것은 바로 서양에 문호를 일찍이 개방하여 서양식 식물분류학을 빨리 배웠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직간접적으로 이를 도왔던 서양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일본 식물학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함과 동시에 일본 식물을 서양에 소개한 서양 식물학자가 한둘이 아니다. 우리는 단 한 명도 없는데 일본에는 무려 3명이나 다녀가서 세계 식물학계에 중요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들은 모두 에도(江戸)시대 외국인 거류 허가지역인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에 체류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일본에서는 데지마의 3학자(出島の三学者)로 부른다. 그 당시 데지마 상관(商館)에 체류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셋은 모두 의사의 신분으로 네덜란드인을 가장하여 들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나가사키 데지마

이렇게 인공섬을 만들어 외국 상인들의 체류를 허가했다.


엥겔 베르트 켐퍼 (Engelbert Kaempfer : 1651~1716)

독일 의사겸 자연과학자 및 탐험가로서 1690~1692 2년간 일본 데지마(出島)에 체류하면서 약초원도 만들어 재배를 하고 서양에 최초로 은행나무와 23개 품종의 동백나무 그리고 차나무 등을 소개하여 식물분류학의 창시자 린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은행나무의 속명은 그가 남긴 원고에 일본 발음 그대로 Ginkyo로 기록되어 있던 것을 린네가 그만 오기하여 Ginkgo로 변한 것이다. 그의 영향으로 나중에 데지마를 통하여 서양에 들어간 은행 종자는 1730~1767 사이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Utrecht) 식물원에 심어져 아직도 살아 있는데 그 나무가 서양에 심어진 최초의 은행나무가 된다. 물론 원산지 중국 귀주성에 있다는 5천 년 넘은 은행나무나 용문사에 있는 천백 년이 넘은 우리나라 최고령 은행나무에 비하면 한참 어리기는 하다. 켐퍼의 식물조사와 관련된 원고는 의학관련 정보와 함께 그의 사후 1712년 라틴어판 Amoenitatum exoticarum라는 책으로 출간이 된다. 그 후 1727년 출간된 영어판 History of Japan(日本誌)는 당시 쇄국정책으로 닫혀있던 일본을 서양에 자세하게 소개하는 주요 정보가 되어 나중에 툰베리나 지볼트의 일본 방문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켐퍼의 Amoenitatum exoticarum

식물분류학이 창설되기 전인 1712년에 이런 일본 식물에 관한 책이 발간된다.


켐퍼가 당시 일본 쇼군을 만나러 가는 모습



켐퍼의 일본지(1727년)

일찍이 이런 책들이 있었기에 일본을 서양과 가깝게 만들었다.


일본이 이렇게 서양의 선진 기술을 배우고 서양에 자기나라를 소개하고 있었을 그 당시 과연 우리 선조들은 뭘하고 있었을까가 궁금하다. 일본은 1634년 외국인들의 국내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나가사키에 인공섬을 조성하여 데지마(出島)라는 외국인 거류지역을 만들어 포르투칼 등 서양과 무역도 하고 여기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도 선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어 가장 먼저 개화를 한 것이다. 이 당시 즉 1634년에 중국은 부패하고도 무능한 명나라 말기 숭정제 시대였으며 북방에는 강력한 신흥 강국 청나라가 황태극의 지휘 아래 급성장하고 있던 시절이다. 우리나라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하였으나 신흥 강국 청나라를 몰라보고 무시하다가 1627년 정묘호란으로 호되게 얻어맞고 그러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2년 후인 1636년에 닥쳐올 병자호란의 전운이 감돌던 시절이다. 그리고 켐퍼가 1690년 데지마에 와서 약초원을 만들고 일본 식물을 조사할 때 우리나라는 숙종이 본처인 인현왕후 민씨를 내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 : 1743~1828)

다음은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많이 알려진 스웨덴의 식물학자이며 린네의 제자인 툰베리가 1775년 데지마에 도착하여 동인도회사의 의사로 1년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의 식물을 조사하여 수많은 동양 식물들을 분류하여 학명을 부여하게 된다. 다른 나라를 거쳐 1779년 스웨덴에 도착한 그는 맨 처음 런던으로 달려가 그보다 앞서 일본을 탐사한 켐퍼의 수집품을 살펴보러 갔다고 한다. 그가 조사한 식물관련 정보는 1784년 Flora Japonica로 출간되었는데 이를 일본식물지(日本植物誌)라고 한다. 또한 그가 수집한 동물관련 정보는 나중에 도착하는 지볼트가 정리하고 추가 보완하여 Fauna Japonica 즉 일본동물지(日本動物誌)로 1833년 출간되는 기초 자료가 된다. 식물의 학명에 저자명 Thunb.는 바로 툰베리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표식에 Thunb.와 관련된 학명은 무려 691개나 된다. 이때 중국이나 우리나라 원산 식물 또는 삼국 공통으로 자생하는 많은 식물들이 아쉽게도 일본 국명 즉 Japonica로 속명이 사용되거나 일본식 발음의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툰베리의 일본식물지(1784년)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 1796~1866)

독일 의사겸 식물학자인 지볼트 또한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자이다. 그는 1823~1829 7년간 데지마에 체류하였으며 한때 일본에서 추방되기도 하였지만 1859년에 재입국하여 1862년까지 머물렀다. 그가 일본 의학계와 식물학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일본의 많은 의학자들이 나가사키에 와서 그에게 서양의술을 사사하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미모의 일본 여성인 쿠스모토 타키와 결혼하여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쿠스모토 이네는 일본 최초의 여의사가 되며 그의 손녀 쿠스모토 타카코는 은하철도999 메텔의 모델이 된다. 일본인들이 매우 사랑하는 수국에다가 그의 처 이름인 Otaksa로 학명을 붙여 기생 이름으로 수국을 명명하였다고 비난받기도 하였지만 실상은 쿠스모토 타키는 화류계 여성이 아니라 연애시절 지볼트를 만나기 위하여 유녀(遊女)로 신분을 위장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세월이 변하여 평가도 달라져 1996년 일본과 독일 양국에서는 지볼트 탄생 200주년 기념우표를 동시에 발행한 바도 있다.


그는 일본에서 수집한 인문학적 그리고 동식물학적인 다양한 자료를 가지고 1830년 유럽으로 돌아갔는데 그 중에는 민속학적 자료 5천 점 이상 동물 표본 약 7천 점 식물 2천 종과 1만 2천 점의 식물표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동료 독일 식물학자 Joseph Gerhard Zuccarini와 함께 1835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그 둘의 사후인 1870년에 가서야 네덜란드 국립식물표본실의 책임자이던 Friedrich Anton Wilhelm Miquel에 의하여 완성된 Flora Japonica 즉 일본식물지를 남겼다. 그의 일본식물지에는 무려 2,300종의 식물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일본인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던 종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산수국 '시치단카' 인데 분명 지볼트의 일본식물지에는 에도시대에 재배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그 이후 일본 식물계에서 실체를 찾지 못하여 반신반의하던 차에 1959년에 가서야 효고현 육갑산에서 우연하게 발견된다. 그래서 100년 이상 실전되었다가 되찾은 품종이라고 일본에서는 유명하다. 그러니까 일본이라는 나라도 지볼트 이전에는 자기들이 재배하면서도 그런 품종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서양에서 온 지볼트가 산수국의 변이종이라고 알려줘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다가 100년 이상이 지나서야 겨우 되찾는 정도의 수준이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20세기 초반 나카이 등 외국 학자들이 발견하였다고 기술한 식물 중에서 현재까지 자생지를 찾지 못하는 것들이 더러 있어 남의 이야기 같지는 않다. 


지볼트는 일본에서 발견한 수많은 신종들을 동료 학자인 Zuccarini와 함께 명명하였는데 그 중 우리나라 국표식에 등록된 그의 이름과 관련된 학명만도 무려 660종이나 된다. 명명자 Siebold & Zucc.는 그와 주카리니를 말한다. 물론 그가 명명한 식물 중에도 일본 국명이 들어간 것이 많다. 지볼트는 일본식물지 외에도 인문지리서인 일본(Nippon)을 1832년 저술하였으며 그가 가져간 동물관련 자료와 툰베리가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른 동물학자에 의하여 Fauna Japonica 즉 일본동물지도 1833~1850 사이에 출간되었다. 


지볼트


지볼트의 일본식물지


나가사키 지볼트 기념관


식물의 국적?

산수국 칠단화 즉 시치단카를 탐구하다가 지볼트를 거쳐 일본 식물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양학자들에까지 온 김에 2005년 모 주간지에 게재된 "일본 호적에 입적된 한국 토종식물 -우리식물 263종 일본식물 둔갑"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가 검색되어 몇 마디 짚어보고 간다. 무려 10여 년이 지난 옛날 기사에 대하여 논평을 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지만 지금도 이와 유사한 글들이 심심하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결론은 그 심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내용으로 성급하게 주장하면 웃음거리 밖에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과거 우리 선조 유학자들이 식물에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의 지식인들도 식물에 관하여는 깊게 관심을 두지 않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다. 


그 주간지 기사의 요지는 일제 만행의 일환으로 우리 자생식물 263종이 일본식물로 둔갑하여 매우 분하다는 것이었다. 그 둔갑의 실체는 학명의 종소명에 일본 국명을 뜻하는 japonicum 등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일제가 우리 국민들에게 행한 창씨개명을 연상시키고 있다. 필자도 우리 자생종의 종소명에 일본 국가명이 나올 때마다 매번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며 그때마다 불평을 해댔지만 사실 알고보면 이는 명명규정에 부합한 합법적인 학명이라서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고 더구나 그 대부분이 일본 학자가 아닌 서양학자들 즉 위에서 언급한 툰베리나 지볼트에 의하거나 그들이 수집한 자료에 의하여 명명된 것들이라서 일제의 만행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툰베리나 지볼트는 일본의 침략 한참 전에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소명으로 쓰인 국가명은 그 식물이 속하는 국적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그냥 그 식물을 발견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도대체 식물에게 무슨 국적이 있을까? 다만 자생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의 종이 이 나라에서도 자생하고 저 나라에서도 자생하며 심지어는 몇 개 대륙에 걸쳐 수많은 국가에 자생하는 경우도 많은데 무슨 국적이 있겠는가? 오늘 현재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고유종이라고 하더라도 내일 그 식물의 자생지가 중국에서도 발견되면 중국도 자동으로 곧바로 원산지가 되는 것이 바로 식물이다. 이미 우리는 왕벚의 국적 논란에 대하여 우왕좌왕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일제시대 일본에서 사쿠라를 가져와 심고 즐기다가 해방 후 한때 일본 대표 꽃나무라고 배척하여 뽑아버렸다가 다시 일본 왕벚나무의 원조가 제주 왕벚나무라는 설이 돌아 다시 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다가 불과 며칠 전인 2018.9.13에 산림청에서 유전자감식 결과 제주 왕벚과 일본 왕벚나무 즉 소메이 요시노는 혈통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럼 이제 전국의 퍼진 일본 왕벚나무를 찾아서 모두 뽑아 낼 것인가?


금송과 금송속 금송

일본 고유식물(특산식물)

나한송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로 알려졌지만 둘 다 소나무과는 아니다.


금송

Sciadopitys verticillata

2006년에 태어난 일본 천황 손자의 인장으로 선정되었다. 

그래서 일부에서 금송이 일본의 상징 또는 일본 황실의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황이나 황태자의 인장은 따로 있으며 그외 모든 황실가족이 각기 다른 인장을 가지고 있어 금송이 일본 또는 황실의 상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산 현충사 금송 (사진출처 : 한겨레, 조선닷컴)

일본 고유식물을 박정희대통령이 이순신장군을 모신 현충사에 심었는데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논란하다가 최근에 이전을 했다. 나름대로 틀린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어쩐지 정치문제에 식물이 휘말린 것 같아서 안타깝다. 


나한송과 나한송속 나한송

Podocarpus macrophyllus

중국과 일본 자생식물


나한송

   

분류체계의 최 말단인 속과 종 두 개를 붙여서 학명으로 부르는 이명법에서 속명은 그 식물의 형태와 특성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분류되는 것이므로 아무리 발견자라고 하더라도 임의로 변경할 수가 없다. 즉 감나무 종류를 포도나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종소명은 새로운 종을 발견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붙일 수가 있는 고유 이름이다. 예를 들면 xx감나무, **감나무라고 할 때 감나무는 속명이고 xx와 **를 종소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학명에서는 감나무 xx와 같이 순서로 뒤바꿔 라틴어로 표시하는 것인데 이 xx 즉 종소명은 발견자 즉 명명자가 자기 마음대로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종을 발견하여 학회지에 보고하는 식물학자가 임의로 정하는 것이 종소명인데 대개 1.원산지에서 부르는 이름 2.그 식물의 특징 3.발견된 자생지나 표본을 채취한 장소 4.식물 탐사를 도운 후원자나 식물학자 이름 등으로 정하며 심지어는 드물게 친지나 가족의 이름으로 정하는 경우도 있다. 분류학 창설 초창기에는 식물 탐사대가 어느 국가나 지역에 가서 무더기로 수집한 수많은 표본을 대상으로 연구실에서 정리하고 분류하여 한꺼번에 거의 마구잡이식으로 명명하던 시절이라서 특징이나 장소가 엉뚱하게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장소도 좁은 지역명이 아닌 광범위한 나라명을 많이 사용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그 나라에서만 자생하는 고유식물이거나 그 나라 전역에서 두루 자생하는 종이 아니라면 국가명을 잘 사용하지 않고 굳이 장소로 정하려면 좁은 특정 지역명을 사용한다. 따라서 국가명이 들어간 학명이라고 그 나라 호적을 취득하는 것이 절대 아니며 그냥 그 신종을 발견한 장소라는 개념이다. 더구나 초창기 식물 채집가들은 그 식물이 이웃의 다른 나라에서도 자생하는지를 파악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예를 들면 학명이 Camellia japonica L.로 표기되는 동백나무의 경우 1775년 린네가 직접 명명한 것인데 이때 린네가 이 동백나무가 일본 국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일본 고유종이라고 판단하고 명명한 것은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린네가 동백나무속명을 Camellia로 정할 때 필리핀에서 식물탐사를 하던 Kamel이라는 사람을 기려 명명한 것인데 그가 가져온 노트에 동백나무의 기록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설혹 동백나무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도 자생한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도 동백나무가 자란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던 린네가 일본 고유종이라고 단정하였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동백나무는 한중일 3국이 원조 논쟁을 하고 있지만 그 것과는 무관하게 린네가 japonica로 명명한 이유는 독일 학자가 과거 일본에서 채취한 표본을 토대로 명명하였기 때문이다. 종소명에서 국명이란 그저 그런 뜻일 뿐이다. 


학명 Camellia japonica L.로 표기되는 동백나무

린네가 일본에 직접 온 것은 아니지만 표본이 일본에서 채취되었기 때문에 japonica로 명명되었다. 


그러니까 그 주간지 기자가 분개한 한국 토종 식물이 일본 호적에 입적되었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옳지 않은 표현이 되고 만다. 우리 외에 일본에서도 자생하는 식물을 일본에서 발견하여 표본을 채취하여 japonica로 종소명을 정하여 명명한 것이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말한 토종식물이란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말하는 것이지만 만약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고유식물(=특산식물)에다가 다른 나라 국명을 종소명으로 붙였다면 이건 다른 문제이다. 아마 제 정신을 가진 식물학자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실제로 312종으로 파악되는 우리나라 고유식물 중 그런 사례를 전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실수로 그렇게 명명하였더라도 정정은 불가능하다. 간혹 실수로 그런 경우가 발생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중해 원산의 학명 Scilla peruviana L.로 표기되는 실라 페루비아나이다. 남유럽 포르투칼이나 스페인, 이탈리아가 원산지임에도 불구하고 남미 페루의 이름으로 린네가 잘못 명명한 것이다. 실수한 사람이 린네 자신이기 때문에 수정이 안되는 것이 아니고 국제규정이 한번 정한 이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수정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라 페루비아나 Scilla peruviana L.

Peru라는 이름의 선박에 실려 왔는데 린네가 그만 오인하여 페루라는 국명으로 명명했으나 수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자생식물에 일본 국명이 유난히도 많이 들어가게 명명된 데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서양 식물학자 세 사람의 영향이 지대하다. 아무리 일본에서 표본을 수집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동아시아 전역에 자생하는 수많은 식물에다가 일본 이름을 붙여 계속 부각시킨다는 것은 우리나 중국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등록된 학명을 기준으로 한중일 3국을 지칭하는 종소명을 사용한 식물의 수를 파악해 보자. 


우리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등록된 한중일 3국을 뜻하는 종소명을 가진 식물

 국  가

종소명

우리 자생종

재배식물

합  계

 한  국

koreana, coreana, chosen 등

149(3.6%)

10

159

 중  국

chinensis, sinensis, cathayensis 등 

64(1.5%)

133

197

 일  본

japonica, japonicum, nippon 등 

269(6.4%)

360

629

괄호안 비율은 전체 자생종 대비율이다.

종소명은 속명의 성에 따라서 변한다. 예 : koreanum(중성) koreanus(남성) koreana(여성)


위 표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자생종 중 269종이 일본 국명으로 종소명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 자생종이 모두 4,179종이므로 6.4%에 해당한다. 재배식물까지 포함하면 Japonicum 등으로 명명된 종은 모두 무려 629종이나 된다. 반면에 우리나라를 뜻하는 koreanum 등으로 등록된 자생종은 149종에 불과하여 겨우 3.6%에 지나지 않는다. 재배식물 10종은 우리 자생종의 원예품종이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중국은 아무래도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와 식물 분포상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chinensis 등의 학명을 쓰는 우리 자생종은 겨우 64종이라서 269종인 일본과 대비가 된다. 이는 한중일 3국에 모두 자생하는 종을 주로 일본에서 수집한 표본을 대상으로 명명하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툰베리나 지볼트가 일본에서만 식물 조사를 하고 우리나라나 중국에까지는 조사하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반대로 일본의 학명 리스트에 등록된 식물 중에서 파악해 보면 학명 기준으로 japonicum이 1,729종 chinensis가 443종 koreanum이 192종으로 압도적으로 일본 국명을 사용한 학명이 많다. 중국과 우리나라로 명명된 종은 실제로 중국과 우리나라 특산식물일 가능성이 높다. 수록된 31만여 종의 식물 중에서 대부분이 자생식물인 중국식물지에는 koreanum 등으로 등록된 종은 겨우 20종이고 japonicum 등으로 등록된 종은 무려 약 300종이 되어 중국에 자생하는 많은 식물들도 상당수 일본 국명을 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 참고로 한중일 3국의 식물 분포 현황과 고유식물의 현황을 알아보자.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고유식물을 정확하게 정리하여 현재 312종이라고 2017년에 밝힌 바가 있으나 일본의 경우는 그런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없으므로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가 없고 다만 추정할 뿐이다.


한중일 3국의 식물 분포 현황

구  분

우리나라

중  국 

일  본

 자생식물 전체

 4,179

약 32,000

약 5,500

고유식물(특산식물)

312

약 16,000

약 1,000

 고유식물 비율

 7.5%

 50%

 18%

전체 자생식물의 종수에 비하여 일본에 고유식물이 많은 것은 남쪽 오키나와 지역에서 자생하는 열대식물이 한몫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고유식물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다.


[팩트체크]-나카이가 과연 토종식물 호적 변경의 주범인가?

그 주간지 기사에서 일본 학자 나카이가 상당수 우리 자생식물에 일본 호적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과연 그 기자의 말대로 나카이가 국내 식물을 조사하여 일본에 자생하거나 일본과 한국에 자생하는 것은 japonica로 한국에서 자생하는 것은 koreana로 명명하였는지 팩트체크를 해보자. 우리나라 식물분류체계는 사실 일본학자 나카이가 거의 혼자 완성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하여 우리나라 국표식에 나카이가 관여한 학명이 무려 2,611건이나 된다. 그 중 자생종 만도 698종이나 된다. 우리 자생종 698종 중 종소명이 koreana로 된 것이 54종이고 japonica로 명명된 것은 불과 27개에 불과하다. 그리고 chinensis로 명명한 것이 10종이 된다. 나머지 기타가 607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명명에 관여한 재배식물도 35종이 있는데 거기에도 japonica로 명명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학자 나카이가 명명한 우리 자생종 종소명 현황

자생종 명명 총수

koreana 등 한국명

japonica 등 일본명

chinensis 등 중국명

기타 종소명

698종

54종

27종

10종

607종

비 율

7.7%

3.9%

1.4%

87.0%

평 균

3.6%

6.4%

1.5%

88.5%


위 표에서 나타나듯이 결과는 기자의 주장과는 달리 나카이는 전혀 비난받을 만하지 않았다. 일본 국명으로 명명한 것이 겨우 3.9%로 전체 평균 6.4%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 오히려 한국 국명으로 명명한 것은 7.7%로 전체 평균 3.6%에 비하여 크게 높았다. 따라서 이쯤 되면 일제시대에 일본 학자 나카이에 의하여 우리 토종식물이 일본 호적을 가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기사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의 실체와 발생 원인

비록 2005년 울분을 토로한 주간지 기자의 주장에는 많은 헛점이 있다지만 그렇다고 일본에만 자생하는 고유식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도 자생하는 식물에다가 일본 국명을 포함하여 부르려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종소명에 일본 국명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일본어 발음 그대로 명명된 식물도 많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사랑하였던 정원수이자 유실수이며 원산지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여 거의 나라꽃나무 취급을 하는 매화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1830년 지볼트가 일본에서 이 매실나무를 발견하고 매화의 일본 발음 우메(うめ)의 고어인 무메로 종소명을 정하여 Armeniaca mume Siebold로 학명을 명명해 버린 것이다. 우리보다도 중국 입장에서 보면 정말 테러를 당한 기분일 것 같다. 그러나 독일인이 명명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놓고 하소연도 못한다. 또 하나 학명 못지않게 영향력이 큰 식물의 영어 이름 상당수가 일본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을 통하여 서양에 전해졌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어떻게 막을 도리가 당장은 없어 보인다. 예를 들면 매화를 Japanese apricot로 단풍나무를 Japanese maple로 찔레꽃을 Japanese rose로 때죽나무를 Japanese snowbell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건 학명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이다.


세상의 모든 식물을 하나의 기준으로 분류하여 이름을 정하고 특징을 묘사하여 목록을 만들자는 식물분류학이 서양에서 창설되어 세계 각지로 식물을 조사하러 다닐 때 우리나라는 영조가 정조에게 양위를 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손자를 쥐잡던 시절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린네의 제자 툰베리가 일본에 와서 눈에 보이는 식물을 거의 대부분 japonica라고 명명해 버렸고 나중에 온 지볼트도 일부 그렇게 하였고 그들에게 배운 일본학자들도 자기들 나라에서 발견한 것을 더러 japonica라고 그대로 따라하고 만다. 서양인들 입장에서는 저 멀리 동양에서 발견한 식물이므로 japonica라고 해도 특정화 되지만 자국인 일본 학자들은 최소한 현이나 군 또는 산이름 등 좁은 지역명을 사용하여야 더 명확함에도 그 당시는 그대로 국명을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일본과 겹치는 많은 우리 자생종의 이름에 일본 국명이 들어간 것이다. 차라리 일본 산이나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어도 우리의 기분이 덜 나쁠 것이다. 


게다가 서양인들에게 일찍 문호를 개방하여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일본 학자들의 수준이 높아지자 1900년대 초 우리나라에 나카이라는 젊은 일본학자를 파견하여 우리나라 식물분류체계를 확립하게 한 것도 우리로서는 마냥 유쾌한 것 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유능하면서도 아주 열정적으로 일했다. 우리나라 정태현선생과 함께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며 노력하여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었지만 그만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금강초롱에 초대 일본 공사인 하나부사의 이름을 붙여서 우리의 분노를 사고 만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당시는 한일병탄 상태였으므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우리 자생종 모두를 japonica라고 하지 않은 것 만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가끔 든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는 일본 외교관으로서 1877년부터 1882년까지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대리공사 또는 초대공사를 역임하였던 자인데 1882년에 김홍집과 더불어 이른바 불평등조약이라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자이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한성에 일본군이 합법적으로 주둔하게 되어 곧 이어질 일제 강점의 길을 닦게 된다. 그러나 그 하나부사가 식물에 관심이 많아 수시로 조선에서 채집한 식물 표본을 동경대에 보내 기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식물연구의 단초를 만들었다는 동경대의 권유에 의하여 금강초롱을 하나부사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고 나카이가 나중에 밝히고 있어 그의 처지가 전혀 이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못내 아쉽다.   


이런 문제의 시작은 조선시대로 올라간다. 우리나라에 서양 식물조사단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우리나라에는 오지 않았을까? 우리나라는 제주도에서 구상나무를 발견하고 울릉도에서 섬개야광나무를 발견하였던 미국의 어네스트 윌슨(Ernest H. Wilson ; 1876-1930)이 1917~1918년에 탐사하러 온 것 외에는 서양인이 국내서 식물조사를 변변하게 한 적이 없다. 그것도 뒤늦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우리나라가 병자호란 이래 서양인들의 출입을 막았던 쇄국정책도 하나의 원인이겠지만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우리 사대부들이 문헌에 등장하는 소수의 식물 외에는 정원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조선시대 이름난 정원에 가봐도 이름난 정원수는 드물다. 산이나 강 또는 계곡 등 자연과 잘 어울어지게 배치한 한옥 건물과 배경 산수가 무척 아름답지만 희귀하거나 특이하게 아름다운 정원수가 많이 심어진 중국이나 일본 같은 정원은 보기 힘든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입국하기도 어렵거니와 입국한들 별로 볼만한 식물이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가 말 그대로 금수강산이고 정말 식물의 보고라고 소문이 났다면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서양의 식물 채집가들이 그냥 지나쳤을 리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어네스트 윌슨 (영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유명한 식물 헌터)

1917. 8. 30 우리나라 탐사 중 어느 여관 앞이라는데..

사진 출처 : 하버드대학


당면 과제

과거 서양인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고 일본에만 왔다 가서 일본 중심으로 다 해치운 것을 이제 와서 뭘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 이제는 별 도리가 없다. 쉽게 말하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잔치는 끝났고 버스는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마냥 울분만 토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정말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나카이 이후 신종발견이 거의 중단된 상태인데 과거 나카이가 했듯이 이제라도 우리나라 산천을 샅샅이 뒤져 정확한 식물조사를 실시하여 우리 나라 식물도감을 제대로 정비할 때라고 주장하고 싶다. 위에서 보듯이 우리 고유식물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턱없이 적은 이유는 나름대로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식물학자들이 식물조사와 신종발굴을 게을리하였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아직 변변한 도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나같은 일반 시민들만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한국 자생 식물에 대한 제대로 된 도감이 없어서 내국인도 정보를 얻을 데가 마땅하지 않는데 어찌 우리 식물이 외국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랄 수 있겠으며 어찌 한국식 이름으로 불러 주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